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삽 [471209] · MS 2013 · 쪽지

2016-09-17 19:46:17
조회수 1,164

[#21759번째 포효] #21116번째 포효에 이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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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759번째포효

사실, 내가 기억나냐는 문자를 보내고 그 다음날 바로 누나를 만났었다. 예상치 못하게 많은 사람들이 내 글을 읽어줘서, 그만치의 반응을 위해 글을 다듬어야 되는게 아닌가 고민했다. 하지만 그 때 누날 그리며 쓴 글은 감정에게 펜을 쥐여주고 나온 것이기 때문에 그런 건 제쳐두기로 했다. 난 그 날 검정 슬랙스에, 흰 티에, 검정 가디건에, 아이보리색 탐스를 신고 나갔다. 친하게 지냈던 여자애들과 옷 꽤나 입는다는 친구들에게 모조리 연락을 돌린 결과였다. 향수도 고민했다. 하나는 남성미가 짙은 향, 하나는 포근한 섬유 유연제 같은 향이었다. 대부분이 후자를 추천했지만 향수만큼은 내 뜻대로 전자를 골랐다. 혹시라도 누나가 날 그저 동생으로만, 후배로만 보지 않을까 걱정했기 때문이었다. 내가 누나의 샴푸냄새에 껌벅 적셔졌듯 누나도 비슷하길 바랬다. 연락은 그닥 많이 주고받지 않았다. 반갑다는 말, 연락이 없어서 걱정도 했고 괘씸했다는 말을 제쳐놓고 약속을 잡았다. 내가 알지 못했던 누나에 대한 말들은, 카카오톡의 글자로 보기 보단 나에게 수학문제를 설명해주던 그 유자차같은 목소리로 듣고 싶었기 때문이다.

우리는 제2롯데월드에서 만났다. 그 전 날 잠을 설쳤다. 내가 좋아하는 영화의 내레이션처럼, 변해버린 나를 보고 누나가 실망할까봐, 혹은 변해버린 누나를 보고 내가 실망할까봐 같이 시시한 일들을 걱정했기 때문이다. 계속 해서 옷 매무새를 가다듬고, 향수향이 적당한지 체크하는 사이 약속 장소에 도착했다. 10분정도 일찍 도착한 탓에, 난 계속해서 내 마음을 진정시켜야 했다. 발걸음 소리 하나하나가 누나를 닮은 것 같아 계속해서 두리번거렸기 때문이다. 5분뒤, 누나는 느닷없이 내 팔을 톡톡치며 인사했다. 봄의 벚꽃은 느닷없이 하루 밤 사이에 활짝 만개한다. 누나가 그날 입은건 하얀 테니스스커트여서 그 생각이 더 났는지도 모른다. 키가 더 컸냐며 까치발을 하고 키를 대보는 누나를 안아도 되냐 묻고 싶은 걸 참았던 건 비밀로 하고, 밥을 먹으러 갔다. 그냥 뻔한걸 먹었다. 파스타와 피자. 사실 밥을 먹는동안 누나는 별 말이 없었다. 맛있다는 말, 피자의 치즈가 고소하다는 말들을 제외하면 우리가 나눈 말은 거의 없었다. 속으로 얼마나 허탈했는지 모른다. 괜히 만나자 했나, 그냥 Y대를 갈 걸 그랬나, 오늘 오는 길에 유자차를 듣지 말 걸 그랬나, 2학기에도 신청한 이과캠의 강의를 조용히 듣다가 운명처럼 마주쳤어야 하나. 그날 누나는 맛있는 점심을 먹었다 했지만 난 아니었다. 계산서를 들고 나서는 참에 누나는 휙 계산서를 뺏어가더니 카드를 꺼내 계산했다. 순간 당황했다. 내가 예상한건, 내가 밥을 산 뒤 커피를 사라고 말을 건네는 지루한 방식이었는데 그게 무산됐기 때문이다. 다행히 누나는 자기가 밥을 샀으니 커피를 사라며 카페를 가자고 해줬다. Y대를 갈 걸 그랬나 하는 생각은 그 이후로 단 한 번도 하지 않았다.

