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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이근남 [400201] · MS 2012 · 쪽지

2013-01-31 15:18:58
조회수 16,613

외국인이 삼수해서 정시로 의대 합격하기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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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기가 이제야 완성돼서 꼭 써보고 싶었던 제 수기를 쓰게되네요.


저의 간단한 프로필을 쓰자면

나이:22 (92년생)

대학: 원광대학교 의예과 최초합격

수능: 11111



 



후기를 쓰기에 앞서 마음이 정말 힘드시고 죽을 것만 같으신 분들에게 정말 많은 힘이 되었으면 합니다. 공부방법은 사실 자신한테 맞는 공부왕도가 각각 다르시고 저보다 잘 아시는 분들도 많으실 것 같아 생략하도록
하겠습니다.



 



무엇을 먼저 이야기해야 할지 모르겠지만 우선 제 소개를 해보겠습니다. 저는
서울에서 태어났고 1살 때 아버지가 미국유학을 하셔서 미국에서 10년간
살다가 우리나라로 돌아왔습니다. 미국의 10년을 한 줄로
얘기하기 아쉬우니 미국 생활을 여담으로 얘기해보겠습니다. 미국에 있을 때 가장 좋았다고 생각할 만한
건 미국 여행이었습니다. 미국 여행은 우리나라처럼 몇박몇일로 가기에는 무리가 있습니다. 즉 몇 주씩 여행을 하면서 다양한 볼거리와 체험을 할 수 있어서 좋습니다. 제가
가본 곳으로는 나이아가라 폭포, 옐로스톤, 플로리다의 마이애미해변, 디즈니 등 있는데 정말 한번 가볼 만한 곳들입니다. 그러나 미국에서
가장 힘들었던 건 바로 인종차별이었습니다. 그건 미국에 있는 모든 장점들을 덮어버릴 만큼 치명적이었습니다. 우리가 소위 말하는 왕 따는 학교에서 학생들끼리 소외시키는 것이지만 미국에서의 인종차별은 다른 인종을 자기와
동등한 사람으로 보지 않는 것이었습니다. 제가 미국에 있을 당시는
90
년대였기에 지금은 어떨지 몰라도 그 당시에는 미국사람들은 우리나라가 존재하는지 조차도 모르고 알고 있더라도 전쟁국가인줄만 알고
있었습니다. 또한 미국의 백인과 흑인은 황인을 차별하고 암묵적으로 억압하던 시절이었습니다. 그들에게 황인이라함은 돈 벌려고 미국에서와 세탁기나 돌리는 하인이나 마찬가지였습니다. 저는 학교에서 chinese boy, japanese boy라는
별명으로 불려가며 많은 고초를 감내해야 했습니다. 그러나 한번도 제대로 대응하거나 반박하지 못했고 그건
뼈 속부터 미국을 증오하는 마음을 낳기도 했습니다. 어쩌면 그런 것들이 쌓여서 심한 경우 이슈화된 사건들
중 총기난사와 같은 비극으로 이어졌을지도 모릅니다. 물론 저는 지금은 미국에 대해 아무 감정이 없습니다. 미국 여담은 무수히 많아서 다 얘기해보고 싶지만 여기까지만 하고 우리나라에 돌아온 후를 상세히 말하고자 합니다.



 



 



