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탐교사 [892797] · MS 2019 · 쪽지

2019-07-12 14:25: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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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돌모의고사의 미숙한 선택지 7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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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번 선택지 

종교적 인간에게 세계는 존재의 다양한 양태로 드러난다. 엘리아데 O

문제는 

"존재의 다양한 양태로 드러난다" 

이게 무슨 말인가?

엘리아데가 말한 것은 종교적 인간에게 세계는 존재의 다양한 (성스러움)의 양태로 드러난다.로 표현해야 한다. 聖자가 빠졌다.

종교적 인간이든 비종교적 인간이든

주어가 무엇이이든 너무나 당연한 소리로서 무조건 답이된다.

 즉 ‘세계는 존재의 다양한 양태로 드러난다.’라는 표현은 엘리아데의 특징이 아니라

누구나 쓸 수 있는 말이다.


가장 중요한 사실은 성이란 ‘나타난다’라는 것이다. 세상은 온갖 사물들과 일상적인 것들로 충만해 있다. 그러나 어느 예기치 않은 장소, 사물, 시간 속에서 특별한 의미를 가진 어떤 것, 즉 비범하고 초월적인 새로운 현상이 나타난다. 흔한 보리수 나무가 부처가 득도한 후 지혜의 상징이 되고, 평범하던 요단 강이 예수의 침례 이후 생명의 강이 된다. 엘리아데가 ‘聖顯’(hierophany)이라고 부르는 성스러움이 나타나는 현상이야말로 ‘성’의 가장 본질적인 모습이다. 그러나 거룩함은 언제나 세속적인 것과 긴장을 유지한다. 곧 성속의 변증법 혹은 성속의 역설성이 바로 그것이다. 인간의 삶이 근원적으로 성과 속의 이중구조를 가진다는 사실의 확인이 성을 이해하는 지름길이다. 균질적인 것과 비균질적인 것, 존재와 비존재, 의미와 무의미의 이중적 구조 속에서 성은 언제나 자신을 역동적으로 새롭게 나타낸다. 성속의 근원적 이중구조에 대한 이해에 의거하여 엘리아데는 성스러운 시간, 공간, 물체 등 여러 가지 성현의 의미를 분석하는 종교현상학을 완성하였다.

출처 : 교수신문(http://www.kyosu.net)

성스러운 돌, 성스러운 나무는 단순히 돌이나 나무로서 숭배되는 것이 아니다. 우리가 그것을 숭배하는 것은 그것이 ‘성현(聖顯)’이기 때문이며 돌이나 나무가 아니라 성스러운 것, 전혀 다른 어떤 것을 나타내기 때문이다. 이처럼 세계는 그것을 초월하는 거룩함을 드러낸다



우리는 나무를 단지 나무로 보면서도 동시에 나무 이상의 나무로 보기도 한다. 앞의 나무는 우리가 일상적으로 경험하는 나무로 속(俗)에 속하며, 뒤의 나무는 독특한 경험을 통해서만 드러나는 나무로 성(聖)에 속한다. 초자연적인 것은 자연적인 것과 불가분의 관계에 있으며, 세계는 그것을 초월 하는 어떤 것을 드러낸다.  따라서 인간이 느끼고, 접촉하고, 사랑한 모든 것은 ‘성(聖)의 드러남’이 될 수 있다. [2014년 9월]


위의 그림이 성현이다.




                                 

위의 그림은  존재의 다양한 양태이다. 


 누가 말하든 답이 된다. 

즉  엘리아데를 묻는 문제로서 가치가 없는 선택지이다. 

 7월 교육청에도 

종교적 인간에게 세계는 존재의 다양한 양태로 드러난다. 가 아니라

다양한 성의 양태를 현현한다로 제시문에 나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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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사탐교사 · 892797 · 19/07/12 14:40 · MS 2019

    문제를 올릴 수 없는 점 이해 바랍니다. 문제를 올릴 경우 현돌님이 저작권침해로 블라인드 처리를 요구하고 있습니다. 자신은 타인의 문제에 오류제기 할때 복사해 놓고 심지어 동영상 까지, 왜 이러는지 이해할 수없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