펭귄펭귄펭귄 [840588] · MS 2018 (수정됨) · 쪽지

2020-11-19 23:25: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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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능 도시락. Tx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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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국 현역은 이기는 거고 재수는 지는 거라는 현역 우위이구먼.” 

“현역 우위라기보다는 경제성 우위 아닐까. 재수가 얼마나 손해라는 것은 해 본 사람 아니라도 다 아는 사실 아냐? 학원보낼 때 봐. 기둥 하나씩 빼가던 건 옛날 얘기고 네 기둥을 다 빼가니 말야. 집 한 채 값은 우습게 든다지, 아마.” 

“설마.” 

“설마가 뭐야. 그야 학원비도 학원비 나름이긴 하지만 아무튼 의대에 가려는 사람이면 의대 등록금 값이, 서울대에 가려면 서울대 등록금 값만치는 들어야 재수 1년을 보내는 모양이니 경제제일주의 사회에서 손해가 내다보이는 게환영 못 받는 건 당연하잖아.” 

“아무렴, 인간의 가치라는 게 별거야, 돈을 얼마나 벌 수 있느냐는 출신 대학을 빼면 뭐 남을 게 있다구.” 

“어머머, 그건 너무했잖아요, 윤 선생님.” 

“뭐가 너무합니까. 탁 까놓고 말해서 우리가 일생 공부하고 추구하는 게 뭡니까. 이상? 학문적 완성? 자기 성취? 그건 다 그럴듯한 속임수고 실상은 명문대에 입학하는 거 아닙니까? 난 대학에 입학하고 편입까지 성공했습니다. 왠줄 아시죠? 처음 대학 가지고 학위 따봤댔자 기만하기도 어려울 것 같아서였죠.” 

“남의 경사에 와서 왜 언성들을 높이고 야단일까.” 

“놔둬 그것도 축하야. 절대로 미래가 보장 안 되는 재수를 안 해서 얼마나 다행이냐고 나이에 맞게 대학 가는 기쁨을 새삼스럽게 할 수 있잖아?” 

“정말 현역으로 가길 잘했어.” 

“재수하면 어쩔 뻔했니?” 

“합격이란 소리 들으니까 제일 먼저 떠오르는 생각이 다신 그 무서운 고생 안 해도 되겠다는 해방감이더라.” 

새내기가 응석이 섞인 소리로 말했다.


새로 대학생이 된 남자와 그의 친구가 여자들끼리처럼 서로 옆구리를 간지럽히며 킬킬댔다. 그제서야 비로소 내가 정작 위로하러 온 수험생도 잊고 팔려 있던 그들의 화제에 구역질 같은 혐오감을 느꼈다. 친구의 딸은 패딩을 머리끝까지 뒤집어쓰고 있었다. 늘 당당하고 쾌활한 태도에 어울리는 그녀의 자세를 알고 있는 나는 반쯤 패딩 속으로 파묻힌 것처럼 얄팍하게 위축된 모습에 가슴 찡한 연민을 느꼈다.


(중략)


“여보, 저 그릇 좀 봐요. 수능 도시락 했으면 좋겠네.”


나는 생뚱한 소리로 환성을 질렀다.

“수능 도시락?”

남편이 멍청하게 물었다.

“그래요, 수능 도시락이요.”

실로 오래간만에 기쁨과 평화와 삶에 대한 믿음이 샘물처럼 괴어 오는 걸 느꼈다. 


내가 첫 수능을 볼 때 어머니는 수능 날을 짚어 보고 목요일이구나, 좋을 때다, 곧 날이 추워지면서 한파가 찾아올테니, 하시더니 일부러 사람을 시켜 마트에서 수능 도시락을 구해 오게 했다.


“잘생기고, 여물게 굳고, 보온 잘 되는 도시락이어야 하네. 첫 수능 준비할 소중한 도시락이니까.”


이러면서 후한 값까지 미리 쳐주는 것이었다. 그럴 때의 그분은 너무 경건해 보여 나도 덩달아서 수능을 본다는 데 대한 경건한 기쁨을 느꼈었다. 이윽고 정말 잘생기고 정갈한 두 짝의 도시락이 당도했고, 어머니는 그걸 신령한 물건인 양 선반 위에 고이 모셔 놓았다. 또 손수 마트에 가 보얀 젖빛 보온병도 사다가 선반에 얹어 두었다. 그건 수능한파에 대비하는 물병이라고 했다.


나는 첫 수능을 망할 거라는 걸 알자 속으로 약간 켕겼다. 수험생을 둔 어머니가 흔히 그렇듯이 그분도 명문대생 딸을 기다렸음직하고 더구나 그분의 남다른 엄숙한 수능 준비는 서울대 의대에 갈 수재한테나 어울림직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분에게서 섭섭한 티 따위는 조금도 찾아볼 수 없었다. 그 잘생긴 수능 도시락에 밥과 국을 푸고 과일까지 담아 교문 앞에서 내게 쥐어 주시더니 정성껏 수능 대박을 기원하는 것이었다. 그런 그분의 모습이 어찌나 진지하고 아름답던지, 비로소 내가 수능을 봄에 황홀한 기쁨을 느낄 수가 있었고, 수능 결과가 어떻게 나올지는 몰라도 잘 볼 것 같다는 근자감이 들었다. 


재수학원에 등록하자 수능 도시락은 정결하게 말려서 다시 선반 위로 올라갔다. 다음 수능 때 쓰기 위해서였다. 다음에도 또 망했지만 그 희색이 만면하고도 경건한 의식은 조금도 생략되거나 소홀해지지 않았다. 다음에도, 그 다음에도 참담했다. 네 번째로 망하고는 학원에서 밤새도록 울었다. 담임 선생까지 나를 동정했고 나는 무엇보다도 어머니의 그 경건한 의식을 받은 면목이 없어서 눈물이 났다. 그러나 그분은 여전히 희색이 만면했고 경건했다. 다음에 비로소 잘 봤을 때도 더도 아니고 덜도 아닌 똑같은 영접을 받았을 뿐이었다. 


그분은 어디서 배운 바 없이, 또 스스로 노력한 바 없이도 저절로 꿈을 위한 젊음의 연소를 어떻게 대접해야 하는지를 알고 있는 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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