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 Müller [427516] · MS 2012 · 쪽지

2016-01-24 10:10:29
조회수 6,644

대학CC였던 엄마와 아빠의 슬픈 사랑(고대숲)

게시글 주소: https://orbi.kr/0007737918

아빠는 서울에 있는 한 사립대 학생이었어요. 철학이나 여행을 좋아하고 무엇보다 문학을 좋아하는 분이셨죠. 아빠가 엄마를 처음 만난 것은 신입생 때였다고 해요. 1학년 어느 봄날 교양 수업을 들으면서 말이죠.

아빠는 학부생 때 늘 강의실 뒤쪽에 앉으셨대요. 그날도 평소처럼 뒷자리에 앉아 수업은 듣지 않고 사람 구경을 했죠. 그리고 그때 저 멀리 앞자리에서 수업을 듣고 있던 엄마를 보셨다고 해요. 뒤로 묶은 머리에 하얀 목살을 드러내고 열심히 필기를 하는 모습이 눈에 찼다고 아빠는 말씀하셨어요.

뭐, 보통의 연애가 그렇듯 두 분의 연애도 한쪽의 일방적인 다가감으로 시작했나 봐요. 아빠는 그 수업이 있는 날이면 엄마만 보셨다고 해요. 그리고 조금씩 가까운 자리에 앉다가 어느 날엔가 나란히 앉아 수업을 들으신 거죠. 과제를 핑계로 말문이 트고 그 뒤로는 옛날이나 지금이나 똑같아요. 만나서 밥 먹고 영화 보고 커피도 마시면서 연애가 시작된 것이죠.

엄마는 몸이 많이 허약하셨다고 해요. 저를 낳고 반년 만에 돌아가셨으니 말이죠. 아빠가 군복무를 마치고 돌아오신 해에 엄마가 저를 가지셨으니까 대충 아빠가 졸업을 앞둔 즘에 제가 태어난 거죠. 저는 그때 갓난아기라 엄마 얼굴도 잘 모르고 아빠가 얼마나 힘드셨는지 알 수가 없어요. 다만, 제가 사진 속 엄마의 나이가 되면서 그날의 슬픔을 추측할 뿐이죠.

아빠는 제가 엄마와 꼭 닮았다고 말씀하세요. 사실 제가 봐도 전 사진 속 엄마와 많이 닮았어요. 저를 보면 엄마 생각이 난다며 아빠는 종종 눈가가 촉촉해지고 하셨죠. 그런 날이면 저는 늘 빈자리였던 엄마에 대한 궁금증을 아빠를 통해 해소하곤 했어요. 엄마의 대학시절 이야기라든지, 엄마는 무엇을 좋아하셨는지, 어떤 음악을 들으셨는지 말이죠.

하루는 아빠에게 너무 일찍 엄마를 잃으셔서 불행하냐고 물어본 날이 있었어요. 제가 태어나지 않았더라면 엄마 몸이 약해지지 않았을 거고 그러면 엄마는 지금 살아계실 수도 있겠다는 생각을 했던 날이죠. 아빠는 곰곰이 생각을 하시더니 웃으시면서 제게 말씀하셨죠.

“네 엄마 장례식을 끝내고 학교를 걸은 적이 있단다. 네 엄마와 같이 걷던 교정과 함께 누워있던 잔디밭을 지나가며 울고 있었지. 너도 알 듯 엄마는 봄에 돌아가셨잖아? 아빠가 학교를 찾아간 날 새벽에 봄비가 내렸어. 눈물을 다 흘리고 세상을 보는데 갑자기 모든 것이 빛나 보이는 거야. 하늘이 개면서 햇빛에 젖은 풀들이 반짝거린 거였어. 온 세상에 슬픔이 씻겨나간 것 같았고 새로운 출발을 하겠다는 생각을 했지. 그 반짝임에 엄마를 대신해 너를 반드시 잘 키워내겠다는 맹세를 했단다.”

저는 그날 아빠가 보셨다는 그 반짝이는 광경을 아직 본 적이 없어요. 다만 추측할 뿐이죠. 아빠와 엄마가 다니셨다는 대학에 오기 위해 지난날 정말 열심히 공부했지요. 이제 새터를 다녀오고 나면 곧 3월이네요. 입춘도 한참 전에 지났다는데 캠퍼스에 완연한 봄이 오면 매일 밤 봄비가 오길 기도하면서 자려합니다. 모든 생명이 숨을 쉬고 긴 잠에서 깨어나 빛나는 그 장면을 보고 나면 어쩌면 저도 알 수 있을 거예요. 삶이 소중해지는 그 순간을 말이죠. 무엇보다 소중하고 하늘아래 가장 빛나는 바로 제 삶에 대한 소중함을요.

조금 더 욕심을 내면 저도 아빠와 같은 멋진 남자를 만날 수도 있겠죠? 봄이 기다려집니다. 어서 빨리 만나고 싶네요. 소중한 미래의 인연과 싱그러움을 담은 봄비 그리고 반짝임까지. 

지난날 한 젊은이의 맹세를 기억하시냐며, 이렇게 멋지게 자란 저를 세상에 드러내면서...








출처 : https://www.facebook.com/206910909512230/posts/340062659530387

0 XDK (+0)

  1. 유익한 글을 읽었다면 작성자에게 XDK를 선물하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