탱크 ‘설’을 아십니까? -1990년대 이전, 기자들의 한자 표현 방식
게시글 주소: https://orbi.kr/00072503707
***상꼰대의 옛 이야기입니다. 입시 사이트에는 맞지 않을 수도 있는. 하지만, 언론인을 꿈꾸는 분도 있을 듯 하여, 옛날 이야기를 전합니다. 그냥 심심할 때 웃자고 보십시오.
===========================================
기자 생활을 시작한 건 1990년 2월이었습니다.
기자 수습 생활은 대부분 사회부에서 시작합니다. 경찰서를 출입하면서 사건 기사를 챙기는 일부터 배우는 것이지요. 육하원칙에 따라, 사건의 내용을 쉽게 요약하는 법을 배우는 게 기사 작성의 출발이니까.
지금이야 ‘기레기’로도 불리지만, 당시 기자는 지금보다는 사회적 인식이 훨씬 좋았다고 봅니다. 그 직업적 자부심을 표상하는 건, 당시로서는 ‘특수 직업인들’만 가지고 다니던 삐삐였습니다. 1990년대 전반 이후 대중화됐지만, 1990년에 삐삐를 가지고 다니던 사람은 드물었습니다.
또 다른 하나는 ‘해당 직업인들만 사용하는 말’을 내가 사용한다는 것이었습니다. ‘해당 직업에서만 통용되는 은어’를 안다는 것만큼 귀속감을 높이는 것도 드물지요. ‘기자들이 한자를 표현하는 방식’도 그중 하나였습니다.
인터넷도 없고, 노트북은 제대로 보급되지 않았던 당시, 회사가 아닌 곳에서 기사를 작성하면 기자들은 회사에 전화를 걸어 기사를 ‘읊었습니다’. 팩스를 갖춘 곳도 많지 않던 시절이었으니까.
당시 신문 기사는 사람 이름을 적을 때 한자를 사용했지요.(방송은 ‘발음’으로 보도하니, 방송 기자들은 일반적으로 한자를 사용하지 않았습니다.)
예를 들어, 金虎重이 이름이라면, ‘성 김, 범 호, 무거울 중’이라고 하면 상대가 김호중의 정확한 한자어를 받아 적는 방식이었습니다.
한데 훈을 바로 알아듣기 어려운 한자도 숱합니다. 예를 들어, ‘原’의 훈은 ‘언덕 혹은 근원’입니다. 한데 ‘源’의 훈 역시 ‘근원’입니다. 만약 사람 이름이 ‘金原中’이라서 ‘성 김, 근원 원, 가운데 중’이라고 읊었지만, 기사를 받아 적는 사람이 ‘金源中’으로 잘못 받아적을 수도 있는 겁니다.
그래서 등장하는 게 ‘용례’입니다. ‘原’을 ‘강원도 할 때 원’이라고 부르는 것이지요.
그런데 이렇게 부르기도 힘든 경우가 있습니다.
‘卨’(설)이라는 한자가 있습니다. 일반 단어로는 거의 쓰이지 않고, 사람 이름에 주로 들어갑니다. 훈은 ‘사람 이름 혹은 (중국 왕조인) 은나라 시조 이름’입니다. 고종 때 이준 열사와 함께 헤이그에 파견됐던 3인의 한 분이셨던 이상설 선생의 설 자도 이것을 씁니다.
한데 이 한자를 전화로 어떻게 설명할까요? ‘이상설 선생 할 때 설’이라고 한들, 알아듣기 힘든 사람도 있을 겁니다.
이때 등장하는 게 한자의 모양을 본뜬 ‘훈’입니다. 卨 자를 잘 보시면 탱크처럼 생기지 않았나요? 그래서 기자들은 卨 자를 읊을 때 ‘탱크 설’이라고 표현했습니다. 그러면 그 누구라도 알아들으니까.
允(윤) 자도 마찬가지. 훈은 ‘맏(’맏이‘라는 의미) 혹은 진실로’입니다. 한데 모양새가 오징어 같지 않나요? 해서, 기자들은 이 한자를 ‘오징어 윤’이라고 불렀습니다.
卨이나 允이 모양새로 전달하는 경우였다면, 한자를 파자(破字)해서 전달하는 경우도 있었습니다. 喆(철)이 그런 경우였습니다.
喆의 훈은 ‘밝을’인데, 철학 할 때 쓰는 哲(철) 역시 훈은 ‘밝을’입니다. 그래서 喆은 ‘쌍길 철’이라고 불렀지요. 길할 吉(길) 자가 두 개 겹쳤으니까. 哲은 ‘철학할 때 철’이라고 불렀고요. 역시 철로 읽는 ‘물맑을 철(澈)’은 ‘물맑을 철’이라고 하는 대신 ‘물 수(氵) 변에 기를 육(育)에 칠 복(攵) 쓰는 철’ 혹은 ‘철수하다 할 때의 철(撤) 자에서 손 수(扌) 변 대신 물 수(氵) 변 쓰는 철’이라고 했고요.
이제 신문기사에서도 한자가 사라진 지 오래입니다. 기사를 전화로 부르는 경우도 거의 없고요. 允을 오징어로, 卨을 탱크로 부를 필요가 없는 것이지요.
그런 과정에서, 한 시대는 다음 시대에 자리를 내어주는 것이겠지요. 한데, 때로는 그때가 그립습니다. 역시 저는 꼰대인가 봅니다.