우리나라에 돌아온 때는 2002년 월드컵이었습니다. 학교는 4학년 2학기부터
다니기 시작했는데 모두들 외국에서 왔다고 하니깐 신기해 했습니다. 그리고 영어를 잘 할거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실상 저는 영어를 한국에서 거의 다 공부했습니다. 미국에서
얻어온 건 회화와 발음 정도였습니다. 그리고 초등학교4학년까지만
다녔기에 많이 배운 것이 없었습니다. 유학목적이 아닌 아버지를 따라서 미국에 살게 된 것이기에 미국에서는
매일 같이 운동하고 놀기만 했고 우리나라의 학습지나 학원은 상상도 하지 못했습니다. 이러한 차이는 제가
공부를 하는 데에 있어서 매우 큰 어려움을 불러왔습니다. 또한 우리나라 아이들의 수준과 저의 격차가
너무 큰 원인이기도 했습니다. 더불어 저는 한글을 우리나라에 와서 배우기 시작했습니다. 4학년이지만은 우리말에 대한 수준은 초등학교1학년 수준에도 못 미쳤었습니다. 한마디로 저는 11살까지의 인생을 초기화하고 새롭게 우리나라에 맞는 삶을 살아야 하는 처지에 놓여 있었습니다. 그 때도 어렸지만 정말 미국에서도 고초를 많이 겪었는데 우리나라에 와서 모든걸 새로 시작해야 한다는 막막함에
매우 힘들어 했었습니다. 제가 해야 할 것들은 우리말 수준을 끌어 올리기, 한글 배우기, 수학 따라잡기, 영어
공부하기 등등 정말 해야 할 것이 태산이었습니다. 우리말은 위인전과 만화를 읽으면서 습득하기 시작했고
한글은 학교를 다니면서부터 배우기 시작했는데 반나절 만에 배우는 문자이기에는 너무 어려웠습니다.(.) 어쨌든 그렇게 해서 5학년
때는 독후감 정도는 쓸 수 있는 한글 실력(?)을 갖추게 됐고 서툰 우리말을 고치기 위해 다분한 노력을
했습니다. 수학과 영어는 열거하기도 힘들므로 생략하겠습니다.



 



 



중학교에 들어가자 더 많은 장벽들이 눈 앞에 쌓였습니다. 우선 학원을
다니지 못하는 습관은 치명적이었습니다. 학원을 가도 수업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지 미지수였습니다. 그래서 독학을 했습니다.(계속 고3때까지
독학이었습니다.) 수학은 정말 선행은 커녕 후행이었습니다. 초등학교
수학이랑 중학교 수학을 중학교2년 동안 마치는 계획을 짜고 중3부터
고등학교 정석을 들어가기로 했습니다. 또한 설상가상으로 학교생활도 정말 안 좋을 데로 안 좋았습니다. 그때는 아직까지 우리말 발음이 이상하고 아이들의 저의 대한 신기함이 소외로 바뀌어 있었습니다. 결국 저는 중학교에서 그저 소외된 아이였습니다. 같이 다니는 애도
정말 손에 꼽을 정도였습니다. 어쨌든 저는 그 소외된 시간을 모두 공부에 투자하였습니다. 그렇게 하지 않으면 우리나라에서 살아남지 못할 것 같은 마음이었습니다. 그렇게
공부를 하다 보니 중학생인데도 불구하고 하루에 8시간 이상씩 꾸준히 공부하게 되었습니다. 남들은 많이 해봐야 시험 전 2주나 3주 전부터 시험준비를 했지만 저는 딱 시험 후 1주만 쉬고 그 다음부터
매일같이 공부만 했습니다. 공부를 안 할 때는 낮잠을 잤습니다. 컴퓨터
게임은 시험 후 일주일 후를 제외한 나머지는 일절 하지 않았습니다. 그렇게 공부하다 보니 반에서는 줄곧 2등이었고 중학교 졸업할 때 쯤에서는 전교6등으로 졸업을 했습니다. 나중에 알았지만 그 중학교에서 전교 50등까지는 저를 포함한 2명을 제외한 전원이 특목고에 입학했었습니다. 물론 저는 학교에 적응하기도
바빴고 특목고라는 것이 존재하는 줄도 잘 몰랐습니다. 부모님도 전혀 모르셔서 가지 말라고 하셨던 걸로
기억합니다. 기적의 고행은 거기서부터 시작되었습니다.



