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가온 [784521] · MS 2017 · 쪽지

2018-03-16 22:26:26
조회수 12,299

일본유학 실패 후 독재하는 1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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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맨날 눈으로만 읽다가 글 적어봅니다.


저는 촌에 사는 재수생입니다. 하루에 기차 4번, 버스 배차 30분인 곳에 살고 있어요. 촌동네가 다 그렇진 않겠지만 이곳은 기울어진 간판에, 요즘같은 날이면 거름 냄새로 그득한 곳이죠.


그래서 중학교 때부터 결심했어요. 어떻게든 이곳을 탈출하겠다고. 면소재지였기 때문에 고등학교를 같은 지역으로 가면 농어촌으로 갈 수 있었겠지만 되도록이면 멀리 가고 싶었기에 기숙형 특목고에 갔습니다. 외고 좋더라고요. 급식도 맛있고, 중학교 때보다 교복도 예쁘고 참 괜찮다 싶었습니다. 영일과 들어가서 잘 살고 있던 어느날, 일본어 원어민 선생님께서 제게 조심스레 유학을 권유해주셨습니다. 저에겐 큰 기회라고 생각했어요. 외국어 고등학교에서 외국 대학으로 간다는게 이상한 일은 아니잖습니까. (일반고든 특목고든) 


권유 받은게 1학년 5월인가 6월이었을겁니다. 겨울까지 정말 많은 고민을 했고, 부모님과도 끊임없는 대화를 했어요. 그리고 고2부터 와세다 입시를 준비했습니다. 유학을 준비한다고 학교 공부를 놓을 순 없어서 학교 수업때는 꼭 집중했고, 덕분에 학교 선생님들의 눈빛도 조금은 유해졌습니다.  앞서 유학을 준비하던 분들은 모두 학교 수업을 안 들으셨으니... 그럴만도 하죠. 그래도 대학은 잘 갔으니.


여튼 그렇게 유학과 내신을 병행하기 시작했습니다. 일본어를 고1때 처음 배웠지만 그해 여름, 겨울에 N3, N2 합격했고, 한자에도 조금씩 익숙해져서 EJU 독해 문제를 풀 수 있게 되었습니다. 국영수는 5등급 밑으로는 안 가게 하려고 애를 쓰며 유학 공부를 했죠. 와대는 2학년 2학기 중간고사까지만 성적을 보기 때문에 그때까진 정말 눈을 뜨고 있는 시간 내내 책만 붙잡았던 것 같아요. 


고2 겨울방학 때, 11월 유학 시험 성적표를 들고 유학원에 갔습니다. 부산에 있어서 고시텔을 잡고 주말마다 내려갔어요. 기차 타고 왕복 5시간... 힘들었지만 그래도 와대 캠퍼스를 생각하면 힘이 났습니다. 나름 질기게 공부한 것 같아요. 학교 공부까지 합치면 학기 중에는 매일 12시간은 넘게 공부를 했으니...


 문과였지만 와세다 때문에 기벡까지 수학을 나갔고, 받아들이는 데에 어려움이 없도록 수학쌤이 많이 도와주셨습니다. 소논문(논술 비슷한거)도 꽤 늘었습니다. 횟수를 거듭함에 따라 수정할 부분도 줄어들었고, 두 세번의 탈고로 문제를 풀 수 있게 되었습니다. 원고지 노트 몇 권 썼는지도 기억이 안 나네요. 


 학교쌤들이 거긴 돈만 주면 들어가는 곳 아니냐며 비아냥거릴 때도 차마 말대꾸도 하지 못했습니다. 대학에 합격하지 않은 상태였으니 말이죠. 그렇게 대망의 고3 6월  유학시험이 끝나고 9월에 일본에 가서 본고사를 봤습니다. 수학은 6문제 중 5문제를 풀었고, 일본어는 생각보다 잘 적혔죠. 시험장을 나오고 나서는 안도의 한숨이 나왔습니다.


 공항에서 집에 돌아오니 아무도 없더라고요. 부모님이 계실 시간인데... 걱정이 되어 전화를 걸었습니다. 아빠가 입원 중이라더군요. 엄마는 며칠 있으면 퇴원이니 그때 보자고 하셨습니다. 학교로 돌아가 주말에 외박을 신청하고 아빠가 많이 아프진 않을까 걱정하며 한 주가 흘러갔습니다.