카페에 앉은 뒤 누나 치마 위에 내 가디건을 덮어줬다. 치마는 예뻤지만, 다리가 좀 드러난 모양새는 밉고 불안했다. 누나는 매너가 좋다며 입을 가리고 웃었다. 그러고 나서 우린 정신없이 3시간정도를 얘기했다. 나중에 안 사실이지만 누난 밥을 먹을 때 얘기를 거의 안한다고 했다. 내가 고대에 갔다고 하자 왜 그걸 지금 말했냐며 내 손등을 살짝 때렸다. 그 이유는 간단하다. 그 말을 듣고 놀랄 누나의 모습은, 내가 고대 합격증을 받아든 후 하루도 빼놓지 않고 그렸던 것이기 때문이다. 가끔은 꿈에도 나왔지만, 실제로 본 누나의 놀란 모습은 역시나 훨씬 아름다웠다. 누난 이 날 나에게 대답할 수 없는 몇가지 질문을 했다. 왜 고대에 온거야? 왜 이렇게 늦게 말해준거야? 왜 소개팅이랑 미팅을 한 번도 안 나갔다는거야? 왜 굳이 이과캠 강의를 듣는거야? 이 4문제의 정답은 모두 내 앞에 있었다. 다만 너무 떨리고 부끄러워 대답할 수는 없었다. 그냥 얼버무리고, 누나에게 가장 묻고 싶었던 걸 물었다. 혹시 누나는 그럼 남자친구가 있냐고. 아메리카노와 카페라떼 중 뭐가 더 좋냐는 것처럼, 아무렇지 않게 물었지만 내 입술과 손은 파르르 떨렸다. 이것도 나중에야 안 사실이지만, 누난 그런걸 모두 알아봤다고 한다. 살짝 웃으며 없다고 답한 누나의 말은 살면서 절대 잊을 수 없는 것 중 하나가 돼버렸다.

슬슬 저녁시간이 다가오고, 이제 그만 일어설까 라는 말을 꺼낸 누나의 손을 살짝 잡은건 나였다. 할 말이 있다고 했다. 이때부터는 모든 걸 내 감정에 맡겼었다. 누나가 좋다고 말했다. 처음 누나에게 질문한 날부터 누나를 좋아했다고 말했다. 누나가 아까 물었던 질문들의 답이 다 누나라고 했다. 10번도 넘게 들어온 소개팅과 미팅을 거절한 것도 누나 때문이라고 했다. 무엇보다 고대에 온 건 누나를 좋아했고 앞으로도 좋아할 것이기 때문이라 했다. 이 말을 모두 뱉어내는데엔 많은 시간이 필요하진 않았다. 누난 표정을 잠시 굳혔다가 약간 입꼬리만 올린 채 대답해줬다.

누난 내 맘을 알고 있었다고 했다. '분명 선생님이 잘한다고 넌지시 말해줬던 앤데, 자습실에 나오지도 않다가 계속 나오는 것도 이상하고 물어보는 문제가 많아지는 것도 이상했지. 넌 모르겠지만 너가 물어본 문제들, 쉬운 편이었거든. 번호 물어볼 때 손 떨렸던건 알아? 아까 너가 나보고 남자친구 있냐고 물었을 때처럼. 뭐, 그 이후로는 연하도 괜찮겠다 싶었는데 수능 끝나고 연락이 안 오길래 괘씸했지. 나도 2학년이니 바빠졌었고, 혼자 착각한 것 같길래 쪽팔리기도 하고. 그런데 어제 연락이 왔길래 얼마나 신기했는지 몰라. 내 대답은 이 정도야.'

물론 누나의 말투는 이렇게 딱딱하지 않았다. 중간중간 보태는 미소는 완벽했다. 누나의 대답은 나에게 충분하지 않아서, 그만큼 내가 바보같아서, 조금 더 직접적으로 물었다. 그럼 누나랑 계속 봐도 되는거냐고. 누난 몇 초간 고민하더니, 이럴 땐 '누나가 밥 샀으니 다음엔 내가 살게요. 언제 볼까요?' 라고 말을 건네는거라 알려줬다. 그래서 난 똑같이 말했다. 누나는 깔깔거리며 웃더니 좋다며 이제 그만 일어나자 했다. 다들 알겠지만, 제2롯데월드 옆에는 석촌호수가 있다. 거길 1시간정도 돌기도 했다. 한 10분쯤 걸었나,  누나의 손이 너무 하얘서 잡고 싶어졌다. 이번에도 손을 잡아도 되냐 묻는건 너무 바보같지 않을까 싶어 그냥 문득 잡았었다. 누나의 손은 도망가지 않고 살짝 깍지 낀 내 손에 조금 힘을 보탰다. 뭐, 그냥 여러가지를 물었다. 학과가 어디냐, 어떻게 1학기동안 한 번도 못 마주칠 수 있냐, 장미꽃을 좋아하냐 등등. 혹시 페이스북을 하냐고도 물었다. 누난 가끔 들어간다며 왜 그러냐 물었다. 그냥, 누나에 대해 글을 올렸는데 꽤 반응이 많았다고 얼버무렸다. 누난 며칠 뒤 그 글을 읽고 내게 백석과 김소월의 시는 도대체 어떻냐며 연신 놀려댔었다. 또 왜 그날 카페에서 유자차를 찾았는지 이제야 알았다며 웃음을 터트리기도 했다. 그 뒤로 3번정도 누나를 더 봤다. 3학년 1학기여서 조금 바빴지만 내가 그만큼 덜 바쁘면 됐기에 큰 상관은 없었다. 3번째 만남 때 정식으로 고백을 했다. 사실 확인절차에 도장을 찍는 것과 다를 바 없었지만.

