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nu Roman. [69422] · MS 2004 · 쪽지

2014-12-18 15:29: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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읽기 쉬운 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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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의(Warning)

  오랜만에 어려운 글을 들고 들렀습니다. 이 글은 단순히 법적 타당성만으로 권위가 부여된 제도의 폭력에 대해 서술한 글입니다. 윤리와 사상을 자신있게 공부하신 분들은 짐작하셨겠지만 제도가 법적으로 타당하다면 그것에 순응해야 한다는 공동체주의는 바로 헤겔의 이론이며, 이 공동체주의가 바로 국가에 의해 완성되는 것이 추상법->도덕->인륜으로 이어지는 헤겔 정반합 철학의 완성과정입니다. 

  또 이러한 제도적 질서가 개인의 주체성을 거세하는 것을 전제로 하기에 우리의 이성이 제도라는 미명하래 완전히 기능화되어버렸다고 비판한 학자가 바로 아도르노라는 저와 닮은 잘생긴 철학자입니다.

  여러분은, 학교라는 제도, 군대라는 제도, 회사라는 제도를 거치며 어떤 느낌을 가지셨나요? 중학교 때 마술, 혹은 피겨 스케이팅 과목을 배우고 싶지는 않았나요? 국어 공부를 하며 읽기와 듣기로 평가받지 않고 쓰기와 말하기로 평가받고 싶다고 느끼지는 않았나요?

  이 글은 현학적으로 서술된 것처럼 보이나 사실은 제 개인적인 능력의 부족으로 쉽게 쓰지 못한 것입니다. 하지만 그럼에도, 논술을 앞두고 사회학적으로 활용할만한 문장을 카피해가고 싶은 분(꽤 많은 책이 발췌된 만큼 요긴할 겁니다), 제도적 폭력에 대해 평소 알고 싶어했던 분(아마 없을 겁니다), Snu Roman.의 글을 읽는 분(역시 없을 겁니다)에게는 일독을 권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결론적으로, 이 글은 읽으실 필요가 없습니다. 읽지 마세요.

  나중에 정말 정신이 맑고 어떤 텍스트도 받아들일 자세가 돼 있을 때 읽으세요. 만약 이 텍스트를 한 번에 읽고 글의 주제와 맥락을 파악하신다면 당신은 지금 당장 일반대학원생들과 독해 실력을 경쟁해도 문제가 없는 수준이라는 증빙입니다.









 



헤겔 관점에서의 국가와 제도에 대한 비판적
고찰



 















 






 



자율성 개념을 중심으로



 



 













 



 

















 



  '참으면 김일병, 안 참으면 임병장'



 



  동료 병사들의 구타로 사망한 김일병과 동료병사들에게 조롱을 당한 끝에 그들을 사살한 임병장을
빗댄 말이다. 이런 참사가 일어나면 곧바로 그들에 대한 언론의 취조가 시작된다. 입대 전에 어떤 학생이었으며 어떤 성격이었는지 또 그들 주변 지인들의 평가는 어떠한지가 기사로 쏟아진다. 그 과정에서 징병제라는, 서로 다른 계급을 돼지우리보다 못한 곳에
몰아넣고 단 한 평의, 1시간의 개인 시공간도 허락하지
않는 비인간적 제도에 대한 비판적 고찰은 없다. 잠깐 나와도 결국은 희석된다. 남들은 다 잘 갔다 오는데 왜 저들만 저러느냐? 한 마디로 저들
문제 아닌가.  



 



  분명, 군대에 입대하는 건장한 남성 중 대다수는
군대라는 극한 환경에서도 무리 없이 업무를 잘 수행하고 건강하게, 집으로 들어온다. 그러나 그 중 적잖은 일부는 자신이 겪어온 환경과 전혀 처음 접하는 평가시스템에 힘겨워하고 허덕인다. 사회에선 내 할 일만 하면 되었고 내가 한 일에 대해서만 책임을 지면 되었지만 이등병은 뭐든지 다 할 줄 알아야
하고 모든 일을 책임져야 한다. 여기에 '모두가 Yes라 할 때 No라고 말할 수 있는 정신'은 무용지물이다. 공무수행중인 처칠에게 교통딱지를 부과하며 나무랐던
경찰은 찬사를 받았으나 군대에서 장군에게 그런 식으로 했다가는 그 날로 고난의 시작이다