 그리고 집에 돌아왔을 때, 부모님은 제게 유학을 포기하라고 하셨습니다. 아버지의 병은 재발이 잦고, 그만큼 입원과 퇴원을 반복해야 한다고.. 회사라고 부르기도 뭣할 조그만 공장의 노쇠한 아빠에겐 너무 큰 짐이라고 생각했습니다. 머리로는 이해했지만 마음으론 유학에 대한 미련이 가득했습니다. 3학년이 되고 나서는 아예 수능 공부를 놓았기 때문에 9월 중순이 다 되어서 어떻게 해야할 지 감도 안 잡혔죠. 뒤늦게 기출을 풀며 등급을 올려봤습니다. 31333(국영수탐탐) 10월의 성적이었습니다. 6살 터울의 오빠는 사립대에 갔기에 저는 국립을 갈 수 밖에 없었고, 말아먹은 내신 때문에 정시로 가야했죠. 저 등급으로 정시라니... 정신은 아득한데 아빠 생각이 납니다. 조금만 더 일하면 우리 딸 대학 보낼 수 있지 않을까 하며 서로서로 힘내자고 한게 엊그제 같은데 약 봉지를 갖고 다니는 아빠를 보면 눈물이 났습니다. 수능을 보았고 결과는 참담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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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연우의 이별택시가 떠올랐습니다.

어디로 가야하죠, 아저씨? 하하하하....


수시 원서 6개, 정시 원서 3개 그 외에는 국내대 입시에 대해서 아무것도 몰랐어요. 지금도 잘 안다곤 못하겠습니다. 친구들 따라 정시 박람회도 갔는데 성적에 맞는 곳에 가려니 그제서야 억울함이 생겨났습니다. 두 달은 너무 짧은 것 아니었냐고. 자기 합리화라고 보는 게 더 나을려나. 여튼 유학에 들인 약 2년에 비해 수능은 너무 준비를 못한 게 아닌가 싶었어요.


유학과 수능을 병행하지 못한 제 잘못 아니냐고요? 글쎄요... 그렇게 볼 수도 있겠어요. 두 달은 짧은 시간이 아니지만 1년 가까이를 세로로 적힌 일본어만 보던 제가 가로로 적힌 한글을 읽는 데에 익숙해지기엔 짧지 않은가요... 비문학은 부호화 하나 빼곤 다 맞았는데... 문학은 읽을 시간도 없어서 급하게 풀었으니 그것도 아닌가;


성적표를 받았던 날, 정시 박람회에 갔던 날, 졸업식...

혼자 질질 짰습니다. 추하게 엉엉 울었어요. 술도 퍼마시면서 드라마 흉내 내듯이 소리도 질렀죠. 혼자서 소주 4병 먹고 남는건 숙취 쁀이었지만...


재수 허락을 받아내는 것도 힘들었지만 사실 그것보다 더 힘든건 멘탈 관리였습니다. 불면증 때문에 일주일에 열 시간을 채 못자며 1, 2월이 지나갔습니다. 아버지 수술비로 돈을 빼고 나니 제가 재종 다니기엔 불가능한 상황이더군요. 그래서 쿠팡 야간 알바 뛰어가며 인강 프패 사고, 교재비 벌고... 부모님이 알아챈 이후로는 교재비는 매달 받고 있습니다만 카드에 돈이 들어오는 날이면 늘 마음 한켠이 무겁더라고요. 아직도 통장 잔고를 보면 눈시울이 붉어집니다.


독서실도 없고, 도서관은 버스 타고 정류장 10개... 고등학생을 대상으로 하는 학원은 없고, 다닐려면 버스 타고 한 시간 걸려서 가야 하는지라... 변명으로 들릴 수도 있겠지만 제가 사는 곳의 교육 환경이 이렇다는 걸 알려드리고 싶었을 뿐...


이투스와 함께 독재를 하고 있고, 강성태씨 시간표 따라하면서 하루에 10시간은 넘도록 공부를 하며 살고 있지만 불안한건 어쩔 수가 없는건지 새학기가 시작되니 기분이 묘하네요. 준노베에 인강으로 공부하는 저에 비해 기숙 재종 다니고 있을 같은 학교 애들이랑 00년생 현역 분들 생각하면 진짜 불안해서 미칠 것 같아요...


날짜가 바뀌고 있는지 어떤지도 모르게 살고 있는데도 마음 한켠이 늘 무겁고 불안합니다. 유학을 준비한게 실수라곤 생각하지 않아요. 다만 만약 돌아갈 수 있다면 결정을 달리 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합니다. 같은 맥락이려나... 제가 유학 공부를 안 했다면 오버슈팅 문제는 다 틀렸을테니 어느정도 득이 되긴 했죠. ㄲㄲ


...적다보니까 3천자 넘었...... 여튼 그렇습니다.

