베르나르 [843417] · MS 2018 (수정됨) · 쪽지

2020-07-29 23:00:38
조회수 4,231

힘들 때 안 돕는 사람들? 이해와 도움에 관하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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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은 공평하다. 그래서 꿈이 높은 사람에게는 그 높이 만큼의 시련을 준다."


아버지와 술을 먹으면서 나눈 이야기입니다.

우리 가족은 내가 조울증이라는 사실을, 그래서 약을 먹고 상담을 받고 있다는 사실을 압니다.

애초에 그분들의 지원이 없었다면 병원을 가는 것 부터가 무리였을 것입니다.

그런 가족의 반응은 둘 중 하나일 것입니다: 이해하거나, 이해하지 못하거나.

저는 당연히 그들의 이해를 바라지 않았습니다.

가족이라면 이해를 바라야겠지만, 이건 정신'병'이고 나는 정신'병자'니까요.

고통은 아파본 사람들끼리만 나눌 수 있다고 하던가요, 그 말은 가족간에도 꼭 들어맞습니다.

인정할 건 인정하자고, 그래서 가족으로부터 진심에서 우러나오는 고통에 대한 공감을 바라지는 않았습니다.


그렇다면 제가 직면해야만 하는 문제 하나가 생깁니다.

'이해받지 못하는 사람으로부터 어떤 도움을 받아야 하는가?'

이것은 참 어려운 문제입니다. 

곤경에 처한 사람은 응당 그에 맞는 도움을 받아야 하는데,

그게 애초에 곤경인지조차 이해 못하는 사람도 있고, 

이해해도 그게 어떻게 곤경인지 이해하지 못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애석하게도 육체라는 물질적 한계는, 가족에도 그런 소통의 장애를 유발합니다.

결국 '나'는 '너' 또는 '그'와 동치일 수 없기 때문에, 100% 공감을 요구할 수는 없는 노릇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어쨌든 고통받는 사람에게 도움은 주어지기 마련입니다.


어머니는 제게 무한한 지지를 보내는 방식으로 도움을 주셨습니다.

그저 궁금한 것 몇 개 만을 묻고, 조금씩 고개를 끄덕이며 알겠다고만 하십니다.

필요한 것이 있으면 -그게 물질적이건 정신적이건- 모든 것을 주십니다.

저는 곤경에 처한 지금에서야, 불효스럽게도, 어머니의 사랑이란 것을 실로 체감하게 된 것입니다.


문제는 아버지였습니다. 아버지는 처음에는 제 문제를 문제라고조차 인식하지 않으셨던 듯합니다.

'이 젊은 나이에 왜 너무 깊이 생각을 해서 감정을 잃어버리느냐, 생각을 하지 마라' 라고 하셨던 게 기억납니다.

솔직히 상처받지는 않았습니다. 

앞서 말했듯이, '그런 식으로' 아파보지 않은 사람더러 

'그런 식으로' 아픈 사람에게 100% 공감을 요구할 수는 없으니 말입니다.

그럼에도 아쉬운 감정이 남았던 것은, '조금은 더 너그럽게 생각해주실 수 없을까' 하는 것이었습니다.

즉, '왜 깊이 생각을 하게 되었느냐' 정도는 제게 물어봐줄 수 있지 않으실까하는 아쉬움은 남는 것입니다.


그런 아버지에게 반감을 갖기도 했고, 어느 정도 소원하다고 -적어도 스스로는- 느끼기도 했습니다.

그러다가 오늘 술을 마시게 되었고, 아버지는 제가 글의 처음에 언급한 말씀을 하셨습니다.

"신은 공평하다. 그래서 꿈이 높은 사람에게는 그 높이 만큼의 시련을 준다."

제 그릇이 크다고, 그래서 꿈이 크다고, 그래서 힘든 것을 이해한다고 말하는 아버지 나름의 방식이었습니다.

저는 뒤통수를 세게 맞은 느낌을 받았습니다. 

저는 아버지가 제게 공감하지 못한다고 느꼈지만, 아버지는 나름대로의 방식으로 공감을 시도하고 있던 것입니다.

문제는 그저 소통 방식의 차이, 무엇을 앞서 말하고 무엇을 나중에 말할 것인가의 문제였던 것 같습니다.


그래서 술을 먹고 잠을 자러 방에 들어온 지금, 이 글을 쓰고 있습니다.

'어떤 문제는 모두가 겪고 있는 문제고, 선후의 차이만 있을 뿐 그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모두가 노력한다.'

이게 오늘 제가 아버지와 술을 마시며 느낀 바입니다.


항상 오르비에 들어와 이런 글을 쓰는 것은, 

결국 제가 겪은 재수와 삼수 때의 어두운 감정과 지금 겪고 있는 문제로 인한 감정이 일맥상통하기 때문입니다.


여러분도 이해받지 못해서, 또는 도움받지 못해서 기분과 감정이 상한 경우가 있을 것입니다.

하지만 -적어도 제가 지금껏 보고 느껴온 바에 따르면-, 그것은 결국 선결의 문제입니다.

누군가가 A라는 타이밍에 도움을 필요로 할 때, 

어떤 사람은 A라는 타이밍에 정확히 도움을 줄 수도 있고,

어떤 사람은 a라는 살짝 빗나간 타이밍에 도움을 줄 수도 있고,

어떤 사람은 B라는 전혀 다른 타이밍에 도움을 줄 수도 있습니다.

