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르나르 [843417] · MS 2018 · 쪽지

2020-07-28 18:33:25
조회수 2,375

인연의 이상함에 대하여 (연애썰)

게시글 주소: https://orbi.kr/00031350214

두괄식으로 어떤 일이 있었는지만 보고하자면 다음과 같습니다.


1. 삼수 전 학교에서 어떤 친구에게 고백하고 차였다.

2. 삼수 후 그 친구와 만나게 되었고 그 날 바로 사귀었다.

3. 어느 순간 연락이 안 되기 시작하더니 또 차였다.

4. 훗날 그 친구와 무덤덤한 얘기를 나누고 그 친구는 자신의 잘못을 시인했다.


인연(因緣)이라는 단어는 참으로 이상합니다.

두 사람의 관계를 일컫는 가장 보편적인 명사인 동시에,

누군가의 애틋한 마음을 이해해주는 사려깊은 형용사이기도 합니다.

(문법적으로 정확한 이야기는 아닙니다. 그냥 하는 이야기입니다.)

애틋한 마음이란, 참으로 골치아픈 악동과도 같은 존재라서

언젠가는 제게 크고 아름다운 사랑을 주었다가도

곧 그것을 빼앗아가기도 하는 -꽤나 다양한 이유로- 감정입니다.

그 효용이 무엇이냐고 물으신다면, 저는 해와 달, 별, 나무 같은 것들의 효용과 같다고 말하겠습니다.

그 자체로 아름다워서 마치 불나방처럼 그것에 다가가야만 하는 것입니다.


그것을 알게된 것은 제 첫 사랑과의 기묘한 만남의 방식 때문이었습니다.


재수를 끝나고 처음 대학에 들어가 대학 생활을 만끽하던 그 때 그 친구를 처음 만났습니다.

그 친구로 말하자면, 그 당시에는 '빛나는 사람'이라는 인상이 들었습니다.

그녀의 외모가 특출나거나 그랬던 것은 아닙니다. 지나가는 여자 A씨와도 같은 인상이었습니다.

그럼에도 그 친구에게 관심이 간 것은 그 친구의 쾌활함과 적극성 때문이었습니다.

술을 마실 때면 떠들썩하게 흥을 돋우던 것도 그 친구였고, 

주도적으로 여자아이들을 모아 서로 단합하던 것도 그 친구였습니다.


그 친구와 처음으로 대화를 나눈 것은 과제를 하기 위해 과방에서 밤을 새운 다음 날이었습니다.

문을 벌컥 열고 들어오더니 저와 자고있는 제 친한 동생을 보고는 제게 과제를 다 했냐고 물었습니다.

저는 조금 남았다고 했고, 그 친구도 조금 남았으니 과제를 같이 하자고 했습니다.

얼마간 과제를 같이 하며 이런 저런 대화도 나누었고, 마침 아침인지라 함께 밥을 먹기도 했습니다.

어쩌면 그 때부터 그 친구의 '빛남'에 물들었는지도 모릅니다.

이전의 두 글에서 언급했다시피 제게는 사그라들지 않은 내면의 어두운 감정이 남아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런 제게 그녀의 쾌활한 모습은 정말로 아름다웠습니다. 정말로.


몇 번 술도 마시고, 같이 놀러 다니기도 하면서 그녀가 점점 마음에 들었었고,

남중 남고를 나와 연인 관계가 시작하는 방법에 대해 잘 몰랐던 저는 그만 섣불리 고백했습니다.

지금 생각해보면 참으로 낯부끄러운 방식인지도 모릅니다. 

같이 자취방에서 술을 마시며 영화를 보다가, 덜컥 나도 모르게 손을 잡아버렸으니 말입니다.

그녀는 잠시 아무 말 없이 가만히 있더니 이윽고 손을 놓았습니다.

그 때 가슴이 덜컹, 내려앉는 느낌이었습니다. '아, 이게 아닌데.' 

좀 더 잘할 수 있는데, 그만 참지 못하고 저질러버린 실수에 스스로 자괴감이 들기도 했습니다.

