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전취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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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무전취식, 도주해도 무죄?
택시를 타는 이유는 편안해서다. 손잡이를 잡고 서서 갈 필요도, 사람들끼리 불쾌한 체취를 맡아가며 서로 이낑대지 않아도 된다. 그런데 묘하게 불편할 때가 있다. 라디오를 크게 틀고 갈 때이다.
보통은 좋게 말한다. "실례지만, 음악소리가 너무 커서 그런데 좀 꺼주시면 안 될까요?"라고 말하면 불쾌하다는 듯 소리를 줄이는 경우가 제법 있다. 투박한 오른손으로 음악을 지휘하는 검은 동그라미를 왼쪽으로 살짝 돌려놓아도, 내 귀는 편안하지 않다. 꺼달라 했는데 줄여놓은 터라 시끄러운 록음악이 공포영화마냥 조용하게 들리니 더 거슬린다. 이 때부터 긴장은 시작된다. 한 번 더 말하면 불쾌해하실 것 같은데 이걸 참으려니 내가 고통스럽다. 어느새부턴가 나는 지하철보다 더 불편하고 긴장된 상태로 택시를 이용하고 있었다.
문제는 동승했을 때다. 실제보다 나이스하게 보일 필요가 있다면 저런 볼륨따위 대범하게 넘어가야 한다. 그래서 친구 더군다나 그 친구의 성별이 여자일 때는 좀 더 침착해야 한다. 아비샤이 마갈릿 교수의 말대로 정의롭기보다 품위있고 싶다.
이런 나조차도 품위를 추구하기 어려운 경우가 있다. 바로 음식을 계산할 때다. 예전에 일본에 여행갔다 분명 7만원어치 먹었는데 12만원을 계산하여 분노로 잠을 못 이룬 기억은 나로 하여금 항상 영수증을 확인하게 했다. 어려서부터 암산을 좋아했던 것도 한몫했다. 여러 메뉴와 음료가 쏟아져나오는 고깃집, 술집에서도 항상 계산만은 정확하게 했다.
여러 메뉴를 시키는 고깃집이나 안주 파티인 술집에서 그는 타고난 버릇으로 계산이 원래가격보다 더 되면 바로 지적한다. 그 지적을 들은 점원은 당황하며 쉬이 수긍하고 그는 당당히 가게를 나온다. 문제는, 그 옆에서 지켜보는 이성(소개팅 혹은 애인)도 좋아하냐는 것이다. 돈 1000원 더 나왔다고 이를 지적하여 당당히 1000원을 돌려받는 그 자기권리 실현의 모습이 왜 안멋있어보이는지 의문이나, 딱히 폼은 나지 않는다고 한다.
여하튼 계산시 자동분개모드로 살아보니, 의외로 헛점이 많았다. 어느 집은 막판에 시킨 제로콜라값을 빼먹었고 어느 집은 시키지도 않은 차돌박이 1인분을 더했다. 이 경우 그 자리에서 말하면 문제는 평화롭게 해결된다. 내가 돈을 더 내는 경우에는 남모를 존경을 받는 기분마저 든다.
그런데 그 차액이 소액이면 말하기가 좀 그렇다. 어느 술집의 경우 단돈 200원을 더 받았는데 말하려니 내 옆의 후배가 나를 이상하게 볼 것만 같았고 안 말하려니 내 원칙이 흔들렸다. 아냐 이게 아닌데 왜 난 자꾸 이런 걸 말하려 할까.
이런 경우도 있다. 그러니까, 3만원이 나와야 하는데 가게측 실수로 계산을 2만 5천원만 하게 된 상황. 이 경우 5만원권 지폐를 쓰면 2만 5천원을 돌려받을 것이다. 5천원이 생긴 것이다. 이게 웬 횡재냐 하는 순간 정말로 횡재가 됨을 우리는 알아야 한다. 법원은 이를 사기죄라 한다. 이게 왜 사기지? 의문이 드는데 거스름돈 더 받는 걸 알고도 챙기는 순간 상대를 기망했다는 것이 판례의 입장이다. 사기 범죄는 상대를 속여 착오에 빠지게 한 다음 그 착오에 기하여 재물의 교부를 받는 것일진대 왜 이게 사기지? 고개가 갸우뚱해진다.
그렇다면 거스름돈 받을 때는 몰랐는데 집에 가서 지갑을 확인해보니 더 받았음을 알고 챙긴 경우는 어떨까. 이 경우 점유이탈물횡령죄가 된다. 점유이탈물이라 함은 점유자의 의사에 의하지 아니하고 그 점유를 이탈한 물건을 지칭하는 것인데 이 경우 가게 주인이 어찌됐건 준 것 아닌가? 그럼에도 당신은 점유이탈물횡령죄라는 것이 판례의 입장이다.
계속해서 갸우뚱해지는데 목운동이 되니 좋긴 좋다.
마지막으로, 오랜만에 애인과 분위기를 내러 값비싼 식당서 식사를 했는데 그만 지갑을 집에 놓고 와서 도주한 경우는 어떨까? 전술한 사례중 가장 질나쁜 이 케이스를 정작 형법은 처벌하지 않는다. 오직 경범죄처벌법에만 걸릴 뿐이다.
정리하면, 거스름돈을 더 받았는데 받을 당시 알고도 안 돌려주면 사기범, 집에 가서 알았는데 안 돌려주면 횡령범이 되지만 무전취식하고 도주한 경우는 특별한 경우를 제외하고는 형사처벌없이 범칙금 납부로 끝나게 되는 것이다. 거스름돈 받을 당시 원래 받을 금액보다 더 받는 것을 알았다면 신의칙상 고지의무가 있다고 하는데 이를 민사상 채무 발생과는 별도로 형사처벌을 할 필요가 있는지는 의문이다. 무전취식이야말로 먹고 나서 돈이 없으면 신분과 연락처라도 밝혀야 할 신의칙상 의무가 있는 것 아닐까? 법은 절대로 현실을 다 반영하지 않는다. 대부분은 반영하여 만들어졌고 그에 따라 잘 녹아들지만 현실과 법의 간극이 클 경우 법이론은 작위적으로 사실관계에 개입하여 결론을 뒤바꾼다. 이런 사회는 정의롭지도 않지만 품위는 더 없다.
신의칙은 마법의 단어다. 다만 그 마법에 에먼 서민들은 자신들도 모르는 고즈넉한 법리의 세계로 무작위로 빨려들어가 누군가는 별탈없이 벗어나고 누군가는 사기범이 된다. 이제 이런 기준을 일별할 신의칙상 의무가 발생하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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