갈아만든개 [275280] · MS 2009 · 쪽지

2010-11-27 16:54: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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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에 알려지지 않은 격침, 한국 공군의 간첩 격침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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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예전에 썻던 글인데 한번 끌어올려봅니다.


* 북한도발특집






* '세계에서~' 101번째 이야기 : <세계에 알려지지 않은 격침, 한국 공군의 간첩 격침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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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산전쟁기념관 기록화 - 실제로는 로켓탄 수십발을 동시에 발사하였다





전쟁 전 : 10만여명전쟁 후 : 70만여명
……6.25 전쟁이전과 전쟁 이후 한국군의 군 변화수
북한의 대남첩보원 발각횟수 : 5,500여회 (1953년~1980년)
한국군경에게 잡히거나 사살된 사람 : 2,973명 (1953년~1980년)
남북간 첫 대화 : 1972년






특히 북한이 남한에 격심한 도발을 해온 년도는 월남전이 한창이던 1965년부터
남북간의 첫 대화가 이루어지는 1972년 사이에 빈번하게 이루어졌다.
지금은 상황이 역전되었지만 당시 북한은 살기 띈 도발을 남한에 해왔다고 한다.
당시 남한에서는 '잘살아보세' 라고 하며 가난에서 벗어나고자 노력했지만
휴전선에서는 제 2의 한국전쟁이라 불릴 정도로
육군, 해군, 경찰 나아가 예비군까지 생사를 건 전투를 해야했다.

이 시기동안 특히 한국공군은 여러번 출격하여 간첩선을 격침시키는 한편
쌍발 수송기 한 기를 중무장한 상대 북한 간첩선에게 격추당하는 피해도 입었다.
즉, 공군도 가만히 관망하고 있지는 않았다는 사실이다.
어쨌든 이 공군의 활약 속에서 주된 역할을 한 전투기가 있는데 그것이 F-5A 자유투사기(Freedom Fighter)였다.





▲ 당시 최첨단이었던 미국 노스롭사의 F-5A




여기서는 F-5A 기의 치열했던 전투의 흔적을 알아보고자 한다.






1. 1969년 흑산도 간첩선 격침



1969년 흑산도로 들어오던 79톤급의 대형 무장 간첩선이 발각되었다.
이 간첩선은 간첩 김용규를 북한으로 귀환시키기 위해 다른 배와 접선하던 중
미리 첩보를 받고 대기하던 F-5A 기가 야간 조명탄 아래로 공격을 실시한다.
정통으로 명중한 이 미사일로 인해 다음날 7명의 시신이 배 위에서 발견되었고
해군과의 대대적인 합동작전을 통해 흑산도 예리의 한 바닷가 동굴에서 6명을 발견, 모두 사살한다.

15명중 7명은 바다에서, 6명은 육지에서 사살되고 나머지 2명은 바다에 익사한 것으로 결론지었다.

당시 간첩선에는 82mm 무반동포 1문, 40mm 기관포 4문, 14.5mm 쌍신 기관총 2정으로
왠만한 해군 전투함 수준의 무장을 갖추고 있었다.
이 간첩선은 격침당하기 이틀전인 1969년 6월 9일, 해안초소와 교전이 발생하였을때
82mm 무반동포 1문을 발사하였는데 이 중 한발이 삼척산업 이대운씨 집에 명중하여 일가족 5명이 즉사한 사건이 있었다.







▲ 82mm 무반동포




2. 격렬비열도 간첩선 격침



1967년 4월 17일, 새벽 4시 20분 해군 52함은 30노트로 달리는 간첩선을 발견한다.
하지만 이 52함은 속도에서 밀려 추적불능상태가 되었고 급히 인근 63함에 연락을 취한다.
긴급교신을 받은 63함은 간첩선의 진로를 막으며 정지명령을 내렸지만 이 간첩선은 계속해서 도주를 한다.
당시 30노트 이상의 함정은 소수의 구축함 빼고는 없었던 해군은 공군에 급히 지원요청을 하고
이때 수원기지에서 안상진 대위의 F-5A 기를 편도로 간첩선을 추격하기 시작한다.