그 날 저녁은 제가 그 친구를 집에 바래다 준 것으로 끝났습니다.

집 앞에서 그 친구와 포옹을 했던 것으로 기억합니다. 돌이켜 보면, 작별인사였던 것 같습니다.


그 이후 저는 홀린듯이 삼수 결정을 하게 되었습니다.

삼수 결정을 하는 데에는 많은 이유가 있었는데 그 친구가 그 중 하나였음을 부정할 수 없습니다.

삼수를 하는 동안에도 가끔씩 그녀가 생각나기도 했는데, 

'이미 끝난 것에 미련을 갖지 말자'라고 되뇌이며 스스로를 다독이기도 했습니다.


삼수가 끝나고, 본격적으로 대학생활을 시작할 무렵 그녀에게서 연락이 왔습니다.

저는 깜짝 놀랐습니다. 정확히는 친한 동생을 통해 연락이 닿은 것이었습니다.

저는 제가 놀랐다는 사실에 오히려 더 놀랐는지도 모릅니다.

놀랐다는 것은, 저도 모르는 사이에 그녀에게 감정이 남아있었기 때문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많은 바쁜 일이 있는 와중에 서로 연락을 주고 받았고, 건대 앞에서 그녀와 만나게 되었습니다.

그녀와 영화도 보고, 식사도 하고, 건대 호수를 걷기도 했습니다.

그 동안 정말로 많은 이야기를 했습니다. 서로의 내면에 담겨있던 많은 이야기들을.

저는 제 내면에 있는 우울하고 두려운 감정들에 대해 털어놓았습니다.

어쩌면 내가 그 때 그녀의 손을 그리도 성급하게 잡았던 것은,

내 앞에서 빛나는 그녀를 놓쳐버리면 다시 빛은 사라지도 어둠으로 돌아가게 될 지도 모른다는

저 스스로에 대한 채근으로 인한 것일지도 모른다고, 그녀에게 솔직히 말했습니다.

그 때 처럼, 아무 말 없이 그녀를 집 앞에 바래다주었고, 

그녀가 사실 저를 좋아한다고 말했고, 그녀는 저와 사귀게 되었습니다.


중간 과정은 이런 저런 달달하고 뻔한 이야기들이니 할 말은 없습니다.

아마 저에게서 듣는 것 보다 훨씬 더 실감나는 연애담들을 만나려면 대숲이나 페북 페이지에 가면 될 것 같습니다.

그녀와 헤어지게 되는 과정은, 그녀에게 힘든 일이 일어나고 부터였습니다.

유학 준비중이었던 그녀의 집안에 사정이 생겨서 그녀가 급하게 본가로 내려가고부터

연락이 잘 안되기 시작한 것이었습니다. 우리 관계는 너무, '그냥 그렇게' 끝났습니다.

그냥 그렇게 끝나는 것이 자연스러웠을 지도 모릅니다. 그게 당연할 수도 있었던 것 같습니다.

하지만 그 때 제가 느낀 감정은 '그냥 그렇'지 못했습니다.

또 한 번, 내가 실패한 것은 아닌지에 대해 끝 없는 의구심이 들기 시작했던 것입니다.

지금 돌이켜보면, '그냥 그럴 수 밖에 없는' 인연에 불과했던 것 같습니다. 


그 의구심이 해소된 것은 몇 달 전의 일입니다.

술을 먹고 무심결에 그녀에게 카톡을 보낸 것입니다.

그녀는 유학에 성공했고, 그곳에서 새로운 사람을 만나 잘 지내고 있었던 것 같습니다. 

저는 저와 그 친구의 인연이 나의 잘못으로 인해 끝난 것인지를 물었습니다.

내가 뭔가 잘못했는지 알려달라고. 앞으로 내가 만날 누군가에게 실수할 수도 있으니.

우리 관계가 그렇게 끝나야 했던 이유에 대해서 물어보았습니다.

알고 보니, 사실 그녀도 당시 우울증을 겪고 있었던 것 같았습니다.

