레이븐4Answer [592707] · MS 2015 (수정됨) · 쪽지

2017-05-22 08:33: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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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소 19)6평 기념 나의 사우나썰.tx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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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년 6월, 다니던 학교를 때려치우고 반수반 개강을 기다리며 방배동에서 홀로 수능준비를 하던 때의 이야기이다.


다시 공부를 시작한지 얼마 되지 않았던 나는 당시 6월 모평에서 어메이징한 성적을 받고 도취되어 있었다. 참된 죄수생이라면 지난 해의 실패를 곱씹으며 바로 독서실에 틀어박혀 시험지 분석을 해야 마땅할 것이나, 그날의 날씨는 너무나도 따스했고 시험을 보고 광화문까지 걸어가며 만끽한 초여름의 온기 앞에 굳은 의지는 너무나도 쉽게 녹아 무너지고 말았다.


나는 결국 핸드폰을 들어 안산에서 공부하던 아는 동생을 부르게 되었다. 인터넷 카페에서 어쩌다 만나게 되어 급격히 친해지게된 이 친구도 고향에서 상경해 고독한 싸움을 하고 있던터라 6평 이후 나의 일탈 제의에 흔쾌히 방배동으로 걸음을 옮겼다.


그렇게 방배동 고기뷔페집에서 만나 고기를 먹던 둘, 인생 은 쓰고 후레쉬는 달다는 다분히 중2병 돋는 말을 해대며 한병 두병 술을 비워갔다. 정상적인 수험생이라면 거기까지만 해도 자신을 자책하며 내일을 기약할 것이나, 우리는 오랜 기간 지속된 수험생활의 염증을 토해내느라 끝낼 생각을 안했고, 급기야 알코올로 마비된 두뇌는 2차를 외치고야 마는 것이었다.


그렇게 정신을 차려보니 시간은 어느덧 12시 반, 그 친구와 함께 방배역에 비틀거리며 달려갔을땐 이미 셔터가 내려간 뒤였다.


나는 이 친구를 우리 고시원에 재울까도 생각해 봤지만, 공간이 좁기도 좁은데다, 남자층에 방이 없는 관계로 내 방은 여자층에 있었다. 생각만 해도 뻔한 결말이 만취한 머리 속에도 그려지기 시작했다. 여자층에 꼽사리끼는 남자가 외부인까지 데려온다? 이건 그냥 경찰서 체험하겠다는 소리나 매한가지였다.


고심 끝에 우리는 방배역 근처 사우나로 향하게 되었다. 처음 딱 들어갔을 때, 가격에 나는 먼저 입이 따악 벌어졌다. 1인당 현금가 13000원, 생각해보면 말도 안되는 가격이었으나 찬밥 더운밥 가릴 처지가 아니었다. 무엇보다 술 취한 상태로 피씨방 의자에서 쓰려져 자기는 싫었으니까. 우리는 울며 겨자먹기로 그 돈을 다 내고 옷을 받았다.


그 사우나는 가격에 맞지 않게 시설은 굉장히 허름했다. 동네 5,6000원 목욕탕 수준이랄까. 그래도 어쩌랴. 일단 돈을 내고 들어왔으니 세개 정도 있는 탕을 다 돌고 사우나까지 하며 에탄올에 찌들은 땀을 빼고 우리는 잘 준비를 했다.


사우나 수면실은 그나마 시설이 나쁘지 않아 다행이었다. 성인 남자 한명 정도 들어갈 토굴이 몇개 있었고, 게다가 안에는 우리 말고 사람도 별로 없어서 기분좋게 토굴 하나씩 맡아 잠을 청했다.


그렇게 잠이 든 찰나의 시간, 누군가가 나를 흔들어 깨웠다.


"형 일어나 빨리 나와봐"

"뭐야, 나 늦잠잔거야?"

부모님한테는 집 안가고 방에서 시험지 분석한다 구라치고 논 터라, 내가 일어난 즉시 한 걱정은 늦잠을 자서 가족의 전화를 못받지는 않았을까 하는 것이었다. 당시 아버지 성격상 홀로 내놓은 자식 걱정에 여기저기 수소문 하시고도 남았으니까.

