날개(6)
게시글 주소: https://orbi.kr/00057303439
이튿날 내가 눈을 떴을 때 아내는 내 머리맡에 앉아서 제법 근심스러운 얼굴이다.
나는 감기가 들었다. 여전히 으스스 춥고 또 골치가 아프고 입에 군침이 도는 것이 씁쓸하면서 다리팔이 척 늘어져서 노곤하다. 아내는 내 머리를 쓱 짚어 보더니 약을 먹어야지 한다. 아내 손이 이마에 선뜻한 것을 보면 신열이 어지간한 모양인데 약을 먹는다면 해열제를 먹어야지 하고 속생각을 하자니까 아내는 따뜻한 물에 하얀 정제약 네 개를 준다. 이것을 먹고 한잠 푹 자고 나면 괜찮다는 것이다. 나는 널름 받아먹었다. 쌉싸래한 것이 짐작 같아서는 아마 아스피린인가 싶다.
나는 다시 이불을 쓰고 단번에 그냥 죽은 것처럼 잠이 들어 버렸다.
나는 콧물을 훌쩍훌쩍 하면서 여러 날을 앓았다. 앓는 동안에 끊이지 않고 그 정제약을 먹었다.
그러는 동안에 감기도 나았다. 그러나 입맛은 여전히 소태처럼 썼다.
나는 차츰 또 외출하고 싶은 생각이 났다. 그러나 아내는 나더러 외출하지 말라고 이르는 것이다. 이 약을 날마다 먹고 그리고 가만히 누워 있으라는 것이다. 공연히 외출을 하다가 이렇게 감기가 들어서 저를 고생시키는 게 아니란다. 그도 그렇다. 그럼 외출을 하지 않겠다고 맹세하고 그 약을 연복하여 몸을 좀 보해 보리라고 나는 생각하였다.
나는 날마다 이불을 뒤집어쓰고 밤이나 낮이나 잤다. 유난스럽게 밤이나 낮이나 졸려서 견딜 수가 없는 것이다. 나는 이렇게 잠이 자꾸만 오는 것은 내가 몸이 훨씬 튼튼해진 증거라고 굳게 믿었다.
나는 아마 한 달이나 이렇게 지냈나보다. 내 머리와 수염이 좀 너무 자라서 후틋해서 견딜 수가 없어서 내 거울을 좀 보리라고 아내가 외출한 틈을 타서 나는 아내 방으로 가서 아내의 화장대 앞에 앉아 보았다. 상당하다. 수염과 머리가 참 상당하였다.
오늘은 이발을 좀 하리라고 생각하고 겸사겸사 고 화장품 병들 마개를 뽑고 이것저것 맡아 보았다. 한동안 잊어버렸던 향기 가운데서는 몸이 배배 꼬일 것 같은 체취가 전해 나왔다. 나는 아내의 이름을 속으로만 한 번 불러 보았다. “연심이—”하고…… 오래간만에 돋보기 장난도 하였다. 거울 장난도 하였다. 창에 든 볕이 여간 따뜻한 것이 아니었다. 생각하면 오월이 아니냐.
나는 커다랗게 기지개를 한 번 켜 보고 아내 베개를 내려 베고 벌떡 자빠져서는 이렇게도 편안하고 즐거운 세월을 하느님께 흠씬 자랑하여 주고 싶었다. 나는 참 세상의 아무것과도 교섭을 가지지 않는다. 하느님도 아마 나를 칭찬할 수도 처벌할 수도 없는 것 같다.
그러나 다음 순간 실로 세상에도 이상스러운 것이 눈에 띄었다. 그것은 최면약 아달린 갑이었다.
나는 그것을 아내의 화장대 밑에서 발견하고 그것이 흡사 아스피린처럼 생겼다고 느꼈다. 나는 그것을 열어 보았다. 꼭 네 개가 비었다.
나는 오늘 아침에 네 개의 아스피린을 먹은 것을 기억하고 있었다. 나는 잤다. 어제도 그제도 그끄제도…… 나는 졸려서 견딜 수가 없었다. 나는 감기가 다 나았는데도…… 아내는 내게 아스피린을 주었다. 내가 잠이 든 동안에 이웃에 불이 난 일이 있다. 그때에도 나는 자느라고 몰랐다. 이렇게 나는 잤다. 나는 아스피린으로 알고 그럼 한 달 동안을 두고 아달린을 먹어온 것이다. 이것은 좀 너무 심하다.
별안간 아뜩하더니 하마터면 나는 까무러칠 뻔하였다. 나는 그 아달린을 주머니에 넣고 집을 나섰다. 그리고 산을 찾아 올라갔다.
