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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의중앙선의 나그네 [1152647] · MS 2022 (수정됨) · 쪽지

2026-05-10 20:1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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플라톤에게 예술은 심미적 활동이 아닙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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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가 과거 플라톤에게 예술 활동은 심미적 활동이 아니라고 주장한 것에 대해 최근에 등장한 반론글이 화제입니다.


이에 대한 의견을 전달드립니다.


우선, 시작하기에 앞서 제 의견에 관심을 가져주시고 의견을 주신 것에 대해 감사드립니다. 의견을 주신 덕에 플라톤의 예술관을 보다 심층적으로 연구할 수 있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아래 의견서에서는 플라톤의 원전과 더불어 플라톤의 예술관에 있어 저명한 학자, 자나웨이(Christopher Janaway)의 저작을 기반으로 합니다. 플라톤의 원전은 서광사와 현대지성의 것을 활용하였으며, 해석 간의 차이를 좁히기 위하여 옥스포드 대학(Oxford Univ)과 기타 편집본 1종을 참고하였습니다.


- 플라톤, 『국가』, 박문재 옮김, 현대지성, 제10권 595a–608b.

- 플라톤, 『향연』, 서광사, 210a–212a.

- 플라톤, 『파이드로스』, 서광사, 250b–d.

- Plato, Republic, trans. Robin Waterfield (Oxford University Press, 1994), Book 10.

- Plato, Republic, trans. Paul Shorey, Perseus Digital Library.

- Janaway, Christopher. Images of Excellence: Plato's Critique of the Arts. Oxford: Oxford University Press, 1995.


제 주장에 대해 의견자님께서 주신 논점은 세 가지의 의문점과 두 편의 국문 논문으로 나눌 수 있습니다. 순서대로 짚어보겠습니다.


1. '심미적'이라는 용어

1.1. '심미적(aesthetic)' 용어의 출현과 발전


말씀하신 것과 같이 '심미적'이라는 용어는 플라톤 체계에서 쉽게 등장하지 않았다. '심미적'이라는 학문적 범주는 1735년 바움가르텐(Baumgarten)의 Aesthetica에서 처음 정립되었고, 예술을 '심미적 활동'으로 다루는 체계적 관점은 아리스토텔레스의 『시학(Poetics)』에서 발전하게 되었다(Havelock). 이 논점은 오히려 필자의 주장을 강화하고 있다. "당시에 심미적이라는 단어가 없었다"는 사실은, "플라톤에게 예술은 심미적 활동이다"라는 명제를 성립시키기 어렵게 만드는 근거이지, 성립시키는 근거가 아니다. 플라톤에게 없는 범주를 소급 적용하는 것은 Janaway가 경고하는 "over-aestheticizing(과심미화)"이다.


"Nevertheless kalos is a term with a much wider use as well, and is more like 'noble', 'admirable', or 'fine'. It will pay to remember this, otherwise we run the risk of over-aestheticizing Plato. Inadvertency must not lead us to construe Plato's ultimate aspiration as purely aesthetic (Janaway, p.59)."


나아가 플라톤의 kalon(아름다움/훌륭함)은 근대적 의미의 "aesthetic"과 등치될 수 없다.


"Kalos as such cannot be equated with 'beautiful' in its aesthetic sense (Janaway, p.61)."


1.2. '시청각 쾌락(to di' opseōs te kai akoēs hēdu) '


1.2.1. 플라톤 체계에서의 '시청각 쾌락'


그렇다면 심미적(aesthetical)에 그나마 근접할 수 있는 '시청각 쾌락(to di' opseōs te kai akoēs hēdu)' 개념에서 필자의 주장을 이어가보고자 한다.