 






  내 생을 돌이켜보면 생각건대 대체로 평탄했고 평범했던 듯 싶다. 초중고를 큰 말썽없이 다녔고 별 탈없이 교육과정을 이수해 대학에 들어가 성실히 생활했으며 군대도 남들 다 가는
육군으로 입대해 큰 탈없이 제대했다. 그렇다고 내가 교육제도라는, 군대제도라는
각 공동체에 순응해 왔던 것만은 아니다. 행동으로는 잘 따랐고 순응했지만 내면의 의문을 지운 것은 아니었다. 국민으로서 국민학교를 다니고 군인으로서 국방의 의무에 충실했지만 심정적으로는
"
우리는 먼저 자율성을 지닌 인간이어야 하고 그 다음에 국민이어야 한다"[1]는 헨리
데이빗 소로의 말에 더 마음이 갔다.



 



  '복종' '획일'을 강요하는 교육제도와 군대제도를 겪는 기간 동안, 나는 자율성을
상실해야 했다. 타인에 의해 방해 받지 않는 소극적 상태와 더불어 적극적으로 나의 목적을 설정하고 실현시키는
자율성[2]
적어도 초중고와 군대에 있는 동안엔 존재하지 않았다.[3] 그리고
이러한 공동체는 법률에 의해, 헌법에 의해 보장되어 아주 구체적으로 보장돼 있었다. 내가 승인하지 않은 체제에 봉사하기 위해 자율성을 헌납해야 하고 따르지 않으면 처벌을 받는 이런 제도적 폭력이
정당한가. 또 그 제도를 묵인하는 공동체와 승인하는 법치주의 하의 법률과 헌법은 과연 허용될 수 있는가. 이 문제를 법적 실정성과 공동체적 가치를 옹호한 헤겔과 제도를 옹호한 겔렌의 관점에서 검토하고 루소의 관점에서
비판해보는 것은 주권자인 한 사람인 나로서는 탐구해볼 의무를 지니기에 충분하다 할 것이다.[4]



 






   헤겔은 이러한 제도적 폭력을 그 불합리성에도
불구하고 긍정한다. 헤겔에 의하면 제도는 그 자체의 내용적 문제가 아니라 법적 타당성(Gültigkeit) 문제이다.[5] 법적
타당성의 개념은 논리적 정당성이나 현실적 효력성의 의미로 사용되기도 하지만 헤겔의 경우에는 국가 권력에 의한 제도적 보장에 더 가깝다. 요컨대 국가권력을 배경으로 한 실정법은 법률의 권위를 획득하며 이에 따라 제정된 교육제도와 군대제도는 공동체에게
합법적으로 승인된다. 이 지점에서 제도는 인간의 생각과 보호, 생계유지와
같은 중요한 문제와 직접적인 연관을 지니는 중요한 형식이 된다.



 



  제도의 장점은 이뿐만이 아니다. 제도는 부담면제의
기능을 하는데 인간의 경우에는 동물의 경우에서처럼 본능이 개별적으로 고정되어 있는 행동 과정을 결정하지 않는다.
본능 대신에 각각의 문화가 다양한 인간의 행동양식 가운에 일정한 변형체를 추출하여 사회적으로 승인된 행동 모범으로 고양시키고 이 행동
모범이 집단의 모든 구성원을 결속시킨다. 이러한 문화적 행동모범은 결국 국가의 형태로 각 개인에게 너무나
많이 요구되는 결단의 순간에 대한 부담을 면제시켜 주며 개방적인 인간에게 안내자의 역할을 한다. , 제도는 그 본성상 위험에 처해있고 불안정한 상태에 놓여있는, 그러면서도
정감이 넘쳐흐르는 존재가 상호간에 그리고 자기자신을 유지하기 위해 찾아낸 하나의 형식이기도 한 것이다.[6]



 






  그러나 결단의 순간에 대한 부담을 면제해주는 것이 과연 선()일까?
우리의 삶은 결단의 연속으로 이루어져 있고 결단은 그 자체로 때로는 고통스러운 과정을 수반하는 것도 사실이다. 그러나 결단을 미루면 결국 시간이나 타인이 대신하게 되는데 이것이 선()은 아니다. 우리는 교육제도와 군대제도 하에서 너무나 많은 결단의 기회를 포기해야 한다.
어떤 교육을 받고 어떤 방식으로 어떻게 인격을 함양해갈지 모두 국가에 의해 승인된 '제도'가 결정한다.