인간 세상의 아무것도 보기가 싫었던 것이다. 걸으면서 나는 아무쪼록 아내에 관계되는 일은 일 체 생각하지 않도록 노력하였다. 길에서 까무러치기 쉬우니까다. 나는 어디라도 양지가 바른 자리를 하나 골라 자리를 잡아 가지고 서서히 아내에 관하여서 연구할 작정이었다. 나는 길가의 돌 장판, 구경도 못한 진개나리꽃, 종달새, 돌멩이도 새끼를 까는 이야기, 이런 것만 생각하였다. 다행히 길 가에서 나는 졸도하지 않았다.
거기는 벤치가 있었다. 나는 거기 정좌하고 그리고 그 아스피린과 아달린에 관하여 연구하였다.
그러나 머리가 도무지 혼란하여 생각이 체계를 이루지 않는다. 단 오 분이 못가서 나는 그만 귀찮은 생각이 번쩍 들면서 심술이 났다. 나는 주머니에서 가지고 온 아달린을 꺼내 남은 여섯 개를 한꺼번에 질겅질겅 씹어 먹어 버렸다. 맛이 익살맞다. 그러고 나서 나는 그 벤치 위에 가로 기다랗게 누웠다. 무슨 생각으로 내가 그 따위 짓을 했나, 알 수가 없다. 그저 그러고 싶었다. 나는 게서 그냥 깊이 잠이 들었다. 잠결에도 바위틈으로 흐르는 물소리가 졸졸 하고 언제까지나 귀에 어렴풋이 들려 왔다.
내가 잠을 깨었을 때는 날이 환히 밝은 뒤다. 나는 거기서 일주야를 잔 것이다. 풍경이 그냥 노오랗게 보인다. 그 속에서도 나는 번개처럼 아스피린과 아달린이 생각났다.
아스피린, 아달린, 아스피린, 아달린, 맑스, 말사스, 마도로스, 아스피린, 아달린…… 아내는 한 달 동안 아달린을 아스피린이라고 속이고 내게 먹였다.
그것은 아내 방에서 이 아달린 갑이 발견된 것으로 미루어 증거가 너무나 확실하다.
무슨 목적으로 아내는 나를 밤이나 낮이나 재웠어야 됐나? 나를 밤이나 낮이나 재워 놓고, 그리고 아내는 내가 자는 동안에 무슨 짓을 했나? 나를 조금씩 조금씩 죽이려던 것일까? 그러나 또 생각하여 보면 내가 한 달을 두고 먹어 온 것이 아스피린이었는지도 모른다. 아내는 무슨 근심되는 일이 있어서 밤이면 잠이 잘 오지 않아서 정작 아내가 아달린을 사용한 것이나 아닌지? 그렇다면 나는 참 미안하다. 나는 아내에게 이렇게 큰 의혹을 가졌다는 것이 참 안됐다.
나는 그래서 부리나케 거기서 내려왔다. 아랫도리가 홰홰 내어 저이면서 어찔어찔한 것을 나는 겨우 집을 향하여 걸었다. 여덟 시 가까이였다.
나는 내 잘못된 생각을 죄다 일러바치고 아내에게 사죄하려는 것이다. 나는 너무 급해서 그만 또 말을 잊어버렸다. 그랬더니 이건 참 큰일 났다. 나는 내 눈으로 절대로 보아서 안 될 것을 그만 딱 보아 버리고 만 것이다.
나는 얼떨결에 그만 냉큼 미닫이를 닫고 그리고 현기증이 나는 것을 진정시키느라고 잠깐 고개를 숙이고 눈을 감고 기둥을 짚고 섰자니까, 일 초 여유도 없이 홱 미닫이가 다시 열리더니 매무새를 풀어헤친 아내가 불쑥 내밀면서 내 멱살을 잡는 것이다. 나는 그만 어지러워서 게가 나둥그러졌다.
그랬더니 아내는 넘어진 내 위에 덮치면서 내 살을 함부로 물어뜯는 것이다. 아파 죽겠다. 나는 사실 반항할 의사도 힘도 없어서 그냥 넙적 엎드려 있으면서 어떻게 되나 보고 있자니까, 뒤이어 남자가 나오는 것 같더니 아내를 한 아름에 덥석 안아 가지고 방으로 들어가는 것이다. 아내는 아무 말 없이 다소곳이 그렇게 안겨 들어가는 것이 내 눈에 여간 미운 것이 아니다. 밉다.