 



 



저는 평준화 지역에서 살고 있었는데 고등학교는 보통 어느 정도의 성적이 되면 자기가 지망했던 학교에 그대로 보내주게
되어있었습니다. 그러나 저에게는 그러한 운이 따르지 않았습니다. 제가
당연히 진학할 줄 알았던 일반고는 되지 않았고 설립되지 얼마 안된 고등학교에 입학하게 되었습니다. 물론
그 학교 자체가 싫다는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그런 고등학교들의 대부분의 단점은 수업 분위기가 좋지
않고 공부에 방해가 되는 환경이 조성된 경우가 많다는 점입니다. 나중에 후문으로 들은 이야기지만 중학생들
중 특목고를 입학하지 않은 최상위권학생들을 일부 신생 고등학교들에 배치한다는 말도 있었습니다. 어쨌거나
제 고등학교 1학년은 정말 조마조마한 생활이었습니다.
반의 40명중 30명은 담배를 피고 주먹으로 새로 들여온
사물함을 부셔서 너덜너덜해지는 것이 다반사였습니다. 저는 구석에서 혼자 공부에 집중하려고 노력하면서
주위 환경을 무시했습니다. 그러나 저는 편하게 공부할 자격도 박탈 당했습니다. 끊임없이 장난을 걸고 공부를 방해하는 통에 저는 부모님께 학교를 자퇴하게 하고 검정고시를 치르게 해달라고 했습니다. 그러나 부모님은 허락하시지 않았고 저는 계속 학교에서 숨죽여 공부를 하고자 했습니다. 여담이지만 공부하려고 교실을 버리고 옥상에서 한적도 있습니다. 지금
생각하면 웃음만 나올 뿐입니다.



 



 



그러던 어느 날 저는 심각하게 부모님한테 제발 좀 이 학교를 나가게 해달라고 말했습니다. 1학년 2학기 기말고사가 끝난 무렵이었는데 부모님이 제 말을 들으시고
전학을 하기로 결정하셨습니다. 결국 저는 사립고등학교로 전학을 가게 되었습니다. 그 고등학교는 학생들이 매우 우수하기 때문에 내신을 받기 매우 힘들다는 단점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저는 일단은 벗어나고 싶었습니다. 더 이상 고통 받으며 공부하기는
싫었습니다. 그러나 전학 후에도 고행은 여전했습니다.



 



 



고등학교2학년이 되어서 전학한 고등학교의 첫 중간고사를 치르게 되었습니다. 결과는 참담했습니다. 일단 문제 출제방식이 이전 학교와 완전 딴판이었으며(주관식 서술형이 이전학교에는 존재하지 않았습니다.) 학생들의 실력은
이전학교의 학생들과 비교도 안될 정도로 뛰어났습니다. 결국 2학년
내신이 2등급 부근으로 떨어졌다. 그렇다고 실망을 하고 내신을
소홀히 하지 않았습니다. 뭐든 끝까지 하는 성격이기에 끝까지 내신이 잘 안 나오더라도 2등급이라도 유지하려고 부단히 노력했습니다.



 



 



고등학교 3학년이 되고 나서는 정신적 스트레스와 제 자신의 한계가
느껴졌습니다. 앞에서 말했다시피 저는 초등학교 5,6학년
때는 우리말을 배우느라 중학교1학년 때부터 이 땅에 살기 위해,
적응하기 위해 끊임없이 고등학생처럼 공부를 해왔습니다. 이제는 한계와 정신적 스트레스가 극도에 달해진
것입니다. 이때부터 저는 게임을 조금씩 했습니다. 하루에 30분에서 1시간씩 게임을 해서 스트레스를 조금이라도 덜고자 했습니다. 그리고 2011학년도 수능이 다가왔습니다. 그러나 여기서 불운이 겹쳤습니다. 우선 시험 전에 먹은 음식 때문에
장염이 걸렸습니다. 그것도 일주일 전이었습니다. 시험 며칠
전에 링거를 맞을 정도 심하게 아팠고 공부는 거의 하지 못했습니다.



 



시험 당일 저의 첫 번째 수능. 1교시 종이 울리고 언어영역 시험지를
봤습니다. 솔직히 기억이 안 납니다. 제가 어떻게 풀고 읽었는지저한테는 항상 언어가 취약했습니다. 정말 취약한 곳에서 저한테는
정말 어려운 문제들이 이어졌습니다.(마치 언어 지문 정도 길이의 영어지문을 영어 못하는 학생이 푼다고
생각해 보시면 이해가 될겁니다….) 수학도 나름 자신 있게 임했지만 정말 눈앞에 백지가 보일 정도로
지금도 그때 무엇을 했는지 기억이 안 납니다. 점심때는 설상가상으로 어머니가 음료수를 착각하시고 탄산음료를
넣어주셨습니다. 그것도 장염이었는데 말입니다. 그리고 외국어와
과탐 시간이 바람처럼 지나고 제게는 남는 게 없었습니다. 솔직히 의사가 되려는 꿈은 초등학교 때부터
줄곧 계속 의사가 언젠간 되리라는 생각은 있었지만 이렇게 처참하게 당하고 나니 어안이 벙벙했습니다.