『힙피아스』에서 소크라테스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우리를 즐겁게 해주는 것 — 여기에는 모든 즐거움이 아니라 청각과 시각을 통해 우리를 즐겁게 해주는 것들만 포함되오 — 이 아름다운 것이라고 말한다면 어떻게 우리 주장을 관철할 수 있을지 말이오. 힙피아스님, 아름다운 사람들과 모든 장식품과 그림과 조각도 아름답다면 분명 우리가 보고 즐거움을 느끼오. 그리고 아름다운 소리와 음악 일반과 연설과 이야기도 같은 효과가 있소 (297e–298a, 천병희 역)."


이에 대해 Janaway는 다음과 같이 해석한다.


"This passage in Hippias Major is thus significant for uniting disparate arts under a single conception of fineness whose defining feature is pleasure through sight and hearing (Janaway, p.65)."


1.2.2. 시청각 쾌락에 자율적 가치를 부여할 수 있는가


플라톤이 여러 예술을 하나로 묶는 기준으로 '시청각 쾌락'을 사용한 적이 있다는 것까지는 인정된다. 그러나 플라톤은 이것에 자율적 가치를 부여하지 않았다.


"I shall argue that Plato recognizes the arts as providing aesthetic pleasure, but does not regard their doing so as giving them a prominent place in the best of human lives (Janaway, p.58)."


"the kind of 'aesthetic pleasure' Plato recognizes is indeed only a small portion of fineness, which in itself is insufficient to make the arts worthy of our highest aspirations (Janaway, p.68)."


"Argues that Plato has the beginnings of a conception of aesthetic pleasure, but that he does not use it to assign autonomous value to the arts (Janaway, Ch.2 abstrac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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플라톤은 예술이 시청각의 쾌락을 줄 수 있다는 것은 인정하지만, 그것을 예술의 자율적 가치(autonomous value)로 인정하지 않았다. 쾌락이 수반된다고 해서 그 활동이 '심미적 활동'으로 정의되는 것은 아니다.


1.2.3. '시청각 쾌락'이 야기하는 예술의 위험성


플라톤은 시청각 쾌락이 예술을 더 위험하게 만드는 요소라고 보았다.


"Reflect, however, that a sweet-smelling plant can be poisonous. Its smell would not be a bad thing, but its being poisonous and sweet-smelling would make it all the more dangerous. This, I think, is how Plato comes to view some of the arts. Good poetry which pleases us when we hear it is eo ipso a fine thing — no need to deny that. But until we have asked how it stands with relation to knowledge, learning, and human excellence, we have not said anything particularly important (Janaway, p.68)."


따라서 플라톤 체계에서 '심미적'에 가장 근접한 개념인 '시청각 쾌락'조차, 예술을 '심미적 활동'으로 규정하는 근거가 되지 못한다. 오히려 이 쾌락의 존재가 예술을 더욱 경계해야 할 대상으로 만든다는 것이 플라톤의 입장이다.


(이하부터는 보다 빠른 발행을 위해 원문 사진 첨부를 하지 않겠습니다. 확인이 필요한 원문이 있을 경우, 전달 바랍니다.)


2. 예술에서 심미적 활동을 부정하면, 인간의 심미적 활동은 무엇인가

의견자님께서는 "예술에서 심미적 활동을 부정하면 당시 인간이 누릴 수 있는 심미적 활동은 무엇인가?"라고 물으신다. 이 질문에는 "인간에게 독립적인 심미적 활동 범주가 반드시 존재해야 한다"는 근대적 전제가 깔려 있다. 그러나 플라톤에게 독립 범주로서의 '심미적 활동'은 존재하지 않았다.


2.1. 아름다움은 철학적 상승의 대상이지, 예술적 감상의 대상이 아니다


플라톤에게 아름다움(to kalon)은 분명 중요한 것이었다. 그러나 아름다움에 접근하는 방법은 예술이 아니라 철학적 에로스(eros)를 통한 상승이었다. 『향연』 211c에서 디오티마는 아름다움에 이르는 경로를 제시한다.