누난 고백을 받은 날, 어디가 좋았냐는 고전적인 질문을 했다. 예뻐서 좋다고 답했더니 그건 당연하다고 했다. 조곤조곤 설명하는 모습이 존경스러워서 좋다고 답했더니 원래 자긴 설명을 잘한다 했다. 샴푸냄새가 향기로워서 좋다고 답했더니 그 때 쓰던 샴푸를 사러가야겠다고 했다. 키가 적당히 작아서 좋다고 답했더니 하이힐보다는 단화를 사야겠다며 살짝 웃었다. 지금 난 누나를 여자친구라고 부를 수 있고 손을 마음껏 잡을 수 있다. 추석 때 뜬 보름달을 찍어 누나에게 내 마음이에요! 라며 유치한 메세지를 보낼 수도 있다. 요 며칠 사이, 난 부쩍 운명을 다시 믿기 시작했다. 지금 유자차를 듣고 있는 것 역시 더 그렇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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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Portofino · 441451 · 16/09/17 19:54 · MS 2013

    왜 고대에 온거야? 왜 이렇게 늦게 말해준거야? 왜 소개팅이랑 미팅을 한 번도 안 나갔다는거야? 왜 굳이 이과캠 강의를 듣는거야? 이 4문제의 정답은 모두 내 앞에 있었다



    요건 기억해뒀다 써먹어야지 대박이네 필력

  • ToHEP · 656973 · 16/09/17 20:10 · MS 2016
    회원에 의해 삭제된 댓글입니다.
  • 휴이름다시함 · 614822 · 16/09/17 19:56 · MS 2015

    달다 ㅎㅎ

  • 한양대수교17 · 645071 · 16/09/17 20:20 · MS 2016

    와필력이....오글거리지않으면서적당히간질간질한글ㅠㅠ남자분이너무순수한듯

  • 고려대학교 의과대학 · 536658 · 16/09/17 20:21 · MS 2014

    달달하고 미소가 지어지지만 짜증나는 이 모순된 감정은 무엇인가

  • 조국의미래 · 616025 · 16/09/17 20:26 · MS 2015

    ㅠㅠㅠㅠ

  • 공부좀해개자식아 · 686761 · 16/09/17 20:49 · MS 2016

    도윤.... 고려대의대가야지...

  • 이소적종분화 · 683982 · 16/09/17 21:02 · MS 2016

    마음한켠이 울린다 ... 아주 기분나쁘게

  • Portofino · 441451 · 16/09/17 21:03 · MS 2013

    겁나 훈훈하고 달달하고 이쁜데 기분이 드럽다

  • 삼세판 · 605855 · 16/09/17 23:31 · MS 2015

    핳...그래도 날씨가 아직은 살짝 더워서 다행인거 같아요.
    날씨가 제법 쌀쌀할때 이 글 읽었으면 도서관 뛰쳐 나갔을듯 ㅋㅋ

  • 고대정외17 · 654148 · 16/09/18 00:51 · MS 2016

    와 대박 설렌다...ㅠㅠ

  • n2OyZ8QWz3xbCB · 678364 · 16/09/18 15:26 · MS 2016

    고대는 1번가의 사랑에 이어서 뭔가 되게 달달한 학교인듯... 이것도 달달 ㅠㅠ

  • Portofino · 441451 · 16/09/19 02:20 · MS 2013

    3번가 ㅋㅋ
    고파스홈피에서 숫자누르면 게시판이동하는데 3번이 익명게시판이라 3번가 라고 부름 ㅋㅋ

  • 그린비 · 667110 · 16/09/19 02:18 · MS 2016

    글을 읽으면서 장면장면이 머리속에 영화처렴 그려지네요.
    이쁜 사랑 하시길.


    그리고 이 이야기를 보면서 박주영 선수의 러브스토리가 떠오르더군요.
    "차범근 이후로 최고의 축구천재"라는 칭송을 듣던 대구 청구고 소속 박주영선수를 스카웃 하기 위해 고려대와 연세대가 치열한 스카웃 전쟁을 벌였고 당시 청구고 변병주 감독이 연세대출신이어서 연세대 진학이 유력했었습니다.

    그런데 박주영은 결국 스승의 모교가 아닌 고려대를 선택하는데, 그 이유가 티비를 보다가 한 눈에 반한 어떤 여학생 때문이었다고 합니다.

    https://youtu.be/Cc8pfdSYuhQ

    이 프로그램이었는데요.

    이 프로그램을 보면서 프로그램속에 등장한 고려대 여학생에게 반했고 고려대에 진학하자마자 프로포즈를 하여 6년간의 열애끝에 2011년에 결혼을 하게 되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