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플라이 푸른하늘 [547236] · MS 2014 · 쪽지

2015-03-23 13:50:03
조회수 802

술기와 잡기

게시글 주소: https://orbi.kr/0005826515

안녕하세요? 이번에 아이를 의대보낸 학부모입니다.

오랜만에 오르비에 들어와 보니 입시철보다는 덜 뜨겁군요. ㅎㅎ

제가 평소에 생각하던 부분이 있어 부족한 글을 올립니다. 공대와 의대 등

진로에 고민하는 분들이 한 번 읽어보시고 참고만 하십시요.

어차피 인생은 끊임없는 선택속에 후회, 좌절을 거듭하는 과정이지요. 정답이란 없습니다.

<이하 글 내용>

제목 : 술기(術技)와 잡기(雜技)

 

한 분야에서 오랫동안 경력을 쌓은 분들을 보면 크게 두 가지 유형으로 나누어

지는 것 같습니다. 전문분야에서 나름의 노하우를 바탕으로 비교적 성공적인 직업을

가진 분들과 본인은 상당기간 노력해왔지만 사회적으로 그리 큰 인정을 받지 못하는

경우입니다.

 

흔히 전문직종이라고 하는 의사, 변호사업 등은 물론 전자의 경우에 해당합니다만

그 정도가 아닌 오래 숙련된 기술을 요하는 분야들도 이와 관련이 있습니다.

전통시장에서 수 십년간 미싱일을 하는 분들이나 가구공장에서 거친 나무를

다루는 목수일을 하신 분들의 경우도 우리같은 초보자들이 쉽게 할 수 있는 일들은

아닙니다. 이들도 역시 상당한 기술력, 술기를 가지신 분들이고요. 옷을 수선하는 일,

가구를 만드는 일은 우리 생활에 꼭 필요한 기술이기 때문에 그 활용성이 높습니다.

 

의료계도 나름의 전문분야가 특화되어 있다고 합니다. 예전에 제가 무릎수술을

받아야할 때 주변에 정형외과 의사들은 많지만 특히 무릎수술을 잘 하기로 소문난

명의들이 따로 있더군요. 환자입장에서야 이왕이면 그런 인정받는 의사에게 시술받고

싶은것은 인지상정일 것입니다. 이런 특화된 분야에 정통한 분들을 술기가 뛰어나다고

합니다. 특히 의료계처럼 많은 학습과 전문성을 바탕으로한 술기라면 더욱 인정받을 수

있겠지요.

 

취업이 많이 어렵습니다. 청년들과 만나 얘기하다보면 자신이 어떤 직업, 무슨 일을

해야 좋을지, 잘 할 수 있는 지를 모르는 경우가 태반입니다. 사실 직접 해보지 않고

그 일이 적성에 맞는 지를 알 수 있기란 쉬운 일이 아닙니다.

 

대부분의 청년들이 가고 싶어하는 대기업을 비롯한 기업의 회사원(월급쟁이, 샐러리맨

이라고도 하지요)들이 하는 일의 직무들은 전문성을 바탕으로 한 술기라기 보다는

그 회사의 목표(대부분 영업목표이지요)를 달성하기 위한 하나의 부속 역할에 충실한

경우가 많습니다. 기업 조직은 목표와 성과를 달성하기 위한 곳입니다. 어떤 의미로는

군대조직과도 유사합니다. 군대는 전투에서 승리하기 위한 조직입니다. 전쟁에서

지게되면 비참하지요. 죽거나 포로가 될 수밖에는 없지 않겠습니까? 회사도 거대한

경쟁에서 지게되면 전투에서 패배한 것 못지 않은 굴욕을 당하게 됩니다. 지난 IMF

때 많은 분들이 충분한 체험학습을 했지요.

 

문제는 많은 한국기업들이 단기간의 성과에 몰입하다보니 사람을 그리 귀하게 여기지

않는 것입니다. 마치 기계에서 부속품 하나를 교체하듯이 사람을 대한다든지

경쟁에서 조금이라도 도태된 이들을 쉽게 정리한다는 거지요. 사실 기업에서 자신만의

성과를 보여 주기란 그리 녹녹하지 않습니다. 미국 메이저리그에서 활약하고 있는

류현진 선수가 철저한 자기관리와 비법을 가지고 중요한 경기에서 승리하게 되면

엄청난 언론의 주목과 대중들의 사랑을 받습니다. 하지만 삼성전자의 수 만명의 직원중

한 사람이 소위 말하는 스타(star)가 되기란 정말 어렵습니다. 아무리 혁신적이고

뛰어난 아이디어를 가지고 있다고 하더라도 일단 조직에서 인정받고 주목받기 전에

사장되는 경우가 대부분이거든요.

