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수생 이나은 [1159053] · MS 2022 · 쪽지

2022-08-08 22:37: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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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홉 권의 드릴로 남은 사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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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른 아침이었다. 문간반 툇마루에 앉아서 장씨가 드릴을 정리하고 있었다. 누구나 그렇듯이 그가 샤프로 문제를 푸는 정도의 공부를 하고 있었다면 나는 그냥 지나쳤을지도 모른다. 바탕과 빛깔이 다르고 디자인이 다른 갖가지 드릴을 대여섯 권이나 책상에 늘어놓은 채 그는 지우고 다듬고 스캔하는데 여념이 없었다.


“그거 팔 겁니까?”


아침 인사 겸 농담 삼아 나는 그에게 말을 걸었다.


“팔 거냐구요?”


갑자기 일손을 멈추더니 그는 내 손을 내려다보았다. 아니, 내가 들고 있는 일반물리학 교재를 유심히 쏘아보는 것이었다. 이윽고 내 바짓가랑이와 저고리 앞섶을 타고 꼬물꼬물 기어올라오는 그의 시선이 마침내 내 시선과 맞부딪치면서 차갑게 빛났다. 그는 얼굴이 시뻘겋게 달아오르는가 싶더니 어느새 입가에 냉소를 머금고 있었다.


“어떻게 보고 하시는 말씀인지는 모르지만……”


“제가 이거 실례했나 봅니다. 달리 무슨 뜻이 있어서가 아니고…… 다만 드릴이 하두 여러 권이라서…… 전 그저 많다는 의미루다…… ”


입을 꾹 다물고는 장씨가 더 이상 나를 상대하지 않으려는 의사를 분명히 했으므로 내겐 아무 할말이 없어져 버렸다. 그는 정리를 마친 드릴을 자기 오른편에 얌전히 모시고는 왼편에서 미적분 드릴을 집어 무릎 새에 끼더니만 지우개로 마치 양치질하듯 신중하게 겉표지와 여러 문제에 풀린 흔적을 제거하기 시작함으로써 내게서 사과할 기회를 아주 앗아가 버렸다. 나는 학생회를 맡아 다른 날보다 일찍 등교하려던 것도 까맣게 잊은 채로 장씨 앞에서 오래 밍기적거렸다. 그러나 장씨를 향한 그 찜찜한 마음 덕분에 비로소 장씨를 자세히 관찰할 기회를 얻었다. 여러 날 함께 살면서도 피차 밖으로 나돌며 빡빡하게 지내다 보니 이사오던 그날 이후로 변변히 대면조차 할 기회가 없었던 것이다.


보아하니 장씨의 스캔뜨기 실력은 보통에서 훨씬 벗어나 있었다. 사용하는 도구들도 전문 직업인 못잖아 구색을 맞춰 일습을 갖추고 있었다. 그리고 무릎 위엔 앞치마 대용으로 헌 내의를 펼쳐 단벌 외출복의 오손에 대비하고 있었다. 지우개가루와 먼지를 죄 떨어낸 다음 그는 손에 든 아이패드를 요리조리 돌려가며 본을 떴다. 비잉 펼쳐가며 문제집 전체를 한 번 지우고 나서 가볍게 솔질을 가하여 웬만큼 새것 같자 이번엔 다리미로 싹싹 문질러 결정적으로 새 종이가 되었다. 내 보기엔 그런 정도만으로도 훌륭한 것 같은데 장씨는 거기에 만족하지 않고 계속해서 같은 동작을 반복했다. 그만한 일에도 무척 힘이 드는지 장씨는 땀을 흘렸다. 숨을 헉헉거렸다. 침을 퉤퉤 뱉었다. 실상 그것은 침이 아니었다. 드릴을 드릴 아닌 무엇으로, 문제집 이상의 다른 어떤 것으로, 다시 말해서 수험생이 머리에다 꿰차는 물건이 아니라 옆구리 같은 데를 장식하는 것으로 바꿔놓으려는 엉뚱한 의지의 소산이면서 동시에 신들린 마음에서 솟는 끈끈한 분비물이었다. 장씨의 손이 방추(紡錘)처럼 기민하게 좌우로 쉴새없이 움직이고 있었다. 마침내 방금 찍어낸 새 책인 양 드릴이 번쩍번쩍 빛이 나게 되자 장씨의 시선이 내 손을 거쳐 얼굴로 올라왔다. 그는 활짝 웃고 있었다. 그의 눈이 자기 드릴만큼이나 요란하게 빛을 뿜었다.

(중략)

“일어나, 얼른 일어나라니까”


나 외엔 더 방해하고 싶지 않은지 강도의 목소리는 무척 낮고 조심스러웠다. 나는 일어나고 싶었지만 도무지 일어날 수가 없었다. 멱을 겨눈 식칼이 덜덜덜 위아래로 춤을 추었다. 만약 강도가 내 목통이라도 찌르게 된다면 그것은 고의에서가 아니라 지나친 떨림으로 인한 우발적인 상해일 것이었다. 무척 모자라는 강도였다. 나는 복면 위의 눈을 보는 순간에 상대가 그 방면의 전문가가 못 됨을 금방 알아차렸던 것이다.

 
딴에 진탕 마신 술로 한껏 용기를 돋웠을 텐데도 보기 좋을 만큼 큰 눈이 착하게만 타고난 제 정신을 어쩌지 못한 채 나를 퍽 두려워하고 있었다. 술로 간을 키우지 않고는 남의 집 담을 못 넘을 정도라면 강력 범행을 도모하는 사람으로서는 처음부터 미역국이었다.