"이들 아름다운 것들에서 시작하여 저 아름다움 때문에 언제나 위로 올라가는 것, 마치 사다리의 가로장들을 이용하듯, 하나에서 둘로, 또 둘에서 모든 아름다운 몸들로, 또 아름다운 몸들에서 아름다운 관행들로, 또 관행들에서 아름다운 배움들로, 그리고는 배움들에서 저 배움(mathema)으로 끝을 맺는 것 말이에요 (향연 211c, 서광사)."


여기서 사다리의 단계는 다음과 같다.

하나의 아름다운 몸 → 모든 아름다운 몸 → 혼(영혼)의 아름다움 → 관행과 법률의 아름다움 → 학문들의 아름다움 → 아름다움 자체(auto to kalon).


여기서 예술(시, 회화, 조각, 음악)은 어떤 단계에도 포함되지 않는다. Janaway는 이를 직접 확인한다.


"in Diotima's account of the lover's ascent to beauty itself, the fine objects of love encountered on the way include no paintings, sculptures, music, story-telling — nothing artistic (Janaway, p.71)."


2.2. 아름다움은 시각을 통해 직접 빛나며, 예술의 매개가 불필요하다


『파이드로스』 250d에서 플라톤은 아름다움이 다른 이데아들과 달리 감각을 통해 직접 인지된다고 말한다.


"올바름과 절제 그리고 그 밖의 것들로 혼들에 귀중한 하고 많은 것들을 닮은 이곳의 것들에는 그 안에 아무런 광채도 없지만 … 지금은 아름다움만이 이 자격을 지니고 있어서, 가장 드러나 보이고 가장 사랑받는 것이야 (파이드로스 250b–d, 서광사)."


정의나 절제 같은 이데아는 감각을 통해 빛나지 않지만, 아름다움만은 시각을 통해 직접 빛난다. 그 매개자는 예술가가 아니라 감각 자체(특히 시각)이다. 즉 플라톤에게 아름다움의 체험은 예술 활동 없이도 가능하며, 오히려 예술 없이 직접 존재로부터 아름다움을 포착하는 것이 더 본래적이다.


2.3. 『향연』에서 시인은 사라진다


디오티마의 연설 초반에서는 시인이 "혼의 자녀"를 낳는 자로서 긍정적으로 언급된다(209a). 그러나 아름다움의 사다리가 상승함에 따라 시인은 더 이상 등장하지 않으며, 최종적 비전에서는 완전히 사라진다.


"In Diotima's final vision poets quietly slip out of view. Beautiful poems last a long time, but could never be an exchange for beauty itself (Janaway, p.78)."


나아가 Janaway는 『향연』 전체에 대해 다음과 같이 판단한다.


"Although Plato is talking about value, about fineness, and about beauty, there is little indication that artistic practices or an exclusively aesthetic form of value have any special place in the Symposium's vision of the best of lives (Janaway, p.79)."


2.4. 아름다움에 도달한 자가 낳는 것: "영상이 아닌 참된 것"


『향연』 212a에서 디오티마는 아름다움 자체에 도달한 자가 낳는 것에 대해 말한다.


"혹시 선생은 이런 상태에서만 이 사람에게, 곧 그 기능에 의해서만 볼 수 있는 아름다움을 보는 자에게 훌륭함(덕: arete)의 영상들(eidōla)이 아닌, 참된 그걸 낳게 될 것이라는 걸 알아차리지 못하시나요. 영상에 접하는 게 아니라 참된 것에 접하게 되는 자일 것이기 때문이죠 (향연 212a, 서광사)."


예술(미메시스)이 생산하는 것은 eidōla(영상)이다. 『국가』 600e4–6에서도 "모든 시인은 호메로스를 시작으로 탁월함의 영상들(eidōla aretēs)의 모방자"라고 말한다. 그런데 아름다움 자체에 도달한 자가 낳는 것은 "영상이 아닌(ouk eidōla) 참된 것"이다. 동일한 용어가 양쪽에서 사용되며 명시적으로 대비된다(Janaway, p.78, 각주 45 참조).