 



 



저는 졸업식 때가 아직도 선선합니다. 그때 저는 정말로 인생을 그
누구에 꿀리지 않을 만큼 성실하게 살아왔다고 생각했습니다. 지금도 그렇습니다. 그런데 반에서 3등까지 서울대에 입학하고 4등인 저는 아무 결실도 얻지 못하는 것을 생각하니 참을 수 없어서 졸업식 도중에 학교를 뛰쳐나왔습니다. 그리고 그대로 집으로 뛰어갔습니다. 그렇게 제 졸업식은 존재하지
않았습니다. 제 인생은 불행과 고통만이 존재한다고 생각되었습니다. 하다
못해 초등학교 때 인종차별이라는 정신적 피폐로 인해 어린 시절 추억으로의 도피도 무참히 말살되었습니다. 그런 19살 저의 마음에는 상처만이 가득했습니다.



 



 



재수 이야기를 하기 전에 제가 왜 의사가 되기를 희망했고 거기에 얽힌 이야기들을 해보고자 합니다. 우선 제가 의사가 되겠다고 마음 먹은 것은 초등학교2학년 때였습니다. 그 당시에 저는 미국에서 알레르기로 심한 고생을 하고 있었습니다. 천식으로
넘어가기 직전 상태에서 머무르고 있었서 매일 밤 코가 막혀 잠을 설쳤고 숨을 잘 쉬지 못해 스스로 고통에 겨워했습니다. (그때 숨쉬는 거에 대한 소중함을 알았습니다. 양쪽 코에서 공기가
들어올 때 상쾌함이란….) 어쨌든 그 코 알레르기는 옛날 보다는 덜 하지만 아직도 있습니다. 여담으로 제가 중학생 때 코 알레르기가 여름철과 겨울철에 심했었는데 마치 일년 중 4개월은 감기에 걸린거와 같았고 공부를 할 때 신문지를 밑에 하나 깔아 놓았는데 공부하는 동안 콧물로 신문지가
다 적셔질 때 까지 견디다 잠이 들곤 했습니다. 또한 어느날에는 입이 아닌 코로 숨쉬는 느낌을 갖고
싶어 코에다가 치약 넣기도 했습니다. 그 정도로 절박하고 힘들었기에 이러한 고통을 받는 사람들에게 도움을
주고 싶어 의사라는 직업에 목숨을 걸고 집착하게 되었습니다. 때로는 숨이 잘 안 쉬어져 죽고 싶었지만
그렇게 고통 받는 사람들과 나 자신을 돕고 싶어졌습니다.



 



 