#탱크설 #오징어윤 #쌍길철 #기자들의한자표현방식 #1990년대
0 XDK (+0)
유익한 글을 읽었다면 작성자에게 XDK를 선물하세요.
-
진짜 모르겠다 그냥 홀홀홀 홀짝짝 독립시행인데 왜 체감이 그랬을까
-
Falling in math 244번
-
돈은 다 모았는데 시간이 없네요 여행가느라 수업을 뺄 수도 없는 노릇이고 ㅠ 다들...
-
대체 어케 하는 것임??!!!!?? 좀 쉽게 설명해줄 사람 없냐….
-
‘윤석열 파면’ 아쉽기만 한 일본…“훌륭한 대통령이었는데” 5
헌법재판소가 윤석열 전 대통령 파면 결정을 내린 뒤 일본 언론들이 그의 재임 기간에...
-
이런거 쓰면 우승 가능한가
-
젖지대머리 9
젖지대머리
-
레벨 올랐네 2
아
-
오늘의 아침식사 8
아침기차 타기 전에 역에서 먹은 우동
-
너무 어렵네
-
전공공부 1
갑자기 떠오른 생각인데 ‘공학’ 전반에 통하는 기초 학문이 있는지 어쩐지는 잘...
-
흠냐뇨이 왔저염>3< 16
모두들 에브리바디 하이
-
진짜 제가 알잘깔딱센 3머 국어 재밌게 해설해드림
-
볼에 여드름 남 3
방금 염증 주사 2만원짜리로 끔.살 하고 옴
-
현역이 n수생 칼럼을 어떻게 이김 수시제도 도입해서 현역만의 리그 만들어줘
-
잠을많이못자서 1
아침에굉장히힘들엇음 존나졸앗음
-
점심은 샐러드 2
네
-
언매 미적 생 지 작수 54455 —> 3모 31212 이번 3모 공통 21번 하나...
-
작년에 배웠던게 왜 기억이 안나냐...
-
서울이 법적으로 수도였던 적은 없음 노무현 때 대통령 방해하려고 성종때 경국대전 ㅇㅈㄹ 한거지
-
의사쌤 표정 어두워지면서 이명 때문에 모레 또 와야겠다고 하심.. ㅈ됐댜…
-
내 계좌 망함 2
2.2주석 입갤 ㅋㅋ
-
문과(자연과학 포함)는 인구의 2%면 충분하지 않음? 5
근데 왜 대학 모집 인원의 절반 이상이 문과임? 공학을 곁들이지 않은 자연과학과,...
-
특정안당하겠지
-
기출코드(수분감 진짜 작년에 다 외우다싶이 해서) 뉴런 시냅스 드릴 9평전까지 하고...
-
고3 3모 등급 기준으로
-
영어 풀때 해석 1
해석 하심? 저는 보통 그냥 영어로 받아들이긴 하는데...시다른분은 어떻게 하시는지 궁금함
-
작년 7월에 더 살걸 후회되네
-
국어 질문 3
조건을 갖추었음에도 조건을 구성했음에도 괜찮지 않나요? 왜 답이 5번일까요
-
대치동vs독서실 대치동에서 집까지는 왕복 2시간 좀 넘음
-
자기 신기 있다고 막 댓글 사람들 이렇다 저렇다는거 맞춰준다고 해놓고 내댓글만 댓글...
-
숏은 승리한다 1
버스 수익률 100퍼 돌파 cex
-
ㅈㄱㄴ
-
얼 1
버기! 오늘도 파이팅요
-
칼같이 나누고 이해는 확실히 시간쓰고 정리는 그냥 그렇구나 이렇게 하는게 갑 오브...
-
D-10 6
할수있다 해야한다
-
아아.. 기초적인 임플란트지..
-
내 인생이 걸려있는 중차대한 문제임
-
시력때매 3급인데 허 참...
-
ㅈㄴ 오래걸렸는데 해설지 중복순열딸깍 머지 .. 생각보다 확통 경우의 수만 내니까...
-
내가 후드에 청바지 조아해서 셀린느 후드에 청바지 입고 머리ㅜ거지존이라 셀린느 검정...
-
지금 이미지 세젤쉬, 미친기분 시작편 다 2-3회독 돌리고 미친개념 들어왔는데...
-
수학만 다운로드해서 들을거라 안겹치게가능한데 가능하신분 채팅주세요!
-
신청했는데 떨어져서 다른 지점에 전화 돌리면서 자리 남았는지 물어봐도 괜찮나요
-
눈물이 나는 이유가 그냥 벚꽃이 예뻐서 그런건지... 제가 사랑하는 사람이랑 단둘이...
-
n제 푸는데 변곡접선 쓰는 문제가 한문제집당 하나씩은 잇는 더 같은데 나올 가능성이 잇나?
-
08년생 정시러입니다. 수분감 하면서 문제집 하나 더 풀려고 하는데 고2마더텅 푸는...
-
윤씨 1
윤성훈 쌤 교재 중에 엠스킬 12를 작년에도 했어서 아직 책이 있는데 그냥 작년...
-
토요일에 살걸
언제나 재밌는 글 감사합니다
재밌었다니 감사합니다. 그저, 옛 생각이 나서요. 지금도 젊지만, 지금보다 더 젊었던 시절... 나의 화양연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