뒷산괴물 [26215] · MS 2017 · 쪽지

2004-08-10 18:39: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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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란만장 뒷산괴물 대학생 만들기 - (4) 수능, 그리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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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능날 아침.

후에 어머니께 들은 바로는 일어나자마자 반찬 때문에 나는

양파냄새;에 짜증을 냈다고 한다.

예민해져 있었나보다.-_- 사실 성질이 조금...;;

어머니께서는 굳이 수능 시험장까지 오셨다.

인사를 드리고 들어갔고

친구들과는 응원의 메시지를 주고 받았다.

우리반 친구 하나가 같은 교실에서 시험을 보는 덕에 조금은 안심이 되었다.

마음의 안정을 준다는 말에 교복을 입고갔다.

게다가 교복은 여러 겹이라 온도조절에도 좋아 보였다.

내 자리는 뒤에서 세 번째 창가였다.

지난해 수능이 (01학년도) 워낙 물수능이었고 그것은 몇 년간 이어진 추세였기 때문에

수능은 쉬울 것으로 예상됐다. 문법도 비중이 낮아지는 추세였기 때문에 아예 없어질지

모른다는 의견이 나왔다.


1교시 언어영역. 시험지를 받아들었다. 조금은 긴장됐다. 하지만 언어에는 자신이 있던터라

괜찮게 풀었다고 생각했다. 시험이 끝나고 나니 아이들은 죽으려 했다.

시험을 보는 도중 난로의 열기가 뜨거워서 반팔만 입고 창문을 열었다.

그런데도 추위는 느껴지지 않았다. 30분 쉬는 시간동안 담배를 피는 친구들을 위해;;;

운동장에 나갈 때도 반팔을 입었지만 춥지 않았다. 친구들은 미쳤다고 말했다.


2교시 수리영역. 굉장히 어려웠다. 쉬운 모의고사에 익숙한 탓인지 체감난이도는

초압박이었다. 가져간 자를 어떻게든 이용해보려고 미친 듯이 발버둥을 쳤지만

다 소용없었다. -_-어떻게 시험을 봤는지도 생각이 안난다.

점심을 먹으면서 친구들과 이런 저런 이야기를 하고 가져간 책을 보려 애를 썼지만

가방 한가득 가져간 책은 아무 소용이 없었다.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대충 휴식을 취하다가 3교시를 맞았다.


3교시 수탐2. 사탐이 어렵다고 느꼈다. 식사 후라 그런지 엄청난 졸음이 왔다.

11월의 추위 속에서 창문을 열고 반팔을 입고 잠을 잤다. -_-

달게 자고 있을 무렵 감독관 아저씨가 나를 흔들어서 깨워줬다.

그런 정신에 시험을 제대로 봤을 리가 없다. gg -_-


4교시 외국어영역. 이것만 보면 끝이다. 이런 젠장. 문법 안나올 수도 있다더니!!

두 문제였다. -_-

짜증을 내며 시험을 쳤고 10분쯤 남았을 때 답안지를 바꿔달라 말하는

행각을 벌였다. 안바꿔주면 화내려고 했는데 순순히 바꿔줬다. 못봤다는 생각은 안했지만

잘본 것 같지도 않았다.

제2외국어까지 공부할 시간은 없었으므로 치지 않았다. -_-

시험을 다 치고 친구들과 운동장에서 만났다. 다들 어렵다고 투덜대는 모습이지만

나는 왠지 못본 것 같지는 않았다. -_-;


친구들과 수고했다며 포옹;을 했다. 어머니께서도 일을 가셨다가 끝날 시간에 맞춰 다시

와계셨다. 친구들과 인사를 하고 엄마를 보니 괜히 눈물이 나려했다.

지난 12년간 학교를 다니면서 오직 이 하루를 위해서 달려왔는데

(사실 남들이 달렸다면 난 경보-_-정도 했다고나 할까;;;)

이제 그 목표를 지나쳐버린 허탈감이랄까...

(달성한 게 아니다-_- 다만 지나왔을 뿐 ㅠ_ㅠ)

지하철을 타고 집으로 돌아오는 길엔 온통 수능이야기 뿐이었다. 어려웠다는 게

중론이었다.

그때는 지금같은 온라인 채점서비스-_-따위도 없고 D신문사 홈피에 올라온 답을 보고

채점을 했다.

비가 내렸다. -_- 태평한 타입인 나는 \"이러다 300점도 못맞겠는데? \" 웃으며 말했고 -_-

어머니는 역정을 내시며 담임선생님께 전화를 하셨으나, 어쩌랴 -_-이미 엎어진 물인걸.

채점을 하고 친구들과 대충 통화를 했는데 다들 죽어가고 있었다. 그만큼 수능은 어려웠다.

나는 믿었던 언어영역에서도 무너져 97.X점을 맞았고 수학도 50점대였다.

