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쥬✨ [979083] · MS 2020 · 쪽지

2021-01-11 01:05: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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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황장애 탈출기1)내 삶은 내가 살게 좀 내버려 두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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겨울이 왔고, 오랜만에 보는 힘이 센 눈줄기에 나무들은 조용히 백사옷을 입게 되었다. 무엇이 맞는 삶인지는 모르겠지만, 코로나 바이러스가 우리 일상을 갉아먹기 시작한 지 어언 1년이 지난 지금, 나는 소박하게 운동을 하면서 지내고 있다.


소복 소복. 내 신발에 짓밟힌 눈들이 내는 소리. 상쾌함이 나리는 그 차가운 음성에 오늘도 나는 떠밀려가듯 걸어간다. 탁구장으로. 


탁구장에 도착한 것은 1시. 평소 나와 같이 파트너십을 맺어 연습 상대가 된 삼촌이 먼저 와 있었다. 가볍게 포핸드 드라이브 연습을 하고, 그 다음은 백핸드 드라이브다. 양쪽 공격수단의 연습을 다하면 서브를 넣고 공격 선제를 먼저 잡는 3구 연습을 한다. 그렇게 대충 연습 시스템을 마치고 나면, 20분 정도를 쉰다.


커피를 마시면서 사람들이 오후에 탁구를 즐기는 정경을 보는 도중. 평소에 알고 지내던 할아버지가 말을 건넨다.


-김군, 자네는 대학생이라고 했지? 


-네 그렇습니다만...


-대학교에서 가장 우선적으로 해야할 것이 뭐라고 생각해?


-흠.. 요새 저는 인문학에 좀 많은 시간을 투자하는 것 같아요.

굳이 따지자면 독서가 저한텐 제일 중요한 것 같아요.


-에이.. 그러니까 독서도 중요한데! 그거 말고 다른 것은?


-다른 거요? 아직 생각해 본 적이 없어요. 그냥, 저는 제가 원하는 것이 명확해질 때 비로소 몸을 움직이는 타입이라서요.


-영어야. 영어. 아는 친구가 몇년 전에 S사 임원으로 진급했는데, 아주 황당한 일을 겪었다더군. 회의를 시작하는데, 모든 것들이 다 영어로 진행된다는 거야, 뿐만이 아니지. 외국인들과 얘기하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 줄 아나? 판이 넓어지면 넓어질수록세계공용어인 영어를 쓰게 된다고. 그러니 영어를 해놔.


-글쎄요, 전 생각이 좀 다릅니다. 물론, Free taking을 해두면 여러 장점을 취할 수 있겠습니다만, 그것이 왜 우선 순위가 되어야 하지요? 저는 그것을 우선 순위로 두고 싶지 않습니다. 저는 영어에 별 관심이 없는 사람이거든요. 훗날에, 내가 뛰게 될 전문적인 에어리어에서 영어가 정말 필요하다면, 그 때 하겠습니다. 지금은 그것에 시간 투자하기가 싫어서요. 하고 싶은 것이 이미 정해진 까닭입니다.


-에헤이, 그게 아니야. 나중에 배우면 머리 구조가 바뀌어서 영어를 못하게 된다고. 다시 생각해봐.


“야! 잔말말고, 저기 자리 남으니까 복식 쳐 복식.”


관장님의 중재 아닌 중재로 대화는 거기서 종료되었다. 그리고 집에 와서 생각을 다시 한 번 해본다.


영어? Free taking? 물론 배워두면 좋은 점도 많이 있을 것이다. 하지만, 나는 그것에 지금은 시간을 쓰고 싶지가 않다. 더 나아가서 그것을 우선순위로 두어야 한다고? 도대체 왜?


내 삶은 내가 조각해나가는 건데. 그렇게 따지면 성공한 사람들은 다 영어를 잘하나? 꼭 그렇지만은 않을 텐데? 왜 굳이? 그런 생각이 든다. 요즘 내가 관심을 갖는 분야는 미디어 개발인데, 내가 참 의미있는 어플리케이션을 개발하고, 돈을 벌어서 영어를 잘 하는 친구를 고용하면 될 일 아닌가?


20대를 넘어오며 어른들에게 말하고 싶었던 것은 이것. 배움이 넘쳐 흐른다는 학교, 학원에서 나는 ‘나’를 배우지 못했다고.  그러니, 이제 학점이니 취업이니 그런 개소리는 집어치우라고. 나는 나를 찾아나서서, 나만의 광장을 설립하겠다고. 그리고 그곳에서 나만의 호흡을 할 거라고. 


자신을 찾아나서는 여행에서, 실용영어라는 추억이 내게 다가오면 그땐 생각을 해보겠지만, 지금은 전혀 필요 없다. 그리고 추측컨대, 앞으로도 필요없을 것이다. 설령, 필요한 순간이 오더라도, 그것은 도대체 나를 결정적으로 나답게 만들 수는 없을 것이다.


중요한 것은, 나의 ‘탤런트’니까. 나의 탤런트는 영어가 아님을 잘 알고 있다. 난 미국을 참 좋아하지만, 미국인들이 쓰는 말은 별로 알고 싶진 않거든. 아, 물론 수능 영어는 1등급이었지만.


나의 재능, 캐릭터, 정체성, 고유한 감정선들을 찾아나서는 것이젊음의 과제라고 생각한다. 그런 과정에서 책을 읽고 생각을  확장해나가는 것은 내게 큰 도움이 된다. 그러니, 적어도 내 삶에서 만큼은 내 최우선적인 과제는 독서다. 



——


어른들은, 탁구를 하루에 5-6시간씩 치는 것에 대해서 내게 불만인 모양이다. 공부는 언제하냐고. 학생이면 공부가 중요할텐데 왜 탁구장에서 탁구만 치느냐고.


우울증을 이겨내고, 내 고유한 성격, 캐릭터를 찾는 데에 참 많은 도움이 되어준 이 운동. 나를 미치게 했다. 나를 나답게 만들어주었다. 또, 이 운동에 시간을 쏟음으로써 뚜렷한 성취감과 삶에의 의지. 그런 것들을 얻었다. 


공부? 중요하지. 아니 안다니까? 근데 젊음을 글자로만 채우기엔 너무 넓어요. 그 안에 ‘나’라는 소리가 있어야 해. 그래서 만들어지는 교향곡. 그것이 삶.


‘나’라는 사람이 탁구를 칠 때 나다울 수 있다면, 그건 내 입장에서 참으로 중요한 것이야. 독서, 탁구. 이 두 가지로 방학을 보내는 것이 왜 잘못된 건지 난 도대체 모르겠다.


아직 내가 이렇다 할 결과물을 보여주지 못해서일까. 근데 사실 상관없다. 내가 좋으면 된 거야. 내가 숨이 쉬어지면 된 거야.

내 우울증이 치료되고, 삶을 행복하게 살아갈 수 있게된 거면 괜찮은 거야.


다 괜찮은 거야. 나쁜 거 아니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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