 



  이 때  제도는 본질적으로
억압과 강제에 기초한다. 부계제 사회가 성립하기 위해 그 얼마나 많은 여성들이 차도르, 전족에 의해 탄압 받았던가! 제도는 개인에게 일단 백기를 내놓을
것을 요구하고 그에 굴복하여 열심히 순응했을 때 그를 신뢰할만한 구성원으로 인정하고 약간의 기득권을 나누어준다.
국가에 의해 운영되는 제도 교육이 '교과서'라는
틀 안에서 제시한 체계를 따르지 않고는 학자가 되기는 커녕 대학진학조차 힘든 것이다. 제도 중 하나인
제도교육만 보더라도 기존 계급과 계층의 질서를 유지시켜주며 기존의 불평등 구조를 영속화하고 정당화해 우리에게 순응할 것을 끊임없이 교육한다. 이 때 공정성으로 위장한 능력중심의 이데올로기가 전파된다. 이로써
우리는 누군가의 실패의 원인을 사회·구조적인 요인에서 찾지 않고 개인의 능력과
노력부족에서 찾으며 어느새 자신도 모르게 현 제도의 대변인이 되고야 만다. 제도 교육은 엄밀히 말해
전체 사회와 관계를 맺는 것이 아니라 지배 집단과 관계를 맺는 것이다.



 





  루소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자연과 싸우느냐. 사회제도와 싸우느냐. 그 어느 한 편만을 취할 수밖에 없으며 한 인간이 될 것인지 한 시민이 될 것인지 선택할 수 밖에 없다" 왜냐하면 동시에 두 부류의 사람을 만들 수는 없기 때문이다"[7]



 



  자연인은 온전히 자기를 위해서만 존재하며 자기 자신이 절대적인 정신이 된다. 그러나 사회는 그런 정수를 깡그리 무시하고 사회공동체와의 관계에 따라 개인을 평가하여 인간을 부자연스럽게 한다. "모난 돌이 정맞는다"는 수사는 본질보다 관계를 우선시한 대표적인 레토릭이다. 결국
국가가 승인한 제도는 개인의 절대성을 탈취해 상대적인 존재로 만들어 자아를 공동체 속으로 몰입시킨다. 해서
개인은 자기를 한 개체로 생각하지 않고 전체의 한 부분으로 믿게 되며 일부로밖에 자신을 의식하지 않게 된다. 믿기
어렵겠지만 대한민국 군대에서 병사에게 지급되는 사망시 장례비나 보상금은 개(軍犬)보다 낮다. 이런 환경속에서 인격의 부속화는 급진전된다. 또 한 제도는 또 다른
제도의 본질을 희석시키기도 한다. 나는 훈련 중 부상을 당해 다리에 깁스를 하고 군병원에 입원했을 때에도
입원실 물청소를 하느라 뛰어다녀야 했고 선 채로 야간불침번을 서야 했다.[8] 제도의
폭력은 '치료'라는 본질을 갖는 병원이라는 제도마저 이겨내는
것이다. 제도적 질서란 본질적으로 주체성을 거세하는 것을 특징으로 하기에 '주체적 인간'이 되는 출발점은 제도를 거부하는 선을 그음으로써 그려진다.[9]



 