2.5. 소결


플라톤에게 아름다움의 체험은 존재한다. 그러나 그것은 예술을 통한 '심미적 활동'이 아니라, 철학적 에로스를 통한 상승이다. 의견자님의 질문에 대한 답은 다음과 같다: 플라톤이 부정한 것은 '인간의 아름다움 체험' 자체가 아니라, '예술이 그 체험의 본질적 통로가 된다'는 생각이다. 아름다움에 이르는 길에 예술은 없으며, 예술이 만들어내는 것(eidōla)은 아름다움 자체에 도달한 자가 낳는 것(참된 덕)과 명시적으로 구별된다.


3. 수능완성 해설에 대하여

반론 글에서는 2023학년도 수능완성의 다음 해설을 인용한다.


"④ 플라톤은 예술이 도덕성 함양의 수단이어야 하므로 심미적 기준이 아닌 도덕적 기준으로 평가해야 한다고 보았다."


반론 글은 "이것은 평가에서의 내용이다. 아직 예술활동 자체가 심미적 활동이 아니라고 했는지는 알 수 없다"고 주장한다. 즉, 평가 기준과 활동의 본질 규정은 별개라는 것이다.


3.1. 플라톤에게 평가 기준과 본질 규정은 분리되지 않는다


일견 타당해 보이는 구분이나, 플라톤의 체계에서는 이 구분이 성립하기 어렵다. 플라톤이 "미메시스란 무엇인가?"라는 본질에 대한 질문에 답할 때 사용하는 것은 '아름다움'이나 '심미적 쾌락'이 아니라, '진리로부터의 거리', '영상의 생산', '지식의 부재' 같은 인식론적·존재론적 범주이다.


"the initial explanation of 'mimesis as a whole' is given, in metaphysical and epistemological terms: Plato tries to establish what entities are made by mimesis, and what knowledge its practitioner requires (Janaway, p.108)."


3.2. 예술 작품의 시각적 속성은 플라톤의 평가 대상이 아니었다


근대적 의미에서 예술이 '심미적 활동'이라면, 예술가의 색채 선택이나 선의 처리, 구성의 조화 등이 본질적 평가 대상이 되어야 한다. 그러나 Janaway에 따르면 플라톤은 이런 것을 전혀 고려하지 않았다.


"Plato does not consider that this [the painting as a physical object on a surface] is anything important, interesting, or pleasing in its own right. So he cannot think of evaluating the painter's choice of substances to paint with, or the painting's success in handling colour or line (Janaway, p.119)."


3.3. 예술의 본질은 "지성의 왜곡"으로 규정된다


『국가』 제10권 595b에서 플라톤은 모방적인 시의 본질을 다음과 같이 규정한다.


"모방적인 시나 그와 같은 부류는 그것이 무엇인지 몰라 스스로 해독할 수 없는 사람이 들으면, 그들의 지성을 왜곡시키는 것 같기 때문이네 (박문재 역)."


"자네들이 비극 시인들 및 그 밖의 다른 모든 모방자를 상대로 나를 헐뜯어 말하지는 않을 테니까 말하네만, 그런 모든 것은 듣는 이들의 마음을 버려놓는 것인 것만 같아 보인다네. 이들이 그런 것들이 어떤 것들안지에 대해 알 수 있게 해 주는 처방을 갖지 못하는 한은 말일세 (박종현 역)."


"자네들이 비극 시인이나 그 밖에 모방을 사용하는 모든 시인들에게 나를 이르지는 않을 테니까 모든 모방적인 시는 그걸 듣는 사람의 마음을 망가뜨리는 것 같네. 그것이 어떤 것인지에 대한 앎을 그에 대한 약으로 갖고 있지 않을 경우에는 말이네 (강성훈 역)."


"지성의 왜곡"은 예술의 부수적 효과가 아니라, 예술의 본질에 대한 규정이다. 수능완성의 해설("심미적 기준이 아닌 도덕적 기준으로 평가해야 한다")은 이 맥락에서 읽어야 한다. 플라톤에게 예술의 평가 기준이 도덕적인 이유는, 예술 활동의 본질 자체가 인식론적·도덕적 문제와 결부되어 있기 때문이다.