허허... 네, 이렇게 사는 닝겐도 있구나... 하시면 됩니다. 그냥 그렇다는거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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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No · 783277 · 18/03/16 22:31 · MS 2017

    꼭 성공하세요

  • 성가온 · 784521 · 18/03/16 22:45 · MS 2017

    글 길었을텐데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성공해야죠-! ㅠㅜ

  • 사일기적 · 703146 · 18/03/16 22:32 · MS 2016

    잘 될 거에요 진짜로요

  • 성가온 · 784521 · 18/03/16 22:45 · MS 2017

    긴 글이었는데도 댓 달아주셔서 정말 감사해요. 응원해주셔서 그런지 힘이 나네요. ㅎㅎ

  • ✨선희아니곳서니✨ · 781976 · 18/03/16 22:38 · MS 2017

    끝까지 다 읽었습니다. 지금 편하게 공부하고 있는 제가 부끄러워집니다. 어떤 말로도 위로가 안될건 알지만 위로의 말씀 드리고 싶습니다. 그리고 이러 글과 어울리지는 않지만 짤 하나 드립니다. 열심히 공부해서 꼭 좋은 결과 이루세요!!

  • 성가온 · 784521 · 18/03/16 22:46 · MS 2017

    오버액션토끼 엄청 좋아합니다. 두고두고 보면서 열심히 해야겠어요. ^^

  • 카이스트 · 686476 · 18/03/16 22:38 · MS 2016

    문부성 쪽은 생각 없으신가요..? 돈 문제라면 그쪽이 더 나을텐데.. 기벡까지 배우셨다면 내적 같은거 문제도 풀 수 있으시면 1차는 거뜬할테고.. 소논문 같은것도 쓰셨다면 경험도 충분할 것 같은뎁..
    그리고 일본어 경시대회 등 유학 준비하시면서 외부 상 탄거같은거 있으면 수시 학종으로도 좀 써 보시는 것을 권장합니다.

  • 성가온 · 784521 · 18/03/16 22:50 · MS 2017

    문부성...은 사립 지원이 불가능인지라 희망 대학에 원서를 낼 수가 없네요;; 수시 학종을 쓰기에는 제가 3학년 내신을... 말아먹어서... 긴 글인데도 관심 가져주셔서 감사합니다. 공부를 좀 더 잘했으면 문부성으로 동경대를 노렸을텐데... (롬곡)

  • 카이스트 · 686476 · 18/03/16 23:04 · MS 2016

    일본 국립대들 정말정말 좋은데 와세다 아니면 안되는건가요..? 여태까지 하신게 너무 아까워보여서.. 금전적 혜택도 어마어마하다보니.. 거기에 올인하라는 의민 아니고 시험 전날정도만 복습해도 좋은 결과 있을지 모르니..

    그리고 내신 말아도 스펙 있으시다면 하나쯤은 써 보는게.. 제가 유사 사례를 봐서.. 일본유학 준비하다 3학년 1학기때 내신 6점대에 9등급도 뜨고 했는데 유학 fail... 제가 반농담삼아 한양대 학종 써보라 했는데 그게 붙었습니다. 아마 님도 외고빨 받아서 내신 어느 정도 커버되고 특히 한양대 같은 경운 정말로 내신 안보는 듯 합니다. 자소서 추천서도 안쓰니 논술 쓸 바에는 꼭 학종 특히 저대학 한번이라도 써보시기를.. 과는 일본어과 '빼고' 권장합니다. 특색 있게 보이기 위해서는..

  • 성가온 · 784521 · 18/03/17 14:11 · MS 2017

    제가 가고 싶었던 학교들이 전부 사립이었어서;; 츄오가 마지노선이었는지라;

    자세한 정보 알려주셔서 감사합니다. 한양대... 등록금이 비싸 엄두가 안 나지만 그래도 이만큼 알려주셔서 정말 감사해요. 관심 가져주셔서 감사합니다.

  • 스프라우트 · 773216 · 18/03/16 23:02 · MS 2017

    일본에서 시험본건 잘나오셧는지요..?

  • 성가온 · 784521 · 18/03/17 14:06 · MS 2017

    제가 지원한 학부에 한국인 합격자가 없다더라고요. 유학원 선생님이 서울부터 부산까지 다 찾아봐도 없다길래 그냥 포기했습니다...