여러 악재가 겹치고 겹치다보니, 자신 외에는 챙길 겨를이 없는 이기적인 상황.

저도 이해할 수 밖에 없는 상황이다보니, 저는 한 동안 폰을 잡고 아무 것도 적지 못했습니다.

그리고 그 날은 그렇게 끝났습니다.


이제 그 친구와는 아무런 연락도 하지 않습니다. 

장장 2년 정도에 걸쳐 지속된 인연, 

가늘고 길고 끈덕지고 무겁게 이어졌던 그 인연에 매달린 것은 큰 경험이 되었습니다.

제가 그것으로부터 배운 것은, '어떤 일이 일어나도, 그럴 수 밖에 없다.'는 것입니다.

저와 그 친구의 감정이 타이밍을 맞추지 못하고 자꾸 엇나갔던 것도, 

어쩌다 우연히 타이밍이 맞아 몇 주간 감정선을 맞출 수 있었던 것도,

그냥 그럴 수 밖에 없었던 일입니다. 그런 일이 일어나는 건, 그럴 수 밖에 없다고.

그래서 또 한 번 우리의 감정선이 어긋나버린 것도 어쩔 수 없다고, 그럴 수 밖에 없다고.


아마 다른 많은 사람들도 그럴 것이라 생각합니다.

인연이란 참으로 이상한 형태로 우리를 구속합니다. 

알 듯 하면서도 알지 못할 그 감정과 뭉근한 인상의 연속으로 인연은 구성되어 있습니다.

어떤 인연은 정말 칼같이 정의되어 있습니다. 심지어 제도화되어 있기도 합니다.

하지만 어떤 인연은 그렇지 않아, 그 자체로 모험이 되기도 합니다.

그래서 그 과정을 겪으면서 일말의 기쁨을 얻기도 하고, 크나큰 고난에 처하기도 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분명한 사실은, 그런 역경의 순간에 조차,

내가 내밀었던 한 통의 카톡, 내가 내미는 한 쪽 손, 내가 일으키는 일말의 용기는

항상 인연의 전환점이 되어 제게 새로운 것들을 경험시켜주었다는 것입니다.

인연은 자신의 판단에 의해 결정됩니다. 그래서, 나 자신의 의지만 있다면 

항상 내게 새로운 형태로 다가오고 또 얌전히 떠나갈 것입니다. 


이 글을 쓰면서, 동시에 저는 제가 여러분께 무엇을 말하고 싶은지를 되뇌이고 있습니다.

아무래도 오르비답게, 수능이라는 존재와의 인연에 대해 말하는 것인지도 모르겠습니다.

나 자신의 의지만 있다면 수능이라는 것은 제게 달리 다가오고, 

편안한 마음으로 그 인연을 받아들인다면 수능은 저와 즐거운 춤을 추는 동반자가 될 것입니다.

모든 인연이 그러하듯, 떠나가기도 하고 다가오기도 하고,

함께 손을 잡는 것이 기쁘기도 하고 배신감에 온 몸이 부들거리기도 하고,

그러다가도 별 일 없었다는 듯이 결과를 겸허히 받아들여야 할 것입니다. 

그것을 말하기 위해 이렇게 기나긴 글로서 비유를 제시한 것인지도 모르겠습니다.

처음 글을 쓰기 시작할 땐 아무 생각 없이 책상에 앉아 노트북을 켰으니까요.


가장 달콤하고 꿈만 같은 인연도 이렇게 이상하게 꼬이는 경우가 있습니다.

그냥 그렇다고 받아들이면 편합니다. 그러면 생각보다 많은 것이 해결됩니다.

부디 여러분이 어떤 인연에 의해 고통받는 일이 없었으면 합니다.


이만 글을 줄입니다. 자꾸 글을 쓰면서 두서없다는 생각을 하는데, 교정을 좀 하겠습니다. 

0 XDK (+0)

  1. 유익한 글을 읽었다면 작성자에게 XDK를 선물하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