4. 제시된 논문에 대하여


의견자님께서는 두 편의 국문 논문을 근거로 제시하셨다. 두 논문 모두 플라톤의 예술관과 교육론에 유의미한 기여를 하는 연구이다. 다만, 해당 논문들의 논지가 "플라톤에게 예술은 심미적 활동이다"라는 명제를 직접 뒷받침하는 것인지는 별도로 검토할 필요가 있다. 이하에서는 두 논문의 원문 전체를 검토한 결과를 바탕으로 논한다.


4.1. 구리나 논문: 「예술과 유희: 플라톤과 쉴러의 교육론 비교」


의견자님께서는 구리나 논문의 다음 구절을 인용하여 "예술 그 자체는 심미적 즐거움이라고 하고 있습니다"라고 결론을 내리신다.


"예술을 실재라는 잣대로 일방적인 판단을 내리지 않고, 예술 그 자체의 의미를 드러낸다면 그것은 무엇으로 규정할 수 있을까? 그것은 플라톤 자신이 이미 규정한 바 있는 '유희'가 될 것이다. 유희는 플라톤이 이상 국가에 위험한 요소로 간주했던, 심미적 즐거움 그리고 그 즐거움을 추구하는 활동의 특징이다" (p.10).


그러나 이 구절의 앞뒤 맥락을 논문 원문에서 확인하면, 구리나 교수님의 논지는 "플라톤이 예술을 심미적 활동으로 긍정했다"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그 반대이다. 같은 논문에서 구리나 교수님은 다음과 같이 직접 서술하신다.


"플라톤은 '모방은 일종의 유희일 뿐, 진지한 것이 되지 못한다'(Republic, 602b)고 말한 바 있다. 예술가들의 유희는 어떤 것인가? 예술의 유희가 진지한 것으로 받아들여져서 감각의 우월성, 예술의 자율성 등이 주목을 받기 시작한 결정적 계기는 쉴러가 「인간의 심성교육」을 쓴 이후부터라고 볼 수 있다" (p.9).


구리나 교수님은 예술의 유희(심미적 즐거움)가 "진지한 것"으로, 즉 자율적 가치로 인정받기 시작한 것이 쉴러 이후라고 명시하신다. 플라톤에게 유희는 "진지한 것이 되지 못한다"고 직접 인용하고 있다. 논문의 전체 구조 역시 이를 뒷받침한다. 이 논문의 주제는 플라톤과 쉴러의 비교이며, 핵심 논지는 "플라톤이 추방한 것(예술가, 심미적 즐거움, 감각의 자율성)을 쉴러가 복권시켰다"는 것이다. 논문의 결론부에서도 다음과 같이 서술한다.


"쉴러가 「인간의 심성교육」에서 한 일은 플라톤이 쓰지 않은 무시케 교육의 의의를 쓴 것이며, 그 결과 플라톤의 이상 국가에서 쫓겨난 예술가들은 쉴러에게 와서야 그들만의 '미적 국가'를 이룰 수 있었다" (p.9).


따라서 구리나 논문은 "플라톤에게 예술은 심미적 활동이다"를 뒷받침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플라톤이 예술의 심미적 자율성을 인정하지 않았으며, 그 인정은 쉴러에 이르러서야 비로소 이루어졌다는 것을 논증하는 논문이다. 의견자님께서 인용하신 구절은 이 논증의 중간 단계인 "플라톤의 잣대를 유보하면 예술은 유희로 규정될 수 있을 것이다"라는 가정법적 탐색에 해당하며, 이를 플라톤 자신의 입장으로 귀속시키는 것은 논문의 전체 맥락과 부합하지 않는다.