그는 간첩선의 대공사격을 제압하기 위하여 급강하하며 20mm 기관포와 2.75인치 로켓탄 19발을 발사한다.
하지만 간첩선들은 대공포로 맞대응했고 그 중 한발이 동체에 명중시켰다.
하지만 후속 F-5A 기의 로켓탄 공격으로 간첩선은 불길에 휩싸였고 간첩들은 바다로 뛰어내렸다.
간첩들을 해군이 잡은 결과 15명중 9명은 격침 시 사망한 것으로 보이고 6명은 부상을 입은채 해군에게 잡혔다.
이 기록은 많이 알려지지는 않았지만 F-5A 최초의 출격기록으로 남아있다.






▲ 위의 미사일이 2.75인치 로켓탄, 밑의 미사일이 20mm 탄.




3. 흑산도 간첩선 격침



1969년 10월 23일 오후 9시 30분, 소흑산도에서 20여명의 간첩을 태우고 33노트로 달리던 간첩선이 보고된다.
이 간첩선은 (후의 조사결과) 한국해군이 30노트 이상 달리는 함정이 별로 없는 것을 알고 놀리기 위해 달렸으나
당시 가장 빠른 충무함(시속 35노트)에 발각된다.

당시 가난했던 한국해군에게 북한 간첩선을 잡을 수 있는 유일한 격침선이라 보물처럼 아끼고 있었는데
이 간첩선이 충무함에게 걸린 것이다.

쫓고 쫓기는 추격을 하며 섬 사이에 숨어있던 간첩선은 도주와 정선을 반복하다가 새벽 1시 20분
한국어선들이 모여있는 추자도까지 숨어들어갔으나 이미 충무함의 지원요청에 의해 출격한 F-5A 기의 공격에 의해
시속 8노트까지 떨어진 상태였고 충무호가 마지막 사격으로 격침된다.
조사결과 이 간첩선은 최고속력 40노트에 달했으며 간첩선중 최대 속력을 기록하고 있다.





▲ 1963년 도입된 충무함, 플레쳐급이라고 한다.





4. 소흑산도 근해 간첩선 격침



1971년 6월 1일, 새벽 2시 25분. 추자도 근해에서 해군은 간첩선 한 척을 발견한다.
하지만 안개가 끼여있고 기상이 매우 악화된 상황이어서 수색에 애를 먹고 있다가
공군에게 지원을 요청하여 C-46 수송기의 조명탄 투하로 힘겹게 추적하고 있었다.

당시 안개가 많이 껴있어서 조명탄 투하를 위해 목표물에 근접하게 있어야 했는데
간첩선을 이를 노리고 직상공하는 수송기를 놓치지 않고 대공사격을 실시한다.
간첩선에서 사용하던 대공화기는 14.5mm 쌍신기관총 이었는데
이 대공사격에 의해 C-46 수송기는 피습되어 안에 타고 있던 승무원 6명 전원이 사망한다.





▲ 14.5mm 대공기관총, 사진은 4문짜리 기관총이지만 당시 북한 간첩선은 2문짜리를 사용했다.






▲ 당시 격추되었던 C-46 수송기



이렇게 대공사격후 다시 도주를 시도하던 간첩선은 새벽 4시 40분, 급히 출격한 F-5A 기에 의해 로케트 폭격을 실시하고
새벽 6시 15분 완전격침시킨다.
조사결과 이 간첩선은 간첩 성낙오를 남한테 침투시키는 임무를 마치고 돌아가던 길이었다.

이 외에도 경북 영덕해안 간첩선 격침, 묵호 앞바다 격침등의 임무수행에서
F-5A 기는 제역할을 해냈다.
당시 한국해군보다 빠른 쾌속선을 가진 북한의 간첩선을 잡기위해 해군은 공군과 연합작전을 펼치는 경우가 많았는데
이러한 협동작전을 통하여 한국공군은 19번의 대간첩선 격전을 실시하여
간첩선을 11번을 격침시키는 위력을 발휘한다.

한편, 북한의 간첩선들은 이후 한국이 간첩선 격침 전문인 PK정을 대폭 증강하자
그 숫자를 급격히 축소해 나가다가 반잠수정 침투로 작전을 변경한뒤 결국 잠수함 침투를 마지막으로
현재까지 이어져 오고 있다.






▲ 전쟁기념관에 있는 북한 반잠수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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