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수생 이나은 [1159053] · MS 2022 · 쪽지

2022-08-01 23:08: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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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수생과 투과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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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가 투과목을 어떻게 아냐? 네깐 게 뭘 안다고 감히 투과목을 입에 올리냐?"


 장수생은 순간 잔을 던지고 미친 듯이 웃기 시작했다. 너무나 돌연한 웃음이어서 나는 그때 꽤나 놀랐다. 장수생이 그처럼 미친 듯이 웃는 것을 나는 그날 처음 보았다.


 "그래, 네 말이 맞다. 나는 투과목을 입에 올릴 자격이 없다. 허지만 누가 투과목을 진심으로 사랑한 줄 아냐? 서울대냐? 서울대가 투과목을 사랑한 줄 아냐?"


 나는 긴장했다. 그의 눈에서 반짝이는 눈물을 보았기 때문이다.


 "너는 투과목 필수가 폐지되어 아깝다구 했지만 나는 그렇게 되어 세상 살맛이 없어졌다. 나는 살기가 울적할 때마다 책장에서 투과목의 개념서를 찾았다. 나는 그놈을 통해서만 살아가는 재미와 기쁨을 느꼈다. 그러나 그놈 역시 사정은 나하구 똑같았다. 나를 표점으로 걷어찼지만 투과목은 나를 잊은 적이 없다. 우리는 서로 사랑했지만 사랑하는 방법이 달랐을 뿐이다."


(중략)


 "원래 그 사람은 독재에서 공부하던 사람인데 왜 그때 학원을 버리구 깊은 산골을 찾았는지 모르겠군."


 "처음엔 저두 많이 궁금하게 생각했습니다. 뭔가 수능때 부정행위를 저지르구 숨어 사는 분이 아닌가 했습니다. 더구나 이리루 들어오시자 머리를 깎구 수염까지 기르셨거든요. 그러나 오래 뫼시구 살다 보니 저대루 차츰 납득이 갔습니다. 한마디로 말하기는 어렵지만 수능에 뭔가 실망을 느끼신 게 아닌가 싶습니다."


 "본인이 그런 말을 한 적이 있소?"


 "과거 얘기는 좀체 안 하시는 편이었는데 언젠가는 내게 그 비슷한 말씀을 하시더군요. 듣기에 따라서는 궤변같지만 그분은 남하구 다른 묘한 철학을 지니구 계셨습니다."


 "그걸 한번 들려줄 수 없소?"


 "그분은 수능이 어지럽구 더러울 때는 그것을 구하는 방법이 한 가지밖에 없다구 하셨습니다. 수능을 계속 응시해서 더 이상 그 수능에 사설틱한 문제가 없도록 만들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걸 한번에 가려구 노력했다가는 공연히 사람만 상하구 힘만 배루 든다는 것입니다. '모두 재수해라, 철저히 N수해라'가 그분이 수능을 보는 이상한 눈입니다. 제 나름의 어설픈 추측입니다만 그분은 장수생만이 지닌 이상한 초능력을 믿으시는 것 같았습니다. 평가원은 온갖 변형에도 불구하고 기출문제를 송두리째 포기하지는 않는다는 것입니다. 수능이 철저히 변형이 되어서 더 이상 새로워질 것이 없게 되면 장수생은 익숙함에 취해 언젠가는 수능 만점을 받는다는 것입니다. 당신은 바로 그걸 믿으셨고, 이러한 자기 생각을 N수의 미학이라는 묘한 말루 부르시기두 했습니다."


 나는 순간 가슴 한구석에 뭔가가 미미하게 부딪혀 오는 진동을 느꼈다. 진동의 진상은 확실치 않지만, 나는 그것이 장수생을 이해하는 어떤 열쇠가 아닌가 생각했다. 그의 온갖 기행과 궤변들이 어지러운 혼란 속에서 그제야 언뜻 한 가닥의 질서 위에 어렴풋이 늘어서는 것이었다.


 "헌데 수능에 대해 그런 생각을 지닌 사람이 갑자기 왜 수능을 등지구 이런 산속에 박혀 사는 거요?"


 "당신께서 아끼시던 대학 하나가 갑자기 모집요강을 바꾸셨다고 하시더군요. 그때 아마 충격을 받으시구 이리루 들어오신 게 아닌가 싶습니다."


 "어디랍니까, 그 학교가?"


 "이름은 말씀 안 하시구 그 대학을 언제나 '지거국'이라구만 부르셨습니다."


 서울대다. 나는 그제서야 투과목의 필수선택 폐지 후에 장수생이 격렬하게 지껄인 저 시끄럽던 요설들이 생각났다. 어쩌면 그는 그때 이미 수능을 등질 결심을 했는지도 알 수 없다. 아니 그는 그 얼마 후에 내 앞에서 정말로 깨끗하게 사라져 버린 것이다.


 "그래 그 모집요강이 바뀐 후로 왜 수능을 등졌답니까?"


 "수능 볼 재미가 없어졌다구 하시더군요. 아마 그 대학을 꽤나 좋아하셨던 모양입니다. 그 지거국이 제도를 바꿔 버렸으니 자기도 앞으로는 미련하게 살 수밖에 없노라구 하셨습니다. 당신이 미련하다고 말씀하는 건 우습게 들리시겠지만 문돌돌이들을 가르치는 것을 뜻하시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이곳에 온 후 사람이 갑자기 달라진 거요?"


 "전 그분의 과거를 몰라서 어떻게 달라졌는지는 잘 모릅니다. 허지만 이곳에 오신 후로는 그분은 거의 문돌돌이들을 위해서만 사셨습니다. 제가 확통 만점을 받은 것도 순전히 그분의 덕입니다."


 나는 다시 장수생이 지껄였던 과거의 요설들이 생각난다. 수능을 항상 역으로만 바라보던 그의 난해성이 또 한 번 나를 혼란 속에 빠뜨린다. 그는 어쩌면 이 수능을 발상과 비약에 의해 누구보다 열심으로 가장 솔직하게 풀다 간 것 같다. 그에게 수능과 사설은 등과 배가 서로 맞붙은 동위 동질의 것이었는지도 알 수 없다. 그는 수능과 사설 중 아무것도 믿지 않았고 오직 믿은 것이라고는 세상에는 아무것도 믿을 것이 없다는 사실뿐이었다. 그와 평가원이 맞부딪혔을 때 평가원이 해체되는 것은 너무나 당연하다. 그것은 가장 직관적인 풀이가 가장 정석적인 풀이를 해체시키는 역설적인 예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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