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aSenia [10538] · 쪽지

2004-07-23 23:35: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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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oaring toward the future -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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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학 중에 너무나 심심하여, ‘그래 할 짓도 없는데 수기나 써보자!’라는 마음으로 글을 쓰게 되었다. 사실 필자(-_-?)의 수험생활에는 재수 혹은 삼수라든가, 급격한 성적 상승 또는 하락과 같은 극적인 사건이 없는 고로 매우 평범한 내용이 될 전망이다 -_ㅜ 다만 읽어주실 때 ‘이 사람 수험생활 하며 이렇게 살았군.’이라는 마음으로 가볍게 읽어주었으면 한다.


중학교 시절 별 생각 없이 살았던 나는 학교 수업시간에 필기 대충 하고 노가리까고, 학원 갔다가 숙제 내팽개치고(제길 학원 선생의 청테이프 줄줄 감긴 각목이 아직도 생생하다!) 한 시간 1800원 하는 PC방에서 스타를 즐기던 -_-)y-~oO 평범한 학생이었다. 아마 그 때 많이들 그랬으리라 생각한다. 그리고 내신시험 10일 전쯤이면 슬슬 바빠지는 것이다. 소위 전교 순위권 학생에게 필기 빌리랴, 선생님들이 흘리는 힌트 받아먹으랴, 그렇게 전쟁 치르듯이 시험을 치르고 나면 다시 일상으로 돌아왔다. 1학년 때부터 3학년 초까지 내 성적은 350명에 달하는 정원에서 항상 25-30등 사이를 지켰다.

당시 내 취미는 판타지 소설 탐독이었다. 초창기였기 때문에 지금 수많은 종류의 판타지 소설들 중에서 옥석을 가리기가 어려운 것과는 달리 꽤 읽을만한 책들이었다. 집 근처에 있던 책방 판타지 코너를 거의 싹쓸이하다시피 했었는데, 활자공해도 조금 있었지만 그렇게라도 독서량을 채운 것이 훗날 보탬이 되었던 것 같다. 그 때는 내가 톨킨이 되겠다! 라는 야망에 불타 새로운 세계관을 구축하려고까지 했었다 푸하핫. 아무튼 시험기간을 제외하고는 공부는 늘 뒷전이었다. 시험기간에 그나마 공부를 한 것도, 따지고 보면 나의 진정한 의지라기보다는 어머니의 다그침과 나의 마지막 자존심 비슷한 감정 때문이었던 것 같다.

생각해보면, 그 때 내가 정신을 차리고 정말 열심히 했다면, 그래서 시험 성적이 순위권이었다면 내 진로와 인생은 완전히 바뀌었을지도 모르겠다. 이런 것에는 확실히 운명이라는 말이 어울린다. 당시 대입에 대한 감각이 전혀 없던 나는 어릴 적부터 막연히 가졌던 꿈, 과학자가 되기 위해 과학고를 지망했었다. 물론 앞서 말했던 성적으로 지원가능할리 만무했다.

당시 부모님도, 나도 다른 아이들이 전부 학원에 가니까, 라고 생각해서 학원에 다니게 되었다. 그 지역에서는 나름대로 큰 기업형 학원이었다. 아무 생각없이 살다가 경시반 모집이라고 해서 시험을 쳤다. 당시 1, 2 두 개의 반을 모집했었는데 어처구니없이 1반 꼴지로 경시반에 들어가게 되었다. 진도는 빨랐고 아이들은 열심이었다. 나는 생전 처음 보는 이차방정식에서 소위 크로스 풀이법이라고 했던 그 풀이가 도저히 이해가 되지 않았다. 결국 견디지 못하고 나왔다. 나와 함께 숙제를 하지 않고 스타를 하며 놀던 몇몇 아이들도 몇 개월 못버티고 나왔다는 소식을 들었다. 현실도피였다. 하지만 전혀 분하지 않았다. 지금 생각하면 한심한 나의 모습이다.

아무튼 중학교 3학년에 이르러 현실을 조금이나마 깨닫고, 처음으로 평상시에도 ‘노력’ 혹은 ‘집중’이라는 것을 하기 시작했다. 성적이 급격하게 오르지는 않았지만, 마지막 시험인 2학기 기말고사에서 홀로 열심히 노력한 결과 전교 2등이라는 성적을 받았다(당시 이 시험은 사실상 대부분의 학생들이 인문계 혹은 실업계 고등학교 진학을 결정지은 상황에서 다들 노는 분위기였다 -_-a). 아무튼 흐뭇했다. 하지만 아직 제정신을 차리지는 못했다. 중2 때부터 계속 동네 보습학원을 다니고 있었는데, 당시 정석 유제와 연습문제를 숙제로 냈었다. 이걸 뒤에 있는 해설과 유제풀이집-_-을 참고해서 거의 그대로 쓰다시피 했었다. 덕분에 나는 고등학교 3학년 말까지 수학의 악몽에 시달리게 되었다.

3학년 때 조금 선전했던 영향이었는지 4.xx%라는 내신 성적이 나왔다. 과학고는 이미 멀어진지 오래였고, 특수목적고 중에서는 국제고등학교나 외국어고등학교에 지원할 자격이 있었다(물론 합격과는 별개의 문제였다). 당시 외국 체류 경험이 있었던 나는 국제고에 지원할 경우 합격 가능성이 있었다. 그러나 그 때까지 과학자의 꿈에 푹 빠져있던 나는 그냥 가까운 일반고에 지원했고, 배정은 나의 바람대로 되었다. 그 고등학교는 男고였다.

배치고사를 치르는 날. 당일 어머니가 ‘고등학교에서 처음 치는 이 시험 성적이 너의 대학 목표를 좌우할 것이다’라는 말씀을 하셔서 꽤 열심히 문제를 풀었던 기억이 난다.

겨울방학 때 이전에 비해서 많은 공부를 하기는 했지만, 중학교 시절 단 한번을 제외하고는 10등 안에 들어본 기억이 없기 때문에 큰 기대를 걸지는 않았다. 그리고 당시 \'고등학교 등수는 중학교 등수*2\'라는 괴담이 학부모들 사이에서 유행하고 있었다. 그 공식에 따르면 내 등수는 40~60등이 되어야 했다 -_-


결과는 전교 7등. 소문은 역시 소문일 뿐. 느낌이 좋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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