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럼)"글나?" 한마디가 사라진 세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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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월 29일 이태원에서 사고가 났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 내게 처음 다가온 감정은 "두려움"이었다.
150여명이 죽고 130여명이 다친 사고 자체의 누구도 감당할 수 없을 어둠이 두려운 것이 아니었다.
이번 사고로 인해 또 한번 곳곳에서 들춰질 우리 사회의 어둠이 더욱 두려워서였다.
난 어린시절 외할아버지 곁에서 자랐다.
외할아버지는 1934년 만주에서 태어나 격동의 한국사를 몸소 겪으신 산 역사의 증인이셨다.
3살 때 앓은 소아마비로 인해 평생 오른쪽 발목 아래를 못 쓰게 되었지만 어린 할아버지는 지팡이로 절뚝대며 걸어가는 대신 자전거를 타고 남들 앞에서 씽씽 달리기를 택했다.
우리 할아버지는 그런 분이셨다.
대한의 하늘이 다시 열리고 다시 조국으로 돌아온 할아버지를 맞이한 것은 서로에게 겨눠진 총부리와 그를 피하는 과정에서 싸늘하게 식어버린 6살 남짓의 여동생.
그러나 할아버지는 여동생을 따라 돌아오지 못할 길을 건너는 대신 여동생의 몫까지 살아가겠다 다짐하셨다.
우리 할아버지는 그런 분이셨다.
전쟁이 끝나고 제빵사업을 시작한 할아버지는 주변의 곱지않은 시선 속에서도 악착같이 일하며 제빵사업을 시작, 건빵을 군납하는 업체로 선정되며 크게 승승장구하였다.
외할머니를 만나시고 지금의 어머니와 외삼촌까지 낳으신 후 시작된 행복한 신혼생활.
그제서야 학습의 꿈을 다시 펴고 무려 60년대에 법대까지 졸업하신 할아버지였지만 친척간의 불화로 점점 경영은 방만해졌고 결국 파산해버린 기업에 대한 책임은 모두 장남인 할아버지에게 돌아왔다.
아내와 끝내 이혼하고 하루종일 쌓인 빚을 갚기 위해 뛰어다니며 단칸방에서 어린 두 자식을 끌어안고 있노라면 언제는 '아, 이대로 차라리 같이 영영 떠나버릴까' 같은 생각이 들곤 하셨단다.
하지만 끝내 자신의 특기인 '버티기'를 선택하신 할아버지는 결국 어머니를 당대 명문대에 보내고 활짝 웃는 얼굴로 딸의 첫 출근을 마중할 수 있었다.
우리 할아버지는 그런 분이셨다.
그렇게 곱게 길렀던 딸이 결혼한 이후 남편의 알코올 의존증으로 인한 폭행에 시달린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 할아버지는 일흔에 가까운 노구를 이끌고 집으로 찾아가 딸과 손자를 지키기 위해 같이 살겠노라 선언하였다.
우리 할아버지는 그런 분이셨다.
하지만 아이러니하게도 이런 온갖 슬픔과 역경을 거쳐온 우리 외할아버지에 대한 나의 어린 시절 인상은 단단하기는 커녕 무르다 못해 바보같은 할아버지였다.
어린 시절 책을 읽거나 뉴스를 보거나 친구랑 놀던 중 가끔씩 나에겐 내가 정립한 세상의 "이치", "상식", "정도"와 맞지 않는 일이 종종 발생했다.
이런 일들을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었던 어린 나는 그러한 세상의 "오류"들을 "제거"하고 "수정"하기 위해 늘 할아버지를 찾아갔다.
그러나 나의 이 오류들에 대한 장황한 설명을 모두 들은 우리 할아버지의 대답은 항상 "글나?" 였다.
"아니, 할부지. 글나? 가 아니라 이건 아니라니까요?"
"글나, 할부지가 보기엔 그런갑다 싶은디. 껄껄.
XX야. 시상(세상)은 니 편이 즐대루 아니데이.
근디 더 무신게 먼지 아나? 시상이랑 쌈질하믄 누가 디질진 몰라두,
항상 디질맹키로 힘든건 시상이 아니라 니인기라.
알겠제? 시상한테 한판 져준다꼬 니가 디지는건 아니여.
기냥 "글나? 니 이깃나? 담번은 니여!" 라구 넘기는게 이기는기라 카이."
이런 할아버지의 말씀을 난 항상 이해할 수 없었다.
항상 사람들은 나에게 이기는 게 최고이자 최선이라고 했는데, 지는게 이기는 거라니.
그러나 이제야 내가 깨달은 것은 할아버지의 "글나?"는 단순한 포기도 패배주의도 아니었다.
인간이 감당할 수 없는 큰 충격과 슬픔, 그리고 사회를 상대로 견디는 법에 대한 가르침이었다.
현대 사회는 이전과 비교하면 놀라우리만큼 안전하고 또 평온한 사회이다.
그러나 과도한 위생이 이내 알레르기와 같은 과민반응성 질병을 만들어냈듯이, 과도한 안전은 슬픔에 대한 알레르기를 만들어냈다.
인간의 면역체계는 외부의 이방인을 상대로 모든 수단을 총동원하여 이방인을 "소멸"시키려 하지만, 때문에 인체가 입는 피해 또한 상당하다.
그렇기에 면역체계는 설사 이방인이라 할지라도 큰 위협이 아니라는 것을 판단하면 공격하지 않고 공존을 택하였다.
하지만 위생이 개선되면서 사람들이 점점 이방인과의 접촉이 줄어들었고 결국 이로 인해 발생한 과도한 면역반응이 인체를 망가뜨리듯이, 과도한 평온은 우리의 슬픔과 불편함에 대한 과도한 반응을 만들어냈고 이내 사회를 망가뜨리기 시작했다.
어떤 부수적인 피해를 입더라도 감수하고 자신의 의식 속 "이방인"을 "소멸"시켜야만 하는 강박적 의식.
나는 그것을 모종의 "사회적 알레르기"라 정의하였다.
우리 세상에는 "글나?"의 미덕이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세상이 자신의 이치에 맞지 않더라도 한번쯤은 "글나?" 한마디로 넘어갈 수 있는 사회.
어느 이방인이 자신의 논리를 훼방놓더라도 제거하려 들지 않고 "글나?" 로 껄껄 웃으며 대답할 수 있는 사회.
할아버지께서 말씀하셨던 "글나?"의 참된 용법은 아마도 이것을 가르킨 것이지 않았을까.
이제 우리 할아버지는 곧 아흔을 목전에 남겨두신 노인이다.
몇년 전부터 부쩍 기억이 가물가물하시고 나를 알아보지 못하는 경우도 조금씩 늘어나기 시작했다.
그러나 할아버지는 강인하신 분이기에, 언젠가 당신을 데리러 온 누군가 앞에서도 이렇게 말씀하시리라.
"글나?"
이태원 사고 희생자 분들의 명복을 빕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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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귀비 & 황금손 ♡ 106
사진에 대한 자세한 설명은 시크릿! 쉿!!
와....
그렇죠.... 너무 사람들이 예민해진 것도 있네요....
정말 훌륭하신 분이시네요. 평생을 당신이 아닌 가족을 위해 사셨어요...
괜찮아
그럴수도 있지
김동욱선생님 강의 들으며 배운 것들중 가장 인상깊었던 거예요
엇, 저도 김동욱 선생님 덕분에 많은 인생을 배웠는데, 저 말고도 있었네요.
세상 흘러가는대로 살라는 말이 뭔 말인지 알게되는 요즘이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