쟈니퀘스트 [1140651] · MS 2022 · 쪽지

2025-06-25 08:25: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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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아버지 고졸 흙수저 출신이지만 난 항상 자랑스럽게 생각하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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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0대 중반에 10~20대 수험생 커뮤니티에 아버지 자랑 올리는 것도 참 모자라는 짓 같긴 하지만,

메인글 보고 생각나는 게 조금 있어서 몇 자 끄적여봤어.




우리 아버지 자랑을 좀 하면 :

일단 70년대에 고교생이 회사 다니는 연상녀에게 연애편지 받을 정도로 잘 생겼다(증인 : 작은아버지).

한 번은 아버지와 내가 식당 갔다가 '큰형과 막둥이'로 오해를 받은 적도 있지.

수리 가형·화학·생물 망하고 문과로 빤스런한 나와는 달리, 원래부터 문학을 좋아해서 문과를 선택하셨고,

올해 3월 어머니 생신 때만 해도 나랑 이런 대화를 하실 수 있을 정도로 교양인이야 :

"한수산 걔는 왜 《군함도》 같은 걸 썼다니?"

"보나마나 국민들 반일감정 선동하려고 그랬겠죠. 그래도 학평에도 그 양반 작품(08년 3월 고3 현대소설《타인의 얼굴》) 나오고 지금은 문학계 중진이에요."

"허... 고놈아 옛날엔 평단에서 혹평만 받고 대중 입맛에 맞춘 통속소설 써가며 겨우 먹고 살던 녀석이었는데 참, 세상 좋아졌네."




이렇게 잘난 양반이 1958년 3월 전라도 광주에서 찢어지게 가난한 집 장남으로 태어난 게 천형이지, 에휴.

아버지께서 중학교 1학년 때, 할아버지께서 아버지를 잘 사는 친척 집에 1년 맡긴 적이 있었대.

그래서 친척 어른이 경영하던 인쇄소(5.18 중심지 구 전남도청 옆에 있는 그 인쇄소 아님)에서

낮에는 학교 다니고 밤에는 인쇄공 보조 돕는 식으로 1년을 살았는데,

그 집 아주머니와 식모한테 눈치를 많이 받으셨다더라.

어쩌다 돼지고기 썰어넣은 김치찌개 같은 맛있는 음식이 저녁 메뉴로 나오면

당시 성장기인데다가 국민학교 때 야구부도 하셨던 분이라 체격 커서 배고파 죽겠는데,

얹혀사는 처지에 차마 밥 더 달라고 하기가 뭐해서 눈치만 보다가 일어났다고...

당시 12~13세였던 어린 아버지의 결심 :

'내가 아버지가 되면 내 자식들은 절대로 눈칫밥 먹게 만들지 말아야지!'

그 결심 덕분인지, 나랑 내 남동생은 초중고 시절 알바해본 적이 한 번도 없다.


1년 후, 중학교 2학년이 된 아버지를 데리러 할아버지께서 오셨는데,

할아버지 손에 이끌려 간 곳이 서울 관악구 신림동의 판자촌.

검색해보면 알겠지만, 옛날 '판잣집'은 말이 좋아 '집'이고 '가건물'이지

요즘 개집보다도 구조도 허술하고 완성도도 훨씬 낮았어.

그 시절이 절대 다수 국민이 가난했던 70년대였는데도, 어린 아버지가 판잣집을 보고

'고작 이렇게 살려고 아들을 남의 집에 맡겨놓고 상경한 거야?'

이 생각이 들 정도로 어이가 없었더래.


고등학교 때는 반장도 하고 공부도 잘하는 데다 러브레터도 받았지만(상술한 OL만이 아님),

그 때가 또 한창 예민한 사춘기였던지라 아버지의 가정환경에 대한 콤플렉스는 더 심해졌지.

그래도, 아버지께서 장남이니 할아버지께서 고등학교까지 보내주셨지,

여자인 고모들은 국민학교·중학교만 졸업하고도 바로 공장이나 회사 다니며 일하는데

대학 못 간다고 불평하는 건 배부른 소리라서 입 밖으로 내시지는 않았대.

아버지의 이런 괴로움을 달래주던 게 문학이라, 고등학교에선 문과로 진학.


고3 때는 서울의 모 대학교 국문과 본고사에 응시하신 적도 있었대,

물론 붙어도 등록시켜줄 등록금은 따로 없으니 시험삼아 응시만 한다고.

근데 덜컥 합격해서 합격증이 집으로 날아와버렸네?

합격증을 본 할머니께서는 대성통곡하고 할아버지는 말없이 집을 나가

며칠 동안 돌아오지 않으셨고, 아버지께서는 '그냥 대충 쓰고 나올 걸.' 후회하셨대.


고등학교를 졸업한 이후 우리 아버지께서는 자원입대해서 병역을 마치고 공직 생활을 시작하셨고,

결혼 후에는 4인 가정의 모범적인 아버지 역할에 충실하게 임하셨다.

30이 넘은 내가 아버지께 맞은 횟수가 평생 딱 1번이야.

초등학교 3학년 때 학교 앞 문구점에서 나침반 좀도둑질했다가 주인 할머니한테 걸렸을 때,

그 때는 엎드려 뻗쳐서 자상한 우리 아버지 맞나 싶을 정도의 풀스윙으로 빠따 맞았다.

그래도 '100대 맞기'로 했는데 '50대는 나중에 맞기'로 하고 손수 때린 자리에 약 발라주셨지.

어렸을 때 내 동생은 "엄마는 맨날 나만 미워한다!"고 엄마보다 아빠를 먼저 찾을 정도였어.




이렇게 롤 모델 역할을 모범적으로 수행해낸 아버지 덕분에, 'ATM'이니 '자트릭스'니 '애국자'니

별의별 소리를 다 듣더라도 난 결혼·출산 반드시 할 생각임. 돈이랑 상대가 없어서 문제지

오히려 이런 부담감을 가지면 가졌지:

'내가 가정을 꾸리게 되면 과연 우리 아버지만큼 의지가 되는 가장이 될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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