 

오히려 다른 이들처럼 묵묵히 지시에 따라 회사생활을 하지 않고 엉뚱한 생각만한다고

핀잔을 듣거나 심지어 그렇게 네 맘대로 하고 싶으면 회사를 나가서 직접 사업을

하라는 비아냥(?)까지도 들을 수 있는 게 현재 한국 기업의 현실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다보니 명의나 유명 프로야구 선수들처럼 술기를 익히는 것이 쉽지 않습니다.

대부분의 회사원들은 술기보다는 잡기에 능하게 됩니다. 잡기는 대부분 순간을 즐기거나

즉흥적인 상황을 넘기는 기술입니다. 기한내 상사에게 제출할 보고서를 만드는 일이나

주어진 일을 가급적 내 책임없이 다른 이에게 넘기는 기술, 회식자리 등을 통해

인간관계를 돈독하게 하는 기술 등이 잡기에 해당됩니다.

 

20대에서 40대 중반 정도까지의 청장년 시절에는 그 정도의 잡기만 가지고도

회사에 붙어 있을 수 있고 적어도 월급쟁이 하는 데는 큰 문제는 없어 보이지만

본격적인 문제가 발생하는 시점은 그 이후입니다. 어떤 일이든 가장 최고의 숙련도를

보여주는 나이는 40대에서 50대 중후반까지입니다. 사실 요즘처럼 60대 청년이라는

말이 생기는 고령화 사회에서는 그 기간이 점점 늘어날 것으로 예상됩니다. 젊은시절

의사, 변호사, 항공기조종사 등 전문술기를 제대로 익힌 분들의 절정기가 바로 그 시기

입니다. 가장 화려한 술기를 발휘하게 되지요. 명의, 명장소리를 들어 마땅한 시기가

도래합니다.

 

문제는 청년시절 보고서만들고 누구나 다 아는 처세술 정도의 잡기만을 익힌 평범한

회사원들은 절정의 기량을 발휘해야 할 4~50대에 회사에서 희퇴, 명퇴 등으로

나오게 됩니다. 회사에서 익힌 잡기는 거친 세상으로 나오게 되면 거의 아무 쓸모가

없는 것들이 대부분이죠. 시장에서 미싱기술을 가진 분들만큼의 효용성도 없는

한량신세가 되기 십상입니다. 중년들은 지금이라도 코페르니쿠스적인 발상의 전환을

하지 않으면 심각하고 비참한 노년을 맞게될 것입니다.

 

지금 회사에서 어쩔 수없이 잡기만을 가지고 월급쟁이를 하고 있는 분들 역시 많은

고민이 필요할 것입니다. 이처럼 한국사회가 여러모로 참 살기 팍팍한 것만은

분명합니다.

 

2015.3.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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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Quasi · 533974 · 15/03/23 15:43 · MS 2014

    이공계 트랙 전체를 보고 더 넓은 범위에서 살펴봐야하는데, 기업취직에 한정하면 대체로 맞네요.

    다른 분야도 뭐 대동소이할텐데, 기술 사이클이 워낙 빨라서 엔지니어로 오랫동안 따라가기는 힘들긴하죠.

    장인, 명인이 통하는 분야가 있긴 하지만, 보통의 이공계 전문기술은 시간이 흐르면 구식 기술이 되니까요.

    기술개발 무한경쟁이 낳은 패러독스이기도해요.

    나름대로 나이들어서 열심히 노력하는 엔지니어도 많답니다. 주위 시선이 문제긴 하지만...미국에서 할아버지 엔지니어하고 일한적 있는데, 정말 배울게 많았어요. 우리나라도 그런 문화를 배워야합니다.

  • 플라이 푸른하늘 · 547236 · 15/03/23 16:00 · MS 2014

    그렇습니다. 미국은 직무급제이고 연령차별이 비교적 덜하기 때문에 중년아주머니, 할머니에 가까운 분들이 비서직을 할 수 있는 문화가 가능한거고요. 한국은 비서직이 이 십대 예쁜 처녀들만이 진입할 수 있는 취업시장이죠. 미국이 냉정한사회라고 해도 한국처럼 진입장벽이 높지는 않은 듯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