아내는 너 밤새워 가면서 도둑질하러 다니느냐, 계집질하러 다니느냐고 발악이다. 이것은 참 너무 억울하다. 나는 어안이 벙벙하여 도무지 입이 떨어지지를 않았다. 너는 그야말로 나를 살해하려던 것이 아니냐고 소리를 한 번 꽥 질러 보고도 싶었으나, 그런 긴가민가한 소리를 섣불리 입 밖에 내었다가는 무슨 화를 볼는지 알 수 없다. 차라리 억울하지만 잠자코 있는 것이 우선 상책인 듯시피 생각이 들길래, 나는 이것은 또 무슨 생각으로 그랬는지 모르지만 툭툭 떨고 일어나서 내 바지 포켓 속에 남은 돈 몇 원 몇십 전을 가만히 꺼내서는 몰래 미닫이를 열고 살며시 문지방 밑에다 놓고 나서는, 나는 그냥 줄달음박질을 쳐서 나와 버렸다.
0 XDK (+0)
유익한 글을 읽었다면 작성자에게 XDK를 선물하세요.
-
진짜 개 ㅈ같 밤샜음
-
얼버기 2
하지만 다시 잠을 선택
-
대학생임
-
오늘도 파이앗!!!
-
대학생은 가능한데... 고딩은 되나
-
하루에 한과목만 공부할 것을 추천하는 분들 많이 계시던데 이게 절대적일까요?? 0
인강 강사분들이나 유튜버 분들이 하루에 한과목만 공부해라고 하시더라구요 심지어 어떤...
-
아사람이 노래 더 잘 부를수도?...
-
보통 뭐 먼저 푸시나요?
-
얼버기 0
졸려요 ㅠ
-
무서워
-
나만 있어 ㄷㄷ 선생님도 아무도 없고
-
전공공부는 싫지만 학점 3.5는 받아가고 싶다
-
아진찌 좆같다 0
공부못하겟다하기싫다이미망햇다 월요일부터시험인데...
-
자야지 0
.
-
윗 대학 철학과랑 한급간 낮은 컴공이 있으면 여러분이 윗 대학 철학과를 가고 싶으면...
-
하 1
얼버기
-
이거보고 3
설레는데 정상인가요?
-
5월 재개강부터 김현우 선생님 수업 합류하는데 수2미적은 다 나가고 수1,...
-
수학머리가 있으면 훨씬 쉽게 수능 수학을 할 순 있지만 그게 없더라도 노력만 한다면...
-
어휴....
-
사탐런 해서 시간이 널널해졌다는게 무의식에 박혀있어서 그런가 요즘 너무...
-
여친 성폭행 막다가 ‘11살 지능’ 장애…범인은 “평생 죄인” 0
사진=KBS 캡처[이데일리 권혜미 기자] 처음 본 여성에 성폭행을 시도하고 이를...
-
좀 알려주세요.. i need money...
-
이그잼포유나 아잉카 같은 곳에 있는 어휘 고르기나 틀린 부분 찾아서 고치기 같은 거...
-
간만에 놀러와봄 2
점점 수능판에 관심이 적어지는듯
-
사상검증 ㅇㅈ 13
-
작수 5등급 국어 공부 한번도 안해봤는데 김동욱쌤 김승리쌤 두분중에 누구를 추천하시나용 ?ㅜㅜ
-
내일 운동 개 쌉조져버린다 관악산도 함 갔다 와야지
-
이원준 선생님 강의 듣고 비문학 완전 안정권으로 올리신 분 계신가요? 시간도 많이...
-
고2모 보니까 37만명정도 나오는데 이럼 국수탐선택에서도 유의미한 변화가 생길라나
-
귀가하기 3
알딸딸
-
남자쌤이랑 여자쌤 한분 알아봤는데 어느분이랑 하지..0
-
시발시발
-
후후 4
-
아오 홍대시치
-
이제는 그 모든 화살이 나에게 꽃힌다 이젠 그냥 내가 싫음 남들한테 피해만...
-
시험 D-3 7
솔랭의제왕혜윰
-
100원 200원까지 칼같이 하려는 애들 ㅡㅡ 난 좋아하는 친구면 돌아오는거...
-
바람이 부는데내 괴로움에는 이유가 없다.내 괴로움에는 이유가 없을까
-
그닥 부유하진 않은데?
-
ㅇㅈ 3
"이제" 공부 시작한다
-
내일은 금요일이니까 새르비가 좀 활발하려나..
-
간만에 새르비 참여하려했는데 리젠이 전혀 안돌자나,,,? 다들 자러간거야?
-
평소엔 2시까진 많은데 노잼티비네 오늘 좀
-
되는대로 공뷰하는거 ㄹㅇ 그만해야하는데..
-
고통스럽다기보단 그냥 행복함 오래 이어지지만 않는다면야 자꾸 바라보고 싶어서 고개...
-
몇년도 기출부터 다루고 있나요??... 생글생감 에필로그 기출 지문이랑 겹치는 건 없나요??
-
굿나잇 1
자러감
-
카이스트 친구들... 오늘 시험끝나서 만났는데 오랜만인데도 반겨줘서 너무...
날개의 이 부분에 대한 좋은 평론을 한 번 읽