  • 파외꾼 · 807311 · 18/03/16 23:04 · MS 2018

    힘내세요 저라도 님 같았으면 힘들거 같습니다. 잘풀렸으면 좋겠네요

  • 성가온 · 784521 · 18/03/17 14:12 · MS 2017

    감사합니다. 제가 잘 풀어가봐야겠죠;? ㅎㅎ 글 길었을텐데 읽어주셔서 감사해요. 파외꾼님 현생도 힘이 그득하길 바랍니다.

  • 동유 · 805004 · 18/03/16 23:07 · MS 2018

    진짜 잘되시기를

  • 성가온 · 784521 · 18/03/17 14:12 · MS 2017

    감사합니다. 동유님도 잘 되시길 바라요.

  • CitizenKane · 755744 · 18/03/16 23:15 · MS 2017

    왜 굳이 와세다만 고집하셨는지.... 사립대 자체가 학비가 무척 많이 들고, 평범한 가정이면 어떤 대학이든 사립대 유학은 가계에 부담이 많이 될 겁니다. 국립대의 5~10배 정도 매학기 돈이 들어가니까요.

    카이스트님 말마따나 문부성 학부 유학을 생각해보세요. 와세다보다 훨씬 좋은 대학에 갈 수도 있고(재수없으면 더 안 좋을 수도 있습니다만), 무엇보다 학비 면제 생활비 월 100만원 지원 비행기값 지원...etc.. 혜택이 어마어마하죠.

    전 나이가 있어서 지원을 못했는데 나중에 찾아보고 정말 아쉬웠습니다.

    그리고 와세다 말고 EJU를 통해 다른 국립대를 지원하는 것도 생각해보세요.
    국립대 자체의 학비도 매학기 250으로 정해져 있다고 알고 있는데, 유학생은 거의 학비 감면이나 면제가 될 가능성이 큽니다.

    하여간 일본에서 살겠다고 하면 일본 국립대에 진학하는게 서울의 어지간한 대학에서 생활비, 학비 등을 지출하는 것보다 훨씬 나을 겁니다.

  • Zuckerberg · 693367 · 18/03/16 23:44 · MS 2016

    문부성은 너무 바늘구멍이라..

  • 카이스트 · 686476 · 18/03/16 23:51 · MS 2016

    작년엔 특히 적게 뽑았다고는 한데 올해는 좀 낫지 않을까 싶네요

  • CitizenKane · 755744 · 18/03/17 00:00 · MS 2017

    작년에는 얼마 뽑았는지 모르겠는데 원래 문과 10명 이과 2명 정도 뽑지 않았나요?

    어차피 성적이랑 자소서 면접으로 쇼부보는 건 사비유학 전형이랑 똑같아서 같이 준비하면 될 테고, 상위권 국립대에 들어가는 한국인 수를 생각해보면 너무 비관적인 것만은 아닌 것 같습니다.

  • 성가온 · 784521 · 18/03/17 15:15 · MS 2017

    고등학교는 끝나버렸으니 대학 가서 학점으로 가야할 것 같아요. 확실히 바늘구멍이긴 하지만 금전적으로 도움을 받기엔 확실히 나은 방법이네요. 정보 알려주셔서 감사합니다.

  • 치즈김빱 · 805006 · 18/03/16 23:51 · MS 2018

    힘내세요ㅜㅠ 근데 일본어 세로로 읽으실때 어떤 느낌이신가요...? 일어 세로로 읽는거에 대한 로망이 있어서요

  • 성가온 · 784521 · 18/03/17 15:17 · MS 2017

    세로로 읽으면... 힘들어요.. ㄲㄲ 제가 이상한 케이스일지도 모르지만 저는 아직도 눈이 세로에 적응돼있어서 가끔 분식집 메뉴판을 세로로 읽습니다. 적응되면 괜찮은데 가로로 읽는 것보다 눈이 더 피곤해요 ㅎㅎ

  • 치즈김빱 · 805006 · 18/03/17 22:29 · MS 2018

    일본에서 다독한 사람이 많이 나온것도 세로로 읽는 부분때문이라는 주장도 나와서요 ㅋㅋㅋㅋ 세로독해 머싯으시당

  • hufsLD · 824089 · 18/11/08 21:29 · MS 2018

    글 잘 읽었습니다, 항상 응원할게요
    정말 힘드셨겠어요....
    앞으로도 같이 열심합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