다시 재수 이야기를 시작하자면 현역 때의 수능이 끝난 후 절망 그 자체로 인생을 살아가고 있었습니다.  그렇게 해서 1달 정도 폐인처럼 집에서 게임을 하고 외부와 단절한 채로 살았습니다.
무렵 수영을 시작해서 공부 때문에 찐 살 13키로 정도를 감량을 해서 정상 체중을 만들고 체력을 재충전했습니다. 그리고 재수를 하기 시작했습니다. 재수 때는 정말 제 남은 모든
힘과 열정을 쏟으리라 결심했습니다. 학원이라는 곳에도 처음으로 들어갔습니다.(재수종합학원이었는데 첫 학원이자 마지막 학원이었습니다.) “지금까지도
성실했지만 더 쏟아 붇자 남아있는 게 없을 때까지라고 생각하고 공부를 했습니다. 그러나 하루에 10시간 이상해도 제가 너무 부족했습니다. 원래부터가 부족했습니다. 그렇습니다. 제가 공부한 기간은 다른 아이들에 비해 너무나도 짧고 너무나도 압축되어 있었습니다.(다른 사람들은 미국에서 살다 왔으니 영어 advantage가 있지
않을 거냐고 반문 할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없다고 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제가 수능과 토플을 볼 실력을 갖춘 것은 여기서 영어공부를 게을리 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마치 우리나라 수험생들이 영어를 접하듯 한글을 접했기에 모든 것이 우리말로
된 시험을 풀기 위해서는 정말 공부할 분량이 방대했습니다. 11살 외국인이 우리나라에 와서 우리말 배우고
다른 아이들을 모두 뛰어 넘고 최상위권이 되어 수능 정시로 의과대학을 가는게 쉬운 일이 결코 아닙니다. 불가능할지도
모르겠습니다.)결국 재수 때는 수학을 기본부터 심화까지 완전히 다지는 것으로 만족해야 했습니다. 언어나 과탐은 공부방법이나 양에 있어서 부족했고 시간도 없어서 완벽하게 끝내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성실히 했다는 것으로 만족하고 첫 대학인 한의대에 입학하게 되었습니다.
이것도 여담이지만 사실 지방대의대도 합격이었습니다. 다만 추합번호가 나오고 막판에 예비 1번으로 바뀌었는데 등록포기마감일 후 하루가 채 지나지 않아 한 명이 포기해서 제가 들어가리라 생각했지만 그
한자리로 또 다른 전형을 만들어 2차 정시를 모집하는 것이었습니다.
당시에는 정말 화가 머리끝까지 났었습니다. 세상에 이렇게 불합리할 수 있나문닫고 들어가는게 맞는 건데…. 친구한테 물어봐도 그거 정말 이상하다고보통은 다 합격 준다고등록포기마감일 후에 등록을 포기한 학생도
원망스러웠지만 지원했던 대학이 더 야속했습니다. 겨우 몇 시간 지났다고…..학생의 인생보다 그렇게 철저하게 원칙이 중요하다니 세상이 싫었습니다….그리고
제 인생이 이렇게 고통으로 얼룩져있는 운명이라는게 너무나도 싫고 증오했습니다.



 



 



어쨌든 다행인 것은 한의대에 초합이 되어있어서 대학 문턱이라도 밟는다니 정말 마음을 쓸어 내렸습니다. 하지만 저의 목표는 의대였습니다. 절대 포기 못하는, 아니 목에 칼이 들어와도 포기 못하는 꿈이 되어 버린지 오래였습니다. 죽어도
의대였습니다. 그래서 삼수를 하기로 했습니다. 대학은 3월 달까지는 다녔었습니다. 대학생활은 어떤지 궁금하기도 하고 한의대는
어떤 곳인지도 궁금하기도 했습니다. 3월 말부터는 학교에 안 나가고 독서실에서 독학을 하기 시작했습니다. 재수를 하면서 학원의 커리큘럼이나 스케줄 때문에 잃어버리는 시간이 꽤 있었지만 삼수는 저에게 맞는 저를 위한
스케줄을 짜고 거기에 맞게 공부를 해 나갔습니다. 다시 혼자 공부하게 되니 공부가 오히려 잘되는 거
같았습니다. 그렇게 2달을 하루 12시간 이상씩 공부했습니다. 많은 양의 공부를 했음에도 언어와 과탐은
진전을 보이지 않았습니다. 6월모평을 봤지만 2012수능과
정확히 똑같은 점수를 받았습니다. 점점 마음이 해이해지고 공부도 힘들어졌습니다. 항상 혼자고 외로웠습니다. 완전 독학이 이래서 힘들구나 인강이라도
들어볼까 하는 심정으로 옛날에 저장되어 있던 인강을 들었지만 왠지 그것은 대충 공부하려는 심리적 위안일 뿐 맞는 공부방법이 아닌 거 같았습니다. 여름이 되자 공부하기가 더욱더 힘들어졌습니다. 그러나 매일같이 성실히
최선을 다해서 공부하는 건 멈추지 않았습니다. 정말 인간의 한계가 느껴졌습니다. 한번은 너무 힘들어서 단순한 공부 패턴에서 벗어나 아침10시에 공부를
시작해서 밤을 새고 다음날 아침 10시에 공부를 마쳐 패턴에 변화를 주기도 했습니다. 어쨌든 언어와 과탐의 공부는 시간이 해결해 주었습니다. 시간이 가면
갈수록 실력이 급속도로 늘어갔습니다. 어쩌면 그 많은 공부를 하면서 잠재되어 있던 실력이 그제서야 나오는거
같았습니다. 9월에는 인서울 의대까지는 아니지만 재수 때 수능보다는 월등한 점수였습니다. 그리고 10월이 되었습니다. 너무
힘들고 지쳤있었습니다. 마치 마라톤에서 한발 내딜 때 마다 숨이 차는 그런 느낌이었습니다. 그래도 한 주 한 주 지나갈수록 점점 성적은 올랐습니다. 그리고
마침내 만점에 가까운 점수가 사설이던 기출이던 매일 모의고사를 보면서 나왔습니다. 그렇게 2주가 가고 수능이 왔습니다. 평소 보던 것처럼 보면 된다는 마인드로
차근차근 풀었습니다. 그리고 시험이 끝났습니다.



