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황장애 회복기2)재수, 열심히만 하면 되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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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수를 했을 때의 일이었다. 한 교실에 100명 정도가 모여서 자습하는 관리형 대형학원에서 공부를 하고 있었는데, 문득 펜을 잠시 내려놓고 내가 왜 이곳에 있어야 하는지를 따져보고 싶어졌다.
주변을 하나하나 돌아봐. 침묵과 정적이 흐르고, 모든 이들이 책과 펜에 집중하고 있어. 근데, 무엇을 위해서 다들 가는 걸까. 또, 나는 무엇을 중요시 여기길래 여기에 목숨과도 같은 젊음을 투자하는 걸까.
고2 여름방학 즈음부터 학교 시스템에 불만을 가지면서 정시를 준비했는데, 고3 수능을 망친 이유로 여기에 존재하게 되었다. 당시엔, 서울 생활을 하면서 또 재수 생활을 하면서 나를 찾아나설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어 재수를 함에 있어 상당히 가벼운 마음이었다. 공부를 열심히 해나갈 자신도 있었고, 무엇보다도 나 혼자만의 시간을 가짐으로써 그 누구도 들여다보기 힘든 나만의 밀실을 구축할 수 있겠다 싶었다.
그 계획은 차분히 성립되어갔다. 서울에 오면서, 또 대치동에 발을 내닫음으로, 분명 내가 알지 못했던 나 자신의 은밀한 부분들, 감정선들을 찾을 수 있었다. 또한, 진정 내가 나의 명령자이자 복종자가 될수 있는 타지 생활 덕분으로, 진정 어른으로서 나 자신에 고유한 의미를 투영하는 주체성 또한 기를 수 있었다.
한데, 어려운 점이 있었다.
내가 그토록 중요시 여기는 가치인 주체성과 고유성은, 대입과는 거리가 상당히 멀었다는 점. 그 두 개의 가치를 길러오면서, 되려 이 서울 생활에 혐오감을 갖기 시작했다.
나는 왜 이곳에서 누군가를 짓밟으며 공부를 해야하는가. 물론, 이 생각이 더더욱 구체화된 것은, 타강사를 견제하고 나 하나만 잘 되면 된다는 식의 분위기가 강한 대치동에 내가 있게된 것도 한몫했을 터. 내가 이 곳에 존재하게 된 이유를 명징하게 밝히지 못한다면 더 이상 굳건히 서울 생활을 할 수 없을 것 같았다.
생각해보면 정말로 간단한 것이다. 수능을 망했기 때문에.
근데, 수능을 망했기 때문에 재수를 하는 것은 이해가 가지만, 그 과정에서 그 모든 것을 내려놓고 오로지 공부에 내 모든 것을투자하는 것이 옳은 일인가를 나는 치열히 고민해야 했다.
입시를 다시 준비하는 이유. 아니, 대학에 가야하는 이유.
결국, 겉치레였다. 내 삶을 주도적으로 이끌어 나가는 과정에서 나의 능력을 꼬릿표 따위로 장식하기 위한 병신같은 생각.
어쩌면, 그 병신같은 생각때문에 나를 찾는다는 빌미로 이 곳에 앉아있는 건 아닐까? 그 생각을 하다보니, 갑작스레 이 교실에 있는 모두가 부끄럽게 슬퍼보였다.
그 모든 빙점이 다 슬리어, 지금이란 동점에 서 있는 나. 대학에 합격했고, 여전히 그 두 개 가치를 창출하기 위해 실존하고 있는 나.
난 아직까지도, 재수라는 시간이 ‘공부만 하면 되는 시간’은 아닌 것 같다. 매우 열심히 입시를 준비해야 하는 시간이기도 하지만, 끝없이 고민해야 하는 시간이고, 반성해야 하는 시간이며, 나를 들여다 보아야 하는 시간이고, 이 시공간에 놓인 나를 기록해야 하는 시간이다.
그러기에, 결과 하나만을 바라보고 시작하는 시간이 되어서는 안 되며, 설령 결과가 좋지 않았더라도, 그 과정에서 보이지 않는 소중한 가치들을 머금게 되었다면 참으로 좋은 추억이 될 수도 있는 시간이다.
재수는 젊음의 일부를 댓가로, 나를 구체화 할 수 있는 기회.
부디 그 소중한 다이아몬드를 대학 따위의 값싼 레테르로 바꿔먹지 않길 바라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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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감 ....:)
제목을 보니 본문이랑 상관은 없지만 친구도 수능때 공황장애왔었고
저도 안그래도 adhd로 정신과 다니다가 6월쯤에 공황온거 첨에 약 부작용인가하고 뛰어간 기억이 나네요 ㅎㅎ
그친구랑 같이 장사하고있는데 생각보다 먹고살길이 많긴 하더라구용
생각보다, 수능이끝나고나니
공부 이외에도 할게, 할 수 있는게, 잘하는게 너무 많은세상인데
1년의 재수 후회는 하지않지만
가끔 내가 공부에만 너무 집중했다면
지금 보는 많은것들의 존재도 몰랐을거라는게
항상 무섭기도하고 신기하기도하고 감사하기도한 그런..
본문 마지막 부분이 특히 마음에 듭니다
저는 공부를 재미가 나름 붙어서 하긴 했었지만
재수시절동안 많은 사색을 했는데
필력이딸리고 잠결이라 글을 잘 쓰진 못하겠지만
공부에 쏟은시간보다는
재수하며 얻은 사색의시간
그리고 그동안 얻은 많은 깨달음
나에대한 객관적 성찰
이런것들은 정말 다시는 얻을 수 없을 그런 경험인 것 같아요
저도 결과를 떠나서 그런 맥락에서 재수를 한 것이 참 어찌보면 다행스럽다고 생각하는 사람이랍니다. 결국, 사유와 이성이 녹슬지 않을 때, 내가 주체적으로 나의 존재적 무게감을 이길 수 있다고 보거든요. 그런 관점에서 재수는 하나의 쉼터였고, 발돋움할 수 있는 과정이었습니다.
그렇지요 ㅎㅎ 공부도 간판도 뭐든지 아예 가치가 없는건 없지만,
적어도 1년이란 시간과 돈을 쏟으며 하기에는 재수란 행위가
결코 대학 하나만 얻어서는 반쪽자리 성공인 것 같습니다.
대학을 잘가든 못가든, 재수시절 만큼 본인이 생각해온 삶의 가치와 방향에 대한 성찰을 할 시간이 잘 없기도 하고,
수능의 결과가 어떻든 그때 얻은 깨달음은 많은 영향을 주니까요.
분명히 재수라는건 힘들었지만, 하나의 쉼터였다는 말씀은 아주 공감이 됩니다.
몸과 마음이 편안해서 쉼터는 아닐지라도, 인생에서 무언가 1년을 통채로 멈추고 혼자만의 시간을 갖는 일은 거의 없으니까요
그런 시간이 쌓이고 쌓이면.. 지금 젊은이들이 겪고 있는 여러 문제점들이 해결 되리라 믿습니다. 결국, 삶은 자신의 것이니, 누가 뭐라고 하든 내 소리에 더 집중해야 해요. 주체성과 자율성이 결핍된 한국이기에, 취업난의 대안을 더 못세우는 것은 아닐는지요.
무튼, 젊음으로서 굳건해지기 위해서는 사유와 이성이 정말로 강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말씀 주신대로, 그것은 인생 전반에 영향을 끼치게 마련이니까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