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소식

Cognita Sapiens [847641] · MS 2018 · 쪽지

2026-01-10 23:55:19
조회수 262

학문적 리더쉽이란 무엇인가

게시글 주소: https://orbi.kr/00076969456




 지난번에 제가 '새로운 패러다임을 제시하는 학문적 리더를 원한다' 라는 제목의 글로 교내 공모전 체험 수기 대상을 받은 이야기를 했습니다.



https://blog.naver.com/cognitasapiens/224124607917



 보통 제가 글을 쓰고 나중에 다시 읽으면 부끄럽거나 쪽팔린 경우가 많이 있습니다. 오탈자도 많이 보이고 문장이 길어지면서 주술관계도 뭉개지는 경우도 종종 보이거든요. 그런데 이번 원고는 다시 읽어도 오히려 참 신기하더군요. 처음부터 계획적으로 주도면밀하게 글을 써도 저 정도 글은 다시 쓰기 힘들 것 같다는 생각이 많이 들었습니다. 그리고 제가 근 10년간 고등교육을 받으면서 느끼고 깨달은 바를 단 한 편의 글에 전부 쏟아넣은 바, 더 이상 쓸 소재가 없어서 실탄이 바닥났다는 걱정도 좀 들었습니다.



 그런데! 역시나 이 세상에 '절대로'는 없더군요. 새해를 맞이하고 나서 얼마 되지도 않아서 새롭게 쓸 수 있는 소재가 생겨난 것을 보고, 세상은 참 아직도 넓고 난 하찮은 존재이며 앞으로도 배울 것이 산처럼 쌓여 있구나를 느꼈습니다.




역시 인생(한타)는 내 예상과 항상 다르게 흘러가는구나!




 


 제가 처음 독일을 갔을 때 은근히 스트레스 받던 것과 기대하던 것이 있었습니다. 기대하는 것이 뭐였냐면, 항상 지도교수님이 미팅 전까지 뭔가 제가 예상하지 못한 휘황찬란한 아이디어와 마스터플랜, 계획서를 들고 오셔서 저를 올바른 방향으로 인도하시리라 생각하였습니다. 그런데 스트레스 받던 것은 뭐냐면, 그런 기대와 예상을 깨고 항상 교수님은 미팅을 시작하면서 저에게 이렇게 물어보셨습니다. "What is our plan today??"



 고등학생 이하인 학생 분들이라면 잘 아시겠지만, 한국에서 교사(특히 지도교수는)는 절대적인 권력자이자 영도자입니다. 항상 무언가를 더 많이 알고 있기에, 우리에게 더 많은 지식을 주사기로 주입해주는 역할을 하죠. 워낙 주입식 중심의 수능 체계가 강한 영향으로, 이러한 풍토는 대학원까지 이어집니다.



 저도 아직 정식 대학원생은 아니지만 그래도 자신있게 말할 수 있는 것은, 여전히 제1저자 등의 주저자라 하더라도 한국에서 학생은 학생의 역할로 고정된다는 것입니다.




https://eacl.tistory.com/267




 주로 지도교수가 교신저자를 담당하여 말 그대로 교신, 논문 관련된 연락과 피드백, 건의, 데이터 요구 등을 책임을 집니다. PI라고도 하는데 주로 게임이나 영화계에서는 '디렉터'라고 합니다. 말 그대로 감독이죠 즉 방향을 제시하는 사람입니다.



 그렇습니다 한국에서는 교신저자는 주로 지도교수가 맡으며(아주 가끔 1저자를 단 학생이 공동 교신저자를 담당하는 경우가 극히 드물지만 있습니다), 한국의 지도교수는 주로 항상 방향성을 맡습니다. 매번 미팅에서 "그동안 내가 시킨 것을 다들 잘했니"를 주로 묻게 되죠. 거기서 가장 열심히 하고 많은 기여를 한 사람은 제1저자가 되는데 주로 학생이 맡습니다. 포항공대 등 명문대에서 '우리 학부생이 제 1저자로 논문 썻어요!' 라고 자랑을 하는 경우가 잇죠. 그만큼 학부생이 1저자를 맡는 경우 자체도 적습니다.



 그런데 환장하겠더군요. 독일 교수님이 뭔가 구체적인 방향과 다음 단계를 설정하고 제시해주실 줄 알았는데, 오히려 저에게 항상 물어보셧습니다. 며칠 전 줌 미팅으로 오랜만에 연락이 되서 미팅을 했는데 그때도 똑같은 말씀을 하시더군요. 그리고 이제서야 알 수 있었습니다, 아 유럽은 한국과 달리 주저자 1저자에게도 미니 PI같은 방향 제시를 바라는구나! 라고요.






 돌이켜보면 운이 좋았던 것도 있었습니다. 제가 독일을 갔던 초반, 교수님과 만난 자리에서 교수님이 즉석에서 저에게 "혹시 다음 단계를 계획한 것이 있느냐"라고 물어보셨습니다. 의도적으로 준비한 것은 아니었지만 워낙 아이디어 초창기였기에 많은 시간 투자 없이도 자연스럽게 대략적인 다음 단계를 생각해 둔 것이 있었고, 제가 적절한 방향을 제시하자 엄청 좋아하셨거든요.



 그런데 그때는 운이 좋았던 것 뿐이고, 교수님은 오히려 저에게 지속적으로 "What are we doing today?"를 물어보셨습니다. 그러니까 1저자에게 단순히 실행을 많이 시키고 많은 기여를 기대하는 것이 아니라, 아이디어 오너로서 저에게 다음 단계와 구체적인 방향, 마스터플랜을 요구하고 있었던 것이었음을 뒤늦게야 알 수 있었습니다.