 



 



집에 와서 가채점을 했습니다. 결과는 제 기준으로 실망스러웠습니다. 물론 2012수능보다는 월등히 잘나왔지만 수능 전 상승세를 탔던
점수는 어디에도 없었습니다. 그래도 만족하려고 했습니다. ‘어쟀든
나는 최선을 다하지 않았는가…’ ‘그렇게 많은 고생을 하면서도 꿋꿋이 버텼던 나 아니던가….’ 그러나 시간이 갈수록 아 몇 점만 더 맞으면 인서울의대 넣을
수 있을 거 같은데….’ ‘서울대의대 갈 성적을 받을 애들은 정말 나보다 다 공부를 더 열심히 성실히
많이 한걸까?’ ‘과연 나는 서울대의대 가는 사람들 보다 공부를 적게 한 걸까 아님 노력을 안 한걸까?’





정말 그러한 생각이 끊임없이 머릿속을 쪼갰습니다. 그리고 인생에 대한
불만은 자꾸만 커져갔습니다. 드디어 1128일 수능성적표가 나오는 날. 부모님한테는 그런 거 이젠 신경 안 쓸래하고 게임 폐인처럼 게임 속에 묻혀
지냈지만 마음속은 언제나 콩밭….. ‘아 가채점 틀리면 안 되는데
개라도 더 나가면 아예 의대 갈 희망도 없다…’등등 무수한 생각이 꼬리를 물고 늘어졌습니다. 그리고 9시 성적표 이메일을 확인하고 소리를 질렀습니다. 안도감 그 자체였습니다. 아마도 저의 수능성적에 대한 불만과 불안이
저의 정신을 더욱 피폐하게 만들었던 것 같습니다. 그리고 이제 배치표랑 여러 입시자료들을 분석하며 제가
넣을 의대를 고르기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또 시작되었습니다. ‘
진짜 난 서울대의대 가는 애들 정도는 공부한거 같은데…’ ‘인생 참
xx
같군….’ ‘정말 인생 살아오면서 매 순간 성실했다고 생각했는데…’ ‘나는 안될 놈이라고 낙인이 있는걸까….’ ‘인생 고생만하다 가는건가…’ ‘나처럼 인생이 불바다 같은 놈이 또 있을까….’ 별의별 생각이
다 들었습니다. 그리고 어느 날 문득 이런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그래 인생은 항상 공평하지는 않다는 건 정말로 사실이야.’ ‘그런데 반대로 내가 어느 날 그 불공평으로 인해 더 잘된다면?’ ‘인생이
대학입시만 있는 것도 아닌데 그때 마다 꼭 내가 불공평함의 피해자가 되라는 법은 없지 아는가?’ ‘그리고
내가 그렇게 원하던 의사가 되면 그만이지 학교 name value 따져 무엇을 하겠다는 건가?’