총점은 305.4 300을 간신히 넘은 실망스러운 점수였다. 대충 친구들을 모아서 가볍게 식사를

하고 집에서 잠을 잤다. 그나마 어려웠다는 게 희망이었지만 다음날 학교를 가보니 그렇지

만도 않았다. 항상 나보다 점수가 낮던 아이들도 나를 앞질렀고 그 결과 우리반

문과생 중에서도 2등을 하게됐다. 그 날 즉시 논술학원 등록한 것을 환불받았다.

이런 게 다 무슨 소용이냐, 재수나 해야겠다라는 생각을 가졌다.

그래도 원서접수는 해야했기에 배치표에 대충 맞춰서 경희대 국문과 동국대 문과대학

건국대 인문학부에 지원을 했다. 교대는 어떻냐는 주위의 권유에

\"나는 초딩들을 도저히 가르칠 수 없어요\"라고 거절했다.
(당시에는 남자 3등급 초반까지도 인천교대에 붙었다.)

논술은 시험 전날에만 한두번 써보고 말았다. 오로지 친구들과 어울려 술을 마실 뿐이었고

짧게나마 고2때 같이 학원을 다닌 K양과 연애질;을 했었다. 그냥 의미없는 시간들이었다.

경희대 논술은 크리스마스가 지난 직후였다. 수능점수만 가지고 1차로

2배수를 짤랐는데 언수외 전형이었기 때문에 사탐3등급 과탐 4등급인 나는 유리했다. -_-;

하지만 논술준비를 제대로 하지 않은 탓에 분량도 채우지 못하고 시험장을 나와야했다.

이러니 합격할 리가 없었다. 게다가 면접도 전날 경희대 홈피에 들어가서

\"인상 참 더럽네 어떻게 이런 사람이 교수지\" 라고 생각했던 교수님 앞에서 보게 되었으니

악재가 겹쳤다고 할 수 있겠다.  -_-;; 그때의 기분이란...;;

이렇게 경희대 시험은 말리고 동국대 시험은 어찌어찌해서 분량만 채우고 면접도 그런대로

봤으나 총점 반영은 역시 힘들었는지 떨어져버렸다.-_- 경희대와 동국대가 발표난 시점까지

건국대는 시험을 보지 않았다. 아버지는 건대까지도 다 떨어진 줄 알고 계셨다. 그냥 재수

해야지 하는 심정으로 그렇게 어머니와 말을 맞췄다. 지금도 가뜩이나 상심하셨는데 건대에

기대하다가 건대까지 떨어지면 더욱 상심하신다는 것이다. 그래서 건대 논술은 아버지 몰래

보러갔다. 내가 이렇게까지 살아야하는가...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 날은 춥기만 했다.

하지는 난 그 와중에도 정신 못차리고 수험생 중 82년생의 주민등록번호를 적어왔다. -_-

빠른 생일이기 때문에 술집출입이 힘들어서 그랬던 것이다. -_-;;;

그렇게 논술을 다 마치고 폐인생활을 지속하다가 합격자 발표날이 다가왔다.

예비 64번. 정원은 300명 정도였다. 붙을지 떨어질지 갈피를 잡지 못했다.

그나마도 언수사외 전형이라 64번이 된 것 같았다. -_-;

\'무슨 상관이랴 재수할 거...;\' 그런 생각을 하며 계속 폐인과 같은 삶을 살았다.

2002년 2월 2일.

내가 운영하던 친목카페(말이 좋아서 친목카페고 친구들 다 불러놓은 곳이었다.)의

정모였다. 첫사랑 C양과 잠깐 사귄 K양 그리고 같이 수능을 망친 또다른 Y군의 조합으로

술에 익숙하지 않은 시절에(지금에 비해서;) 꽤 과음을 했다.

남자 3 여자 1명이 마신 술이 3000피쳐와 소주 10병--a

\"아 나 어제 이사해서 술 취하면 집 못찾는데...\"를

외치며 그렇게 술에 취해갔다.\" -_-;

이날 취중에 친구들 앞에서 눈물을 흘렸다. 내가 왜 그리고 우리가 왜

이렇게 비참해져야 하는지 참 슬펐다. 집안 형편으로 인해 취업을 한 C양 앞에서

참 못난 짓을 했었던 것 같다. -_- 사실 처음 눈물을 흘린 계기는 그 친구였다...

내가 너무 못나 보였기 때문에...

2월 7일 졸업식 예행 연습날. 1차 추가 발표 날이었다. 강당에서 친구들과 놀고있는데;

어머니께 전화가 왔다. 합격이라고.-_- 1차에서 100명이 넘게 빠져나갔던 것이다.

이렇게 우여곡절 끝에 합격을 한 이후부터 마음이 급속도로 약해졌다.

재수를 해야지라는 처음의 다짐도 흐려졌고 집에서도 쌩재수보다는 반수를 더 원했다.

결국 나는 건대에 입학하게 된다.

물론 내 수기는 여기가 끝이 아니다. 이제 시작이다. -_-;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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