4.2. 홍윤경 논문: 「플라톤의 예술론에 나타난 '모방'의 교육적 함의」


의견자님께서는 홍윤경 논문에서 "모방(플라톤이 보는 예술)이 심미적 몰입의 성격을 갖는다"는 구절을 근거로 제시하셨다. 논문 원문 전체를 검토하면, 이 구절의 의미를 보다 정확하게 파악할 수 있다.


첫째, "심미적 몰입"은 플라톤의 용어가 아니라 콜린슨(Collinson, 1973)의 개념이다. 홍윤경 교수님은 이 구분을 명확히 하신다.


"콜린슨(Collinson)은 '심미적 비평'과 '심미적 몰입'을 구분하는데, '지식과 기술' 그리고 '신성한 영감'은 각각 전자와 후자에 상응하는 것으로 해석될 수 있다" (p.162).


"해석될 수 있다"라는 표현은 이것이 플라톤 자신의 규정이 아니라, 근대 미학의 개념틀을 빌려 플라톤을 재해석하는 작업임을 보여준다.


둘째, 홍윤경 교수님이 "심미적 몰입"이라는 용어를 통해 분석하시는 내용은, 근대적 의미의 "심미적 활동"과 다르다. 논문의 결론부에서 교수님은 모방의 교육적 의미를 다음과 같이 규정하신다.


"모방은 예술작품에 몰입하도록 함으로써 최상의 가치가 존재한다는 '느낌'을 심어 주는 것이다" (p.172).


그리고 이 "느낌"이 본격적인 교과 교육의 이전 단계임을 명시하신다.


"이 의미의 진리의 통찰은 본격적인 교과교육과 최상의 교과인 변증법을 통하여 이루어진다. 모방은 예술작품에 몰입하도록 함으로써 최상의 가치가 존재한다는 '느낌'을 심어 주는 것이다" (p.172).


따라서 홍윤경 교수님의 논지는 "예술은 심미적 활동이다"가 아니라, 모방이 "실재의 암시(intimation of reality)"로서 교육의 출발점이 된다는 것이다. 논문의 영문 초록에서도 핵심 개념은 "aesthetic activity"가 아니라 "intimation of reality"와 "a feeling of supreme value"로 제시되어 있다.


셋째, 홍윤경 교수님은 논문 전체에서 플라톤이 비판하는 모방과 긍정하는 모방을 구분하시면서, 긍정하는 모방의 성격을 "교육의 핵심원리"로 규정하신다.


"플라톤적 의미의 모방은 감각을 통하여 세상을 파악하면서도 감각으로 포괄될 수 없는 최상의 가치를 느낄 수 있도록 도와준다. 이로 인하여 학습자는 삶의 표층에 대한 혼란을 느끼고 비로소 의미있는 질문을 품을 수 있다. 현대인에게 친숙한 용어로 바꾸어 말하자면, 플라톤이 교육의 핵심원리로 제시한 모방은 예술교육의 원리이다" (p.172).


이것은 예술의 교육적 기능과 원리에 대한 분석이지, 예술을 "심미적 활동"으로 정의하는 것이 아니다.


4.3. 소결: 논문의 논지와 반론 글의 활용 사이의 간극


두 논문의 원문 전체를 검토한 결과, 다음과 같이 정리할 수 있다.


구리나 논문은 플라톤이 예술의 유희(심미적 즐거움)를 "진지한 것이 되지 못한다"고 보았으며, 이것이 자율적 가치로 복권된 것은 쉴러 이후라고 직접 논증한다. 홍윤경 논문은 콜린슨의 "심미적 몰입" 개념을 빌려 플라톤의 모방을 재해석하되, 그 핵심을 "최상의 가치가 존재한다는 느낌"이라는 교육적 원리로 규정하며, "심미적 활동"이라는 범주로 정의하지 않는다.