  헤겔은 이런 주장이 불편하다. 왜냐면 교육은 공동체, 그리고 국가와 분리될 수 없기 때문이다. 교육의 목적은 본질적으로
기존 사회 유지와 변화에 적응하도록 개인을 사회화하는 데 있다. 자율성이란, 사회의 안정과 유지라는 틀 내에서 한정적으로 이해되어야 하며 공교육에 문제가 있다면 보완, 수정해나가는 변증법적 발전으로 해결되는 것이다. 제도는 그 본성상
위험에 처해있고 불안정한 상태에 놓여있는 존재가 상호간에 그리고 자기자신을 유지하기 위해 공동체가 찾아낸 형식이다. 실제로 각 개인은 재산 또는 결혼과 같은 제도를 이미 주어져있는 초개체적 모범상으로서 체험하고 제도 속에서
스스로를 정돈한다. 이런 과정 없이 주체성 따위를 인정해버린다면 예컨대 일부다처제, 공인된 섹스파트너도 사회가 인정한다면 사회의 안정 균형 유지는 불가능하며 오히려 개인을 허공에 방치하는 결과가
된다. 인간은 국가라는 공동체 안에서 완성될 수 있으며 국가가 설계한 제도는 인간의 인격 일반 성질이
유감없이 전개될 수 있는 기회를 부여한다는 것이다.



 




  그런데 정말 인간의 인격, 전개, 완성을 돕는 그런 제도가 존재할까? 공교육 보완? 교육의 주체인 학생, 교사, 학부모
중 실질적 권한을 가진 사람이 몇이나 될까? 학생회든 학부모회의든 의결권은 없고 허울 좋은 건의권만
있을 뿐이다. 아무리 긍정적으로 변화시켜도 제도 교육의 본질은 변할 수 없다. 제도 교육의 틀은 그 존재만으로 막강한 권한을 지녀 교사 개인의 양심과 학생의 자유를 옭아맬 수 있다. 군대가 제아무리 계급을 폐지하고 병영선진화를 외친다 한들 '국가의
자유를 지키기 위한 개인의 자유의 박탈'을 전제로 한 징집제는 절대 자율성을 보장할 수 없다. 자율성, 그리고 생각하는 우리의 이성은 국가가 설계한 제도의 미명아래
완전히 기능화 되어버렸다.



 



  이 시대에 아웃사이더가 된다는 것은 그것만으로도
큰 죄가 된다. 학교에 가지 않는다고 해서, 양심에 따라
군대에서 총 잡는 것만을 거부한다 해서, 특정 만화 캐릭터를 좋아한다 해서 '비정상'으로 매도되는 지금 이 세태가 과연 정상인 걸까? 그리고 그 제도를 보장하는 법은 어떠한가. 법은 모든 사람을 천편일률적으로
취급하여 개인의 차이를 잘라버리고 특수한 경험을 삭제하는 비합리적 합리성의 근원적 역할을 할 가능성을 언제든지 내포하고 있다. 물론 제도가 사라질 수는 없을 것이다. 그러나 내가 승인하지 않은
공동체에 의해 설계된 제도에 자율성을 헌납해야 하는 제도는 그 자체로 타당성을 상실한다. 인간이 스스로
결정하고 그에 대해 책임을 지지 않는 한 이 세계 내에서의 안녕과 행복은 하나의 허상이다.



 



  자율성은 그 자체로 고결하다.



 



 



 










[1] Henry david thoreau, <시민불복종>, 1848







[2] 임미원, <자율성과 자유>, 한국법철학회, 2002







[3] 물론 이는 군대문화와
폭력이 병존했던 당시 경험의 토대이므로 무려 학생인권조례가 등장한 오늘날과는 간극이 있을 수 있다.







[4] 장 자크 루소, 사회계약론, "나의 발언이 국가의 공적인 일에 미치는 영향이
아무리 미약하다 해도, 자유국가의 시민으로 태어났고 또 주권자인 한 사람인 나로서는 투표권을 가지고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공적인 일을 소상히 알아야 할 의무를 지니기에 충분하다"를 차용하였다.







[5] 이정일, <헤겔『법철학』의 판독 - 자유주의와 공동체주의를 중심으로>







[6] 아놀드 겔렌, <인간학적 연구>







[7] 장 자크 루소, <에밀>







 [9] Theodor Ludwig Wiesengrund Adorno, <계몽의 변증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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