“일어날 테니가 칼을 약간만 뒤로 물러 주시오”


강도는 내가 시키는 대로 했다.


“내놔, 얼른 내노라니까”


내가 다 일어나 앉기를 기다려 강도가 속삭였다.


“하라는 대로 하죠. 허지만 당신도 내가 하라는 대로 해야만 일이 수월할 거요”


잔뜩 의심을 품고 쏘아보는 강도를 향해 나는 덧붙여 말했다.


“집안에 문제집은 변변찮소. 책장 위에 숏컷하고 아래 서랍 속에 아마 동생이 풀다 남은 킬캠이 약간 있을 거요. 그 밖에 돈이 될 만한 건 당신이 알아서 챙겨 가시오”


강도가 더욱 의심을 두고 경거히 움직이려 하지 않았으므로 나는 시험삼아 조금 신경질을 부려 보았다.


“총무가 눈치채서 한바탕 소동을 벌려야만 시원하겠소? 난처해지기 전에 나를 믿고 일러주는 대로 하는 게 당신한테 이로울 거요”


한 차례 길게 심호흡을 뽑은 다음 강도는 마침내 결심했다는 듯이 독서대를 돌아 책장 쪽으로 향했다. 얌전히 구두까지 벗고 양말바람으로 들어온 강도의 발을 나는 그때 비로소 볼 수 있었다. 내가 그렇게 염려를 했는데도 강도는 와들와들 떨리는 다리를 옮기다가 그만 부주의하게 옆 방의 벽을 두드린 모양이었다. 옆 방 학생이 갑자기 투덜거리자 그는 질겁을 하고 엎드리더니 옆 방의 문에 속삭이며 사과하는 것이었다. 녀석이 도로 집중하기를 기다려 그는 복면 위로 칙칙하게 땀이 밴 얼굴을 들고 일어나서 내 위치를 힐끗 확인한 다음 본격적인 작업에 들어갔다. 터지려는 웃음을 꾹 참은 채 강도의 애교스런 행각을 시종 주목하고 있던 나는 살그머니 상체를 움직여 학생을 달랠 때 바닥 위에 떨어뜨린 식칼을 집어들었다.


“연장을 이렇게 함부로 굴리는 걸 보니 당신 경력이 얼마나 되는지 알 만합니다”


내가 내미는 칼을 보고 그는 기절할 만큼 놀랐다. 나는 사람 좋게 웃어 보이면서 칼을 받아가라는 눈짓을 보냈다. 그는 겁에 질려 잠시 망설이다가 내 재촉을 받고 후닥닥 달려들어 칼자루를 낚아채 가지고 다시 내 멱을 겨누었다. 그가 고의로 사람을 찌를 만한 위인이 못 되는 줄 일찍이 간파했기 때문에 나는 칼을 되돌려준 걸 조금도 후회하지 않았다. 아니나 다를까, 그는 식칼을 옆구리 쪽 허리띠에 차더니만 몹시 자존심이 상한 표정이 되었다.


“도둑맞을 문제집 하나 제대로 없는 주제에 이죽거리긴!”


“그래서 경험 많은 친구들은 우리 독서실을 거들떠도 안 보고 그냥 지나치죠”


“누군 뭐 들어오고 싶어서 들어왔나? 피치 못할 사정 땜에 어쩔 수 없이……”


나는 강도를 안심시켜 편안한 맘으로 돌아가게 만들 절호의 기회라고 판단했다.


“그 피치 못할 사정이란 게 대개 그렇습니다. 가령 수능을 잘 못봤다든가 마킹을 밀렸다든가 해서……”


그 순간 강도의 눈이 의심의 빛으로 가득 찼다. 분개한 나머지 이가 딱딱 마주칠 정도로 떨면서 그는 라운지를 향해 나갔다. 내 옆을 지나쳐 갈 때 그의 몸에서는 역겨울 만큼 술냄새가 확 풍겼다. 그가 허둥지둥 끌어안고 나가는 건 틀림없이 갈기갈기 찢어진 한 줌의 자존심일 것이었다. 애당초 의도했던 바와는 달리 내 방법이 결국 그를 편안케 하긴커녕 외려 더욱더 낭패케 만들었음을 깨닫고 나는 그의 등을 향해 말했다.


“재수한다고 꼭 늦은거란 법은 없어요. 혹 누가 압니까, 당신도 모르는 사이에 당신을 무시했던 어떤 현역이 당신의 밑을 깔아 줄지?”


“개수작 마! 그 따위 현역은 없다는 걸 난 똑똑히 봤어! 난 이제 아무도 안 믿어!”


그는 문 앞에 내려 놓은 드릴을 챙기고 있었다. 그 드릴을 보기 위해 스탠드를 켜고 싶은 충동이 불현듯 일었으나 나는 꾹 눌러 참았다. 1인실 문을 열고 복도로 내려선 다음 부주의하게도 그는 식칼을 들고 왔던 자기 본분을 망각하고 엉겁결에 다른 1인실로 들어가려 했다. 그의 실수를 지적하는 일은 훗날을 위해 나로서는 부득이한 조처였다.


“출구는 저쪽입니다”


복도 가운데에서 한동안 망연해 있다가 이윽고 그는 문 쪽을 향해 느릿느릿 걷기 시작했다. 비틀비틀 걷기 시작했다. 문에 다다르자 그는 상체를 뒤틀어 이쪽을 보았다.


“이래봬도 나 시대인재까지 나온 사람이오”


누가 뭐라고 그랬나. 느닷없이 그는 자기 학력을 밝히더니만 문을 열고는 보안등 하나 없는 칠흑의 어둠 저편으로 자진해서 삼켜져 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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