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nu Roman. [69422] · MS 2004 · 쪽지

2014-02-25 22:35:05
조회수 461

어떤 글이 좋은 글인가

게시글 주소: https://orbi.kr/0004382503




  글을 읽는 행위는 본인의 내면 속으로 침잠하는 행위다. 흔히들 안정을 취하는 방법으로 명상을 권하는데 난 글 읽는 게 눈감고 임하는 명상과 다름없다고 생각한다. 그 이유는 첫째, 일체의 시각 정보를 차단한다는 점이고 둘째로는 내면의 상상력을 키워준다는 점 때문이다. 글자는 시각 정보이지만 시니피에(함의)를 가리키는 명백한 수단이라는 점에서 영상 그 자체로 의미를 갖는 영화와 구별된다.

  내면 속으로 침잠할 수 있다는 건 내게 글을 읽는 이유가 된다. 글을 읽으며 난 개인적 체험을 또 다른 텍스트로 재구성한다. 가령, "순순히 항복하면 무기만은 살려주겠다"는 경구를 읽고는 지난 날 순진하게 상대를 믿었다가 뒷통수당한 옛 기억을 떠올린다. 이광수의 '무정'을 읽으면서는 사소설(소설의 주제를 가족, 우정, 사랑 등의 개인적 체험에 국한시키는 문학의 한 성격)에 전복되지 않고 끝내 자기 색깔을 용케 지켜낸 작가의 결기를 느낀다. 이광수는 비록 안창호의 독립준비론을 민족개조론으로 변질시킨 원죄가 있지만 사회적인 지층으로서의 소설을 끝끝내 지키면서 많은 민족 작가들이 탄생할 수 있는 울타리를 쳤다.

  '한 사람은 그 사람이 읽은 책으로 만들어진다'는 진술은 다매체화, 다채널화된 오늘날과 상충되는 부분이 있지만 요지는 쉽사리 이해된다. 누구나 갖가지 체험은 하지만 그것 모두를 자신의 것으로 만들지는 못한다. 이유는 체험은 기억으로 끝나고 손쉽게 휘발되기 때문이다. 체험을 내면화하여 자기 인생의 창조를 위한 동력으로 삼아가기 위해서는 그것을 정리하는 작업과 시간이 필요하다. 그리고 그 정리를 위해 글을 읽는다. 

  요컨대, 좋은 글은 자신이 이제껏 체험한 단편적 조각을 관통시켜 정리해줄 수 있게 하는 영감을 담은 글이다. 따라서 개인마다 저마다의 체험이 다른 것처럼, 좋은 책도 다를 수밖에 없다. 경쟁에 매몰된 수험생은 인위적인 그 무엇도 거부하는 노자의 책에서 자신의 체험을 정리할 근거를 찾기 힘들 것이다. 억지로 꿰어맞춘다 한들, 해볼 수 없는 세계에 대한 미련과 회한 정도만 남을 뿐 온전히 '도덕경'을 이해하기란 실로 불가능할 것이다. 실제로 대형 서점에서 마키아벨리의 군주론이 판본도 더 많고 인기가 많은 것도 이와 맞닿아있다.

  이런 의미에서 사고의 범위가 개인 차원의 협소함(내면 세계)에 국한되거나 가짜 세계화의 광역성(SF, 판타지)에 부유하지 않고, 사회라는 거대한 틀 안 속에 체험을 담아낼 수 있었던 전시(戰時)의 작가들은 행복한 작가들이었는지도 모른다. 윤동주가 그랬고 빅토르 위고가 그랬으며 에밀 졸라가 그러했다. 그들은 같은 제도 하에 같은 수준의 억압으로 고통받는 국민들의 체험을 관통하는 글을 썼고 시원하게 정리해 주었으며 그 덕에 민족 작가의 반열에 올랐다. 반면 오늘날처럼 파편화된 기호와 이념의 편린 속에 살아가는 일반 시민은 좋은 글을 찾는 데 애를 먹을 수밖에 없다. 

  이 때문에 기본으로 돌아갈 수 있는, 기껏해야 100권이 조금 넘는 '고전'이 강조되고 있지만 다수가 합의했을수록 개인의 체험과는 더 멀어진다는 점에서 고민은 남는다. 오랜만에 읽은 단테의 신곡은 중세 기독교의 문법과 너무 가까운 만큼, 내가 겪은 이 사회의 단상들과는 동떨어져 있었다.

   


0 XDK (+0)

  1. 유익한 글을 읽었다면 작성자에게 XDK를 선물하세요.


  • 첫번째 댓글의 주인공이 되어보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