whutever [801508] · MS 2018 · 쪽지

2022-01-01 01:02: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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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연히 잘 칠줄 알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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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년동안 꽤 열심히 공부했다. 


내신과 학종을 버리고, 정시에만 올인한 나는 기숙사 학교에 있었지만 마치 재종학원을 다니듯 1년을 보냈다.

남들 노는 쉬는시간에도 열심히 인강을 들었고, 점심시간에도 밥을 후다닥 먹고 들어와서 책을 봤다. , 기숙사에서도 새벽 일찍 일어나서 공부하고 아침을 먹으러 갔다.  


성적도 나쁘지 않았다. 열심히 한 만큼, 꾸준히 상승곡선을 그려줬고, 9평때는 생애 최고의 성적을 받았다. 

꿈꾸던 서울대, 고려대 과잠을 입은 미래가 멀지 않은 듯 했다.


그렇게 수험생활이 끝나기만을 기다리며 공부했던 몇십일이 지나, 수능 당일. 

조금 떨리긴 했지만, 국어도 무난했고, 수학도 한두문제를 빼면 쉬웠고, 영어도, 탐구도 평소 풀던 모의고사랑 크게 다

다를 바 없는 난이도였다. 시험이 다 끝나고 휴대폰을 돌려받기 전, '잘 친 것 같다' 라고 생각하며 홀가분함을 즐기고 있었다.


나가도 좋다는 공지를 받고, 친구들과 우르르 학교 밖으로 나섰다. 다른 교실에서 시험을 친, 새벽에 나와 같이 일어나 

공부하던 친구와 마주쳐 '고대 가느응~?' 하며 농담 따먹기도 했고, 나는 제2외국어 1번으로 밀었는데 넌 몇번으로 밀었냐? 라며 물어보던 서울대 지망생 친구와 웃으며 이야기도 나눴다. 모두 나쁘지 않게 시험을 치뤘다고 생각을 한 듯 화기애애한 분위기였다.


그렇게 교문을 나와 헤어져 집에 오는 길, 집에 들어가기 전 pc방으로 향해 메가스터디 빠른채점을 켰다. 점수가 잘 나올 것 같은 예감에 미리 채점하고 집에 들어가서 수능을 못 친 척 연기하다가 극적인 반전을 줄 생각이었다. 그렇게 싱글벙글 웃으면서 가채점표에 적어놓은 국어 답을 빠르게 입력했다. 


채점하기를 누르고, 작게 파란색 글씨, 점수가 떴다. 난생 처음 보는 점수였다. 내가 고2때였나, 처음 정시 공부를 시작할때나 맞았을 법한 숫자. 9월 모의고사 전과목에서 틀린 문제 개수보다, 국어에서 틀린 문제 개수가 더 많았다. '내가 작년 수능 빠른채점을 켰나? 아니면 내가 짝수형으로 잘못 입력했나? 이럴 리가 없는데..... 

일말의 '오류'에 대한 기대감은 곧 없어졌고, 나는 '6잘 9잘 수망' 이라는 말이 내 현실이 되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힘없이 채점한 다른 과목 성적은 나쁘지 않았지만, 그건 이미 상관없어졌다. 


다음날, 추위를 뚫고 학교에 갔다. 어제 시험장을 나오며 화기애애하게 같이 이야기했던 친구들은 이미 와있었다. 잘 쳤냐는 물음에, "아 집가서 채점해보니까 이상한데서 틀려서 조졌더라 ㅋㅋㅋㅋ" 하고 유쾌한 척 말했다. 당연히 웃는게 웃는 게 아니었지만. 이야기를 들어보니 '고대 가느응?' 이라고 말했던 친구는 오답 개수가 세손가락 안에 들어서 우리 학교 1등을 먹었고, 제 2외국어를 1번으로 밀었다는 친구는 정말 그 제 2외국어를 빼고는 마찬가지로 틀린 문제가 거의 없었다. 그 친구들을 제외하고라도, 나와 같이 새벽에 일어나 공부했던 친구들은 단 한명도 나보다 못 친, 아니 나랑 비슷하게 친 친구조차 없었다. 어이가 없을 정도로 허탈했다.

야속하게도 학교에선 계속 등교하라고 했다. 기숙사가 더이상 고3을 받지 않아서, 버스를 2번 갈아타며 1시간 거리를 매일 왔다갔다했다. 학교에 갔다가 집에 돌아가는 길은 어색하게도 밝았지만, 그 어느 하굣길보다 추웠다. 


등교기간 동안, 친구들의 대학 발표가 서서히 났다. '고대 가느응~?' 이라고 말했던 친구는 연대 수시에 붙었고(다음 해부터 열심히 고대를 깠다), 제2외국어만 못쳤던 그 친구는 고대와 연대를 모두 붙고 둘 중에 고민하고 있었다. 난 인서울이 어떻게 가능할지 고민하고 있는데, 나도 쟤들만큼 열심히 공부하고 성적도 비슷했는데. 왜 나만 이렇게 다르지. 나의 상황에 첫번째로 화가 났고, 1년간 정말 열심히 노력한 친구들의 성취를 진심으로 축하해줄 수 없는 내 편협한 마음씨에 두 번째로 화가 났다. 스스로가 엄청 한심하게 여겨졌다. 


시간이 지나 방학을 하고, 2018년 1월 1일. 같이 재수하기로 한 중학교 친구와 함께 동네 뒷산에 해돋이를 보러 갔다. 코로나가 없던 시절, 추운 날씨였지만 사람들로 북적북적했다. 앞에서 나눠준 떡국을 손에 들고, 떠오르는 해를 보고 소원을 빌었다. '내년에는, 꼭 수험생활 끝내게 해주세요. 나도 노력한 거에 대한 결실을 맺게 해주세요. 내년 해돋이는 후련한 마음으로, 기분좋게 애들랑 술도 마시고 밤새 게임도 하고, 그렇게 즐거운 상태에서 볼 수 있게 해주세요.... ' 살면서 그정도로 간절하게 소원을 빌었던 적이 없었던 것 같다. 


그렇게 1년의 수험 생활이 지나고, 수능을 만족스럽게 친 후에 맞은 아침. 창문 밖으로 기분좋은 노란 햇빛이 들어오고, 그와 동시에 수능 잘쳤냐고 친구들의 안부 전화가 울리던 그 풍경은 아직도 잊을 수 없는 따뜻한 기억이다. 그 해 12월 31일에는 그 전년도에 빌었던 것처럼 맥주한잔 하고, pc방에서 밤샘 게임을 한 후에 해돋이를 보러 갈 수 있었다. 2017년의 겨울은 어느 겨울보다도 추웠지만, 2018년 겨울은 어느 여름보다도 따뜻했다.



- 지난 1년간 수험생활 하신다고 고생 많으셨습니다. 올해 수능에서 좌절하신 분들에겐, 이 겨울이, 맞는 새해가 다 야속하고, 우울할 수도 있을 것 같습니다. 저도 그랬구요. 이번 2022년, 다시 한번 화이팅하신다면, 내년 이맘때에는 누구보다 행복하고 따뜻한 겨울을 보내실 수 있을 것이라 생각합니다. 모두들 다시 한번 수고하셨고,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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