펭귄펭귄펭귄 [840588] · MS 2018 · 쪽지

2020-12-16 23:34: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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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수를 건너는 법. tx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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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나는 집에 도착한 그 첫 순간에 베일에 가린 듯이 모든 사물, 모든 사람들로부터 차단된 나 자신을 느꼈다. 집에서 맞는 첫날 아침을 나는 이상한 비현실감 속에서 맞았다. “이런 학원에서 새 지저귀는 소리, TV에서 흘러나오는 아침드라마 소리, 설거지 하는 소리가 웬일일까?” 라고 중얼거리며 주위를 둘러보았던 것이다. ‘이런 학원에서’란 느낌은 어떤 긴박한 위기에 대처한 생생한 의지였다. 그것은 아직도 내 몸에 밴 수능 냄새였다. 그런데 설거지 소리, 유행가 소리 따위를 의식했을때 나는 뭔가 맥이 탁 풀리는 것 같았다. 나의 안에 있는 긴박함에 비해서 밖은 너무도 무의미하고 태평스럽고 어쩌면 쾌덕스럽기까지 했다. 재종 존예도, 수능 공부도, 또 나로부터 그토록 수많은 밤을 앗아 갔던 자습실도 예외일 수는 없었다. 나는 그것들과의 관계를 다시 시작할 하등의 흥미도 관심도 없었다. 나날이 권태스럽고 짜증스럽기만 했다. 이따금 나는내 안의 긴장에 대해서, 적어도 숨김없는 그 진실에 대해서 누군가에게 말하려 애써 보았다. 그러나 이해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그렇다. 이제 생각이 난다. 며칠 전 수능장에서의 일이. 실내엔 도시락 냄새가 꽉 차 있었고 선정적인 바이올린 소리와 함께 어떤 여자가 영어를 들려주고 있었다. 어쩌다가 내가 그 얘기를 들려주려고 했는지 알 수가 없다. 


  나는 운전하고 있는 삼수생의 팔을 건드리며 유리창을 가리켰지. 그는 겁에 질린 해쓱한 표정으로 나를 힐끔 곁눈질했을뿐이야. 그렇지, 혈관 속을 움직이는 피의 선회마저 느낄 듯한 이 비상한 감각, 그리고 심연에서 샘처럼 솟아 오르는 넘칠듯한 생동감이 없이는, 저 샤프심에 찔려 죽는 문제  따위야 아무것도 신기할 것이 없지, 라고 생각하며 나는 혼자서 빙긋웃었어.

  삼수생이 다시 얼굴을 힐끔 돌리며 잡아 늘이는 듯한 목소리로 말했어.

  “재수생은 무섭지 않나?”

  “아뇨, 전연.”

  “대단하군. 여기선 적이 언제 어디서라도 나타날 수 있지.”

  “저는 적보다 진정으로 무서운 건 무감각이라고 깨달았습니다.”
  ”나는 수능이 끝나면 곧장 고백할 거야.”

  “언젭니까, 수능이?”

  “삼 일 남았지.”

  “저는 지금까지 마치 꿈을 꾸다가 태어난 것 같아요. 이곳에 온 뒤론 바로 생명의 한가운데를 관통하는 느낌입니다.”

  그런데 중간에서 샤프가 고장났지. 몇 분 지체하고 나니 벌써 오분 전 종이 울리더군. 이제부터 정말 위험이 시작된 것이라 싶더군. 왜냐하면 감독관의 매의 눈에 발견되면 의심을 받을 우려가 있는 데다 오엠알 마킹도 아직 하지 않아 그도 또한 견디기 어려운 문제였지.


(중략)


  아까부터 나는 창 옆에서 사수생이 나타나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오늘도 그가 그토록 진지한 얼굴로 잃어버린 성적을 계속 찾을 것인지. 대체로 그렇지 못할 것이라고 나는 믿고 있다. 그러나 만에 하나라도 사수생이 어제와 같은 모습으로 내앞에 나타난다면 무료한 가운데서도 어떤 안정성을 획득하고 있던 나의 생활은 송두리째 무너질지도 모른다. 그가 창밖에서 뭔가 열심히 찾고 있는 한 나는 계속 도전을 받는 셈이기에. 때문에 사실을 좀 더 명확하게 파악할 필요가 있다. 사수생이 찾고 있는 성적의 정체가 무엇인지, 그런저런 것을 알아보노라면 사수생의 그와 같은 숙연한 태도와 잃어버린 등급사이의 상관관계도 알게 될 것이다. 아무튼 이제 나는 그와 한마디 얘기라도 나눠 보지 않으면 못 견딜 것 같은 심정이다.

  드디어 에코백에 책을 싣고 자습실 안으로 들어오는 사수생의 모습이 눈에 잡힌다. 어제와 거의 같은 장소에서 사수생은발걸음을 멈추고 짐을 푼다. 시계-샤프-플래너 따위들이 착착 있을 곳에 놓여진다. 그런데 얼마 후에 나를 놀라게 하는 일이 벌어진다. 준비를 끝낸 사수생은 이내 패딩 안에서 빠져나와 책상 앞에 앉는 게 아닌다. 사수생은 하루 사이 아주 눈에띠게 쇠약한 모습이긴 하나 끈질긴 어떤 힘이 그의 전신에서 면면히 솟아 나오고 있는 듯하다. 나는 완전히 안정을 잃고자습실 복도를 오락가락했다. 믿어지지 않는다. 거짓말이다. 어떤 대학이 사수생에게 저토록 소중하게 여겨진단 말인가. 아니, 사수생은 무슨 실없는 망상을 하고 있는 걸까. 나는 자습실에서 뛰쳐나왔다. 


[삼수를 건너는 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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