두 논문 모두 플라톤의 예술관에 대한 풍부한 분석을 제공하고 있으나, 어느 논문도 "플라톤에게 예술은 심미적 활동이다"라는 명제를 직접 주장하고 있지는 않다. 예술에 일정한 체험적 차원(유희, 몰입, 느낌)이 수반된다는 분석과, 플라톤이 예술을 '심미적 활동'으로 규정했다는 주장은 별개의 명제이며, 전자에서 후자로의 이행에는 추가적인 논증이 필요하다.


5. 결론

반론 글의 최종 논증 구조는 다음과 같다.


전제1: 예술은 심미적 기준이 아닌 도덕적 기준으로 평가해야 한다.

전제2: 그러나 예술 활동인 모방은 심미적 몰입의 성격을 가진다.

결론: 그러므로 예술(이데아 모방)은 심미적 활동이다.


이 논증은 다음의 이유로 성립하기 어렵다.


첫째, 예술에 쾌락이나 몰입이 수반될 수 있다는 것과, 예술이 '심미적 활동'으로 정의된다는 것은 다른 명제이다. 플라톤은 전자를 인정하되, 그것을 예술의 자율적 가치로 승격시키지 않았다(Janaway, p.58, p.68). 오히려 그 쾌락은 예술을 더 위험하게 만드는 요소이다(Janaway, p.68).


둘째, 플라톤이 예술의 본질을 규정할 때 사용하는 범주는 '아름다움의 추구'가 아니라, '진리로부터의 거리', '영상의 생산', '지식의 부재', '지성의 왜곡'이다(Janaway, p.108; 『국가』 595b, 598b). 이러한 본질 규정은 '심미적 활동'이라는 범주와 양립하기 어렵다.


셋째, 플라톤에게 아름다움(to kalon)은 분명 중요한 것이었으나, 아름다움에 이르는 길에 예술은 포함되지 않았다. 『향연』의 아름다움의 사다리에 예술은 단 한 단계도 등장하지 않으며(Janaway, p.71), 아름다움에 도달한 자가 낳는 것은 예술의 산물(eidōla)이 아니라 "참된 덕"이다(향연 212a).


넷째, 『향연』 전체에 대한 Janaway의 판단은 다음과 같다.


"Although Plato is talking about value, about fineness, and about beauty, there is little indication that artistic practices or an exclusively aesthetic form of value have any special place in the Symposium's vision of the best of lives (Janaway, p.79)."


따라서 "플라톤: 예술(이데아 모방)은 심미적 활동이다"는 틀린 진술이다. 예술에 쾌락이 수반될 수 있다는 사실이 예술을 '심미적 활동'으로 만드는 것은 아니며, 플라톤은 예술의 본질을 종시일관 인식론적·도덕적 범주로 규정하였다.


6. 추가 근거 (05.11.)

- 모라나(Cyril Morana)의 관점

플라톤의 예술관에서 예술 활동이 심미적 활동으로 규정할 수 없는 것은 예술철학 전공서에서도 확인된다. 프랑스 프레파 철학 교수 모라나은 플라톤의 예술관이 함의하고 있는 의의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한다.


"플라톤에게 우리가 보고 있는 세계, 즉 감각 세계는 참된 세계가 아니다. 우리는 태어날 때부터 동굴에 갇힌 죄수처럼 그림자 외의 다른 것은 보지 못하고 그림자들을 참된 실재라고 여긴다. ... 참된 실재에 도달하기 위해 가상에서 멀어지는 것은 철학을 위한 좋은 방법이 된다. 예지적인 미 자체를 알아보기 위해서는 아름다운 사물에서 멀어져야 한다 (모라나·우댕, 한의정 역, 2013)."


예술은 감각적으로 아름다운 사물을 다루는 활동인데, 플라톤은 미 자체에 도달하려면 그로부터 멀어지라고 보았다는 것이다. 만약 예술이 아름다움을 추구하는 '심미적 활동'이었다면, 미 자체를 향해 아름다운 사물에서 멀어지라는 지시는 성립할 수 없다.