 독일을 처음 간 것이 8월 중순이니, 벌써 4개월이나 지났지만 여태 연구에 큰 진전이 없었던 것은 제가 주도적인 역할을 요구받고 있으며, 그 역할에 맞게 제가 구체적인 방향과 다음 스텝을 제시하지 못했기 때문이라는 것을 그저께야 알 수 있었습니다. 교수님께서는 no more papers 라고 하시면서, 저에게 혼자 공부하고 혼자 고민하는 것을 그만 하고 이제 실질적인 연구의 진전이 있어야 한다고 강조하셨거든요.



 전 그런데 아직 학부생이라는 프레임에 갇혀서, 항상 뭔가 더 많이 준비하고 더 많이 읽고 생각을 다듬어야 한다고 생각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반면 독일 교수님은 제가 마치 교신저자처럼, 매번 미팅때마다 제 생각을 궁금해하셨고 제가 제시할 다음 것을 기다리고 있었던 것입니다.



 실질적으로 제가 계속해서 다음 단계를 제시하고, 구체적인 플랜을 제안하고 그것에 맞춰 독일팀이 따라와줘야하는 구조였으나 전 거꾸로 독일쪽에서 방향을 제시해주면 제가 그걸 따를 생각만 하고 있었습니다. 여태까지 연구가 약간 진전된 것은 아까 말한 것처럼 운좋게 제가 다음에 뭘 할지 러프하게나마 구상을 해둔 것이 있어서, 그때마다 약간씩 진전된 것이지 제가 뭔가를 열심히 잘 따라가서 그런 것이 아니었음을 알았습니다.



 

 

독일 교수님은 속으로 이런 생각을 하지는 않으셨을까 걱정되더군요. "아이디어 창안자로서 맨 선두에 서서 방향을 계속 잡아주고 앞에서 끌어줘야 할 놈이, 계속 뒷자리에 서서 뭔가를 수동적으로 따를 생각만 하고 있다" 라고 답답해하진 않으셨을까 하더군요.




 뒤늦게 역할의 미스매치를 깨달은 저는 급히 독일 교수님께 제 깨달음과 앞으로의 다짐을 정리해서 이메일을 보냈습니다 특히 교수님의 인내심에 대해서 감사하다는 말씀을 드렸습니다. 다행히 교수님은 "걱정 할 필요 없다, 난 니가 그 위치(적절한 역할분담)에 잘 갈 것이라고 생각한다" 라고 하시더군요.



 이와 관련해서 절 처음에 독일로 추천해주신, 바이오 미메틱스의 대가 Julian Vincent 교수님께도 이와 같은 깨달음과 미스매치, 그리고 고민을 공유드렸습니다. 특히 지금 독일 교수님과 독일 연구원 한명은 코딩과 수학을 담당하는데, 저희의 연구는 화학 + 코딩이어서 화학적 지식을 맡을 사람이 필요한데 학부생 따리인 제가 그 역할을 수행해야 하거든요. 제개 생각할 때는 화학 담당 지도교수, 코딩 담당 지도교수 총 2명이 있어서 분업을 해야할 것 같은데 화학에 대한 지식이 아직 부족한 제가 화학 담당 교수로서의 역할을 전이받으니 상당한 압박감을 느꼈습니다.



 교수님도 제 상황 파악과 인식이 정확하다고 느끼셨는지 좀 더 상세히 설명해주시더군요. 전 유럽식 학풍이라고 뭉뚱거렸지만 구체적으로 보자면 자율성을 더 주기에 실패와 성공의 분산이 큰 영국식과, 지도교수가 촘촘한 지도와 통제를 하기에 실패가 적은 대신 평범한 결과가 더 많은 독일식(=비슷한게 한국식)을 비교하시면서 제가 두 문화 사이에 낑겨있다고 공감하시더군요.






 그러면서 구체적으로 어째서 자율성을 중시하는 영국에서는 성공과 실패의 분산이 크고, 독일은 반대인지 상세히 설명해주셨습니다. "오로지 니가 배울 수 있을 때는 직접 실수를 했을 때이다. 만약 지도교수(교신저자)가 너무 강하게 통제해서 실패와 실수를 사전에 차단을 해버리면, 학생들은 실수를 할 수 없고 그래서 배울 수가 없다. 성공이란 좋은 아이디어에서 나오는 것이 아니라 오로지 실수를 했을 때 정확하고 빠르게 그것을 인식하는 곳에서 비롯된다" 라고 하시더군요.



 저도 지난번 대상에서 한국을 저점이 높지만 고점이 낮은, 분산이 적은 모델로, 유럽을 저점이 낮지만 고점이 높은 모델로 비유한 것과 완벽히 합치되는 설명이었습니다. 제 원고에서는 뭉뚱그려서 '사고력' 이라고 표현했지만, 교수님은 구체적으로 사고력이 곧 실수와 실수 인지에서 나온다고 설명해주신 것이죠.



 새해가 된 지 얼마 안되어서 벌써부터 소재가 쌓이는 것을 보니, 소재 고갈을 걱정할 필요는 없을거 같습니다 다행히. 하지만 여전히 화학 담당 PI처럼 화학에 대한 리얼하고 그럴듯한 모델을 만들어서 코딩팀에 넘겨야 하는 것이 상당히 압박이 되는데 뭐 교수님도 학부생 따리에게 완벽한 Molecular Dynamics를 바라시지는 않을 것 같으니 최대한 노력해봐야 겠습니다. 


 




0 XDK (+0)

  1. 유익한 글을 읽었다면 작성자에게 XDK를 선물하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