그것은 순서의 문제이고, 논의를 통해 갈등이 방지될 수 있는 종류의 것입니다.

도움을 받지 못해 속이 상했을 때, 그가 이해를 하지 못해서 도움을 주지 않는다고 생각하는 것은,

한 번은 유보해보아도 괜찮을 판단입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모두 사람이고, 

그래서 본질적으로 -필요하지 않은 경우에는- 누군가에게 피해를 주고 싶어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이 문장은 제 가치관이 개입된 문장이므로 정확하지 않을 수 있습니다.

저는 평소에 이렇게 생각합니다 -조금 러프한 표현을 허용해 주신다면-: '사람은 개새끼가 아니다.'

어떤 사람도 개새끼이고 싶어하지는 않기 때문에, 어떤 방식으로든 다른 사람에게 선의를 베풀 의향이 있습니다.

그게 아닌 경우는 그 사람에게 여력이 없는 경우라고 생각합니다: 자기 자신을 돌보기에도 바쁜, 그런 사람들은.


그래서, 이해와 도움은 항상 차분한 마음으로 기다릴 때 주어지는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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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종합약손 · 979856 · 20/07/29 23:03 · MS 2020

    좋은 글 이네요

  • 베르나르 · 843417 · 20/07/29 23:10 · MS 2018

    두서없이 쓴 글인데 좋게 봐주셔서 감사합니다 :)

  • 종합약손 · 979856 · 20/07/29 23:17 · MS 2020

    읽고 정말 감명 받았어요 저도 비슷한 생각을 종종 하곤 했었거든요 더 길게 댓글을 남기고 싶지만 말솜씨가 없어서 못적겠네요.. 좋은 글 써주셔서 감사합니다

  • snuph24 · 973013 · 20/07/29 23:15 · MS 2020

    잘 읽었습니다

  • 베르나르 · 843417 · 20/07/29 23:20 · MS 2018

    감사합니다!
  • 金元燦 · 972101 · 20/07/29 23:47 · MS 2020

    오늘 제가 고민하는 부분이였는데 마음 편해졌어요

    선생님들은 가정의 문제를 잘 이해 못 하는데 완벽한 이해와 공감이 없다는 걸 받아들이기로 했어요

    떠나기 직전까지는 최대한 열린 생각으로 사려고요!

  • jmarie · 919442 · 20/07/30 00:44 · MS 2019 (수정됨)

    여러분도 이해받지 못해서, 또는 도움받지 못해서 기분과 감정이 상한 경우가 있을 것입니다.

    지금 제가 그런데 ㅠㅠ 가족들도 너무 너무 힘든 상황이라 속 털어 놓을 사람이 없어서 정말 너무 너무 힘드네요...모두들 너무 큰 짐을 지고 있는것같아서 너무 마음이 아파요 ㅠㅠ

    진짜 꿈의 높이 만큼 시련을 준다는 말이 너무 위로가 돼요... ㅠㅠㅠㅠㅇ

  • 우유비트 · 884273 · 20/07/30 00:48 · MS 2019

    관용이 넘치는 삶이네요
    부럽습니다

  • 오르비오르비요 · 927008 · 20/07/30 01:05 · MS 2019

    저도 우울증, 공황 있는데 아버지가 앞에서는 이해한다하면서 화나서 뭐라하실 때는 니 아픈게 자랑이냐 니만 힘드냐 니만 죽고 싶냐 이래서 큰 충격..

  • Parabellum · 919386 · 20/07/30 02:30 · MS 2019

    좋은글 정말 잘 읽고가요.
    작성자 분의 고민해결을 기원합니다

  • 해방역교 민족역교 · 871793 · 20/07/30 03:01 · MS 2019

    글 잘 읽었습니다.

  • 타래 · 907355 · 20/07/30 05:26 · MS 2019

    좋은 글 고맙습니다

  • Gavroche · 799225 · 20/07/30 09:33 · MS 2018

    감사합니다

  • .하늬바람. · 910816 · 20/07/30 11:20 · MS 2019

    와 좋은 글 감사합니다
  • 줄리아❤ · 865909 · 20/07/30 11:59 · MS 2018

    필력 진짜 좋으시네요....브런치 하셔도 될 듯!!bb

  • 호떡장수 · 855246 · 20/07/30 17:51 · MS 2018 (수정됨)

    베르나르 베르베르 한국인 부캐인가?

  • 성이름 · 813370 · 20/08/02 00:19 · MS 2018

    요즘 들어 내가 문제 삼고 있는 것을 당신은 이해해줄까, 아마 대부분이 그렇겠지만 내가 문제라고 인식한 것이 당신에게는 관심 둘 생각조차 하지 않은 것이면 어쩌나, 내가 그것을 문제 삼는 이유를 들려줘도 당신이 공감을 해주지 못한다면 어쩌나.. 하는 생각을 하면서 스스로의 소통 방법이 잘못됐던가하는 고민을 했습니다. 그런데 베르나르님 글을 읽으면서는 소통의 방법보다는 나의 고민이 전달됐으면 하는 인간 그 자체에 대해 생각해보게 됐어요. 글을 읽으면서 이해받기를 기대할 수 있는 인간이 되는 것도 중요하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