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usty Lake: 李箱 [870531] · MS 2019 (수정됨) · 쪽지

2022-03-14 08:19: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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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낙원(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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면경(面鏡) 


철필(鐵筆) 달린 펜축(軸)이 하나. 잉크병. 글자가 적혀있는 지편(紙片) (모두가 한 사람 치) 


부근에는 아무도 없는 것 같다. 그리고 그것은 읽을 수 없는 학문인가 싶다. 남아있는 체취를 유리의 ‘냉담한 것’이 덕(德)하지 아니하니 그 비장한 최후의 학자는 어떤 사람이었는지 조사할 길이 없다. 이 간단한 장치의 정물은 ‘투탕카멘’처럼 적적하고 기쁨을 보이지 않는다. 


피(血)만 있으면 최후의 혈구 하나가 죽지만 않았으면 생명은 어떻게라도 보존되어 있을 것이다. 


 

피가 있을까. 혈흔을 본 사람이 있나. 그러나 그 난해한 문학의 끄트머리에 ‘사인’이 없다. 그 사람은——만일 그 사람이라는 사람이 그 사람이라는 사람이면——아마 돌아오리라. 


죽지는 않았을까——최후의 한 사람의 병사의——논공(論功)조차 행하지 않을——영예를 일신에 

지고. 지리하다. 그는 필시 돌아올 것인가. 그래서는 피로에 가늘어진 손가락을 놀려서는 저 정물을

운전할 것인가. 


그러면서도 결코 기뻐하는 기색을 보이지는 아니하리라. 지껄이지도 않을 것이다. 문학이 되어버리는 잉크에 냉담하리라. 그러나 지금은 한없는 정밀(靜謐)이다. 기뻐하는 것을 거절하는 투박한 정물이다. 


 

정물은 부득부득 피곤하리라. 유리는 창백하다. 정물은 백골까지도 노출한다. 


 

시계는 좌향으로 움직이고 있다. 그것은 무엇을 계산하는 ‘미터’일까. 그러나 그 사람이라는 사람은 

피곤하였을 것도 같다. 저 ‘칼로리’의 삭감——모든 기구(機構)는 연한(年限)이다. 거진거진 잔인한 

정물이다. 그 강의불굴(强毅不屈)하는 시인은 왜 돌아오지 아니할까. 과연 전사(戰死)하였을까. 


 

정물 가운데 정물이 정물 가운데 정물을 저며내이고 있다. 잔인하지 아니하냐. 


초침을 포위하는 유리덩어리에 남긴 지문은 소생하지 아니하면 안 될 것이다——그 비장한 학자의 

주의를 환기하기 위하여. 




자화상 (습작) 


여기는 도무지 어느 나라인지 분간을 할 수 없다. 거기는 태고와 전승(傳承)하는 판도가 있을 뿐이다. 여기는 폐허다. ‘피라미드’와 같은 코가 있다. 그 구녕으로는 ‘유구한 것’이 드나들고 있다. 공기는 

퇴색(褪色)되지 않는다. 그것은 선조가 혹은 내 전신(前身)이 호흡하던 바로 그것이다. 동공에는 

창공이 응고하여 있으니 태고의 영상의 약도다. 여기는 아무 기억도 유언되어 있지는 않다. 문자가 

닳아 없어진 석비처럼 문명의 ‘잡답(雜踏)한 것’이 귀를 그냥 지나갈 뿐이다. 누구는 이것이 

‘데드마스크’(死面)라고 그랬다. 또 누구는 ‘데드마스크’는 도적맞았다고도 그랬다. 


주검은 서리와 같이 내려 있다. 풀이 말라버리듯이 수염은 자라지 않는 채 거칠어 갈 뿐이다. 그리고 천기(天氣) 모양에 따라서 입은 커다란 소리로 외친다——수류(水流)처럼. 




월상(月傷) 


그 수염난 사람은 시계를 꺼내어 보았다. 나도 시계를 꺼내어 보았다. 늦었다고도 그랬다. 


 

일주야(一週夜)나 늦어서 달은 떴다. 그러나 그것은 너무나 심통한 차림차림이었다. 만신창이 - 아마 혈우병인가도 싶었다. 


지상에는 금시 산비(酸鼻)할 악취가 미만(彌蔓)하였다. 나는 달이 있는 반대방향으로 걷기 시작하였다. 나는 걱정하였다——어떻게 달이 저렇게 비참한가 하는 



 

작일의 일을 생각하였다——그 암흑을——그리고 내일의 일도——그 암흑을—— 


달은 지지(遲遲)하게도 행진하지 않는다. 나는 그 겨우 있는 그림자가 상하(上下)하였다. 달은 제 

체중에 견디기 어려운 것 같았다. 그리고 내일의 암흑의 불길을 징후하였다. 나는 이제는 다른 말을 

찾아내지 않으면 안 되게 되었다. 


나는 엄동과 같은 천문(天文)과 싸워야 한다. 빙하와 설산 가운데 동결하지 않으면 안 된다. 그리고 

나는 달에 대한 일도 모두 잊어버려야만 한다——새로운 달을 발견하기 위하여—— 


 

금시로 나는 도도한 대음향(大音響)을 들으리라. 달은 추락할 것이다. 지구는 피투성이가 되리라. 


사람들은 전율하리라. 부상(負傷)한 달의 악혈 가운데 유영하면서 드디어 동결하여 버리고 말 것이다. 


 

이상한 귀기(鬼氣)가 내 골수에 침입하여 들어오는가 싶다. 태양은 단념한 지상 최후의 비극을 나만이 예감할 수가 있을 것 같다. 


 

드디어 나는 내 전방에 질주하는 내 그림자를 추격하여 앞설 수 있었다. 내 뒤에 꼬리를 이끌며 내 

그림자가 나를 쫓는다. 


내 앞에 달이 있다. 새로운——새로운—— 


불과 같은——혹은 화려한 홍수 같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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