그렇습니다. 높은 대학의 의대가면 좀더 간지 나겠지 좀더 잘나 보이겠지
이런 마음이 제 마음속에도 조금이라도 있었던 것입니다. 물론 높은 대학 의대 들어가면 좀더 많은 혜택이
있을 가능성이 많을 것입니다. 그러나 제가 그런 혜택 때문에 의사라는 꿈을 고통스럽게 청춘을 희생해가면서
키워온 것은 아니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렇다면 어디 의과대학을 가도 상관이 없는 것입니다. 그리고 스스로에 대한 열등감에 파묻힐 필요가 없는 것입니다. 스스로에게
자문했습니다.





실력이 없어서 서울대의대를 못 가는 것일까?’ ‘내가 지금까지 살아온 노력이 서울대의대생들 보다 더하면 더했는데 과연 고생을 덜해서 못 가는 것일까?’ ‘아니다.’ ‘다만 순간의 운이 충분히 따르지 않았기 때문이다.’





물론 이를 두고 스스로에 대한 위안일 뿐이지 않을까 하는 사람들도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다시 한번 그런 분들에게는 자신의 꿈이 무엇인가를 반문해보고 싶습니다.
극단적이지만 책상 앞에 식칼을 두고 그 직업을 진정으로 갈망하는지 반문하고 싶습니다. 그리고
지금까지 일편단심으로 그 직업에 대해서만 생각하고 집착했는지 묻고 싶습니다. (저는 마음이 약해질 때
극단적이라고 생각해도 실제로 책상 앞에 식칼을 두고 공부한적이 있습니다. 문제를 틀리면 손목을 그어버리겠다는
생각도 했습니다. 그만큼 의대를 원했고 갈망했습니다.) 인생의
목표는 대학이 될 수 없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저는 제가 의사만 되면 모든 것이 성공이고 잘된 것이라고
마음을 고쳐 먹었습니다.



 



 



이쯤 되면 이렇게나 의대에 목을 매고 집착하는데 사수해서 인서울 의대 가는 것은 어떻겠냐고 하시는 분들도 계십니다. 위에서도 말씀 드렸듯이 제 원래 목표는 의사였고 대학서열이 아니었기에 이제는 제가 다니는 대학을 만족하면서
다닐 수 있고 지친 제 자신도 추스르고 싶습니다. 사실 위에 글에서도 제 고통을 생생하게 묘사하려고
했지만 제가 저렇게 살면서 모든 면에서 지치긴 했습니다. 여러분도 단순한 입시와 점수서열싸움을 떠나서
한번쯤 자신이 진짜 원하는 것을 찾아보길 바랍니다. 물론 이는 매일 같이 공부와 시름하고 힘든 나날을
보내시고 있는 수험생들께 정말 힘든 일이긴 하지만 어쩌면 행복을 찾을 수 있는 하나의 길인 것 같습니다.



 



 



초등학교 때 공부는 크게 기대 안 하시던 부모님, 저같이 미국에서
와서 적응 못한 애들은 전부 미국으로 돌아가거나 비싼 등록금 내며 외국인 고등학교 다닐 때 저는 있는 힘을 다해 이 땅에 적응하려고 악착같이 살아온
놈이었습니다. 인생 사는거 지금까지는 숫한 고초만 잔뜩 겪었는데 이제는 행복하게, 즐기면서 살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끝으로 이제는 부모님한테
효도하고 싶습니다. 제가 힘들 때 화내고 성질 부리는거 불효자처럼 군거 하나하나 다 갚아나가고 싶습니다. 그리고 이제는 이 나이 먹도록 연애 한 번 안()한거(미국같았으면 벌써 했을 나이지만 ㅜ), 해결하고 싶고 그 동안 쌓였던 스트레스를 풀고 싶습니다.



 



 



이상이 제 수기였습니다. 두서 없고 글 못나게 썼지만 끝까지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수기를 쓰면서 제일 전하고 싶었던 고통,고뇌가 잘 전달되었는지 모르겠지만 정말 많은 분들이 이 글을 읽으시면서
단순한 수험생활 뿐만 아니라 삶에 작으마한 보탬이라도 됐으면 합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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