"아니 일단 나와봐 좀"

눈을 비볐을 때 흐릿하게나마 친구의 창백해진 얼굴이 보였다. 그 얼굴을 보고 일이 뭔가 잘못되었음을 직감했다. 나는 비틀거리며 수면층을 나왔다.


"뭔 일인데?"

"아니 일단 옷입고 나가자 우리"

당시 시간은 새벽 두시 반이었고 나는 짜증이 나기 시작했다.

"아니 뭔 개 쌉소리를 하는거야 좀 자자 한두푼 내고 온것도 아니고"

"아니 형 일단 나가서 얘기해"

나는 영문도 모른채 옷을 주섬주섬 챙겨입고 사우나 밖으로 나갔고, 그 친구는 주인하고 뭔가 심각하게 이야기를 하더니 이내 나를 따라 나왔다.

"돈 존나 아깝네. 왜그러는거야 대체"

그 친구는 굉장히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형 일단 카페는 다 닫았을 테니까 형 자주 간다는 피씨방 가서 얘기해"

나는 그렇게 친구 손에 이끌려 피씨방에 갔고, 해장으로 너구리 하나씩 시켜 이유를 듣게 되었다.


일은 이러했다. 우리가 자기 전 수면방을 돌아다니던 남자가 하나 있었는데, 친구가 잠들고 얼마 뒤 꼼지락거리는 느낌에 깨어보니 그 남자가 자기 옆에 비집고 들어와 있더란다. 놀라서 당신 뭐냐고 하니 몸을 더듬거리며 'ㅇㄹ 해드릴까요'라고 하길래 온 몸의 털애기가 가득 선 친구는 무의식적으로 그 남자를 밀쳐내고 수면층을 뛰어 내려왔다. 그리고 숨을 가다듬고 생각해 보니 나를 놓고 나왔고, 다시 수면층에 가봤을땐 그 남자가 곤히 곯아떨어져 있던 나를 사냥감을 보는 눈빛으로 보고 있었단다. 그래서 급히 그 남자를 밀치고 나도 데리고 나온 것이라고.


자초지종을 다 들은 나는 취기가 싹 가시는 것을 느꼈다. 세상 어느 숙취 해소법보다 더 빨리 묵은 술기운이 다 사라졌던거 같다.


"이거 신고해야 하는거 아냐?"

"주인하고 얘기해 봤는데 막무가내 였어. 게다가 누군지 얼굴도 모르고 나도 폭행죄로 걸려들수 있어서"

"허 참..."

"게다가 우리 부모님 몰래 나온거잖아. 경찰조사라도 받으면 ㅈ된다니까"

"그건 그렇지...."

"걍 형 똥밟았다 생각하고 묻자"


한참을 곰곰히 생각하던 나도 마지못해 그러자고 했고, 그렇게 우리는 첫차 시간까지 지난밤 본 인외마경을 생각하며 오돌오돌 떨다가 각자의 방으로 들어갔다.


그렇게 몇달, 반수반 일정따라 가랴 논술보랴 눈코뜰새 없이 바쁜 나날이 지속되었고 그 사우나는 기억 속에서 잊혀져갔다.


그러던 어느날, 대학에 붙고 우연히 여행갔던 곳 술집에서 합석한 남자들에 의해 그 기억은 다시 수면 위로 나오게 된다.


어쩌다 이태원 이야기가 나오게 되고 자연히 우리는 이태원의 트렌즈젠더 클럽과 게이사우나에 대해 이야기가 나오게 되었는데, 그때 나도 그 썰을 풀었다.


"혹시 가셨다는 데가 XX사우나 아닌가요?"

"네 거기 맞아요."

"진짜 다행이네요"

남자는 초면임에도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거기 유명한가요?"

"검색해보세요"


그 사우나의 이름을 검색했을 때 꽤 많은 결과가 떴는데, 요약하자면 그곳은 서울 5대 게이 집결소에, 나 말고도 봉변을 당할뻔한 사람들의 썰들이 많았다. 그제서야 나는 잊고 있던 그 사우나에 대한 의문이 풀렸다. 왜 시설에 맞지 않게 비쌌는지, 왜 굳이 '남성전용'을 표방했는지, 왜 그곳 주인의 반응이 시큰둥했는지....


이후 나는 타지에서 자게 될 때 사우나가 우선 남성전용이 아닌지 보고 꼭 이름까지 검색해 보는 습관이 생기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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