7. Janaway 교수님의 의견 (05.12.)

해당 의견서에서 언급된 플라톤 권위자 Janaway 교수님께 해당 내용에 대한 자문 요청을 전달드렸고, "플라톤의 입장에서 예술을 심미적 활동으로 볼 수 없다"는 이메일을 받았다. 전문을 공개하는 것은 사전에 허락 등이 이루어지고 있지 않아 일부 내용만 인용한다.


... He[Plato] certainly thinks that poetry aims to give pleasure. But (a) he doesn’t really mark that pleasure out as ‘aesthetic’, (b) he doesn’t think that the pleasure that poetry gives is the right criterion of its value. ... Does Plato think poetry, drama, music and painting give pleasure through the senses? Yes. But that’s as far as I would go.  He doesn’t say anything about ‘art’ as a general category. And he does not dignify any pleasure with the label ‘aesthetic’, a term which carries with it the baggage of ‘aesthetic autonomy’ and a distinct kind of value that is not reducible to ethical or cognitive value.

<그[플라톤]는 분명히 시가 쾌락을 주는 것을 목표로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a) 그는 그 쾌락을 '심미적'인 것으로 따로 구별하지 않으며, (b) 시가 주는 쾌락이 시의 가치를 판단하는 올바른 기준이라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 플라톤이 시, 드라마, 음악, 회화가 감각을 통해 쾌락을 준다고 생각했는가? 그렇습니다. 그러나 제가 말할 수 있는 것은 거기까지입니다. 그는 '예술'이라는 일반적 범주에 대해 아무것도 말하지 않습니다. 그리고 그는 어떤 쾌락에도 '심미적'이라는 명칭을 부여하지 않습니다. '심미적'이라는 용어에는 '심미적 자율성(aesthetic autonomy)', 그리고 윤리적 가치나 인식적 가치로 환원될 수 없는 별도의 가치 범주라는 함의가 따라오기 때문입니다.>


- Janaway 교수님 답변 중 일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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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초기진압 · 1446662 · 05/10 20:33 · MS 2026

    글 감사 합니다. 너무 많이 쓰셨네요. 좀더 자세읽어 봐야 할것 같아요

  • 허수통사 · 1310246 · 05/10 21:01 · MS 2024

    본문 내용과는 뜬금없는 얘기라 죄송하지만 『국가』 박문재 역은 학계에서 인정받을 만한 번역본은 아닌 것 같습니다. 보통은 서광사에서 나온 박종현 역을 읽었었고, 최근에는 정암학당 선생님들이 아카넷에서 내신 번역본이 참고할 만합니다.

  • 경의중앙선의 나그네 · 1152647 · 05/10 21:03 · MS 2022

    네, 말씀하신 것처럼 박종현 역본이 높게 평가받고 있습니다. 하지만 영문 편집본을 중심으로 번역본들을 비교하여 해석에 있어 보다 수월한 것을 선택하는 과정에서 박문재 역본을 선택하였습니다. 해당 부분 인용이 한 곳에만 있다 보니, 박종현 역본도 추가로 인용하여 업로드 하겠습니다.

  • 초기진압 · 1446662 · 05/11 17:32 · MS 2026 (수정됨)

    본인의 글에 5월 학평 생윤 19번 예술은 인간의 본능에 반(反)하는 심미적인 활동이다.에 대한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 비교 연구
    게시글 주소: https://orbi.kr/00078375193
    경의중앙선님께서 반대 의견을 보내 주셨습니다.
    위 주소에 일단 참고가 되었던 논문을 올리겠습니다.

  • 초기진압 · 1446662 · 05/11 18:44 · MS 2026 (수정됨)

    플라톤: 모방의 초 경험적 차원은 심미적 몰입이 나타내는 신비를 드러내는 것으로 해석될 수 있다.
    게시글 주소: https://orbi.kr/00078384337
    모방으로서의 예술은 실재를 반영하는 동시에 심미적 몰입의 특징을 가지며 신성한 영감의 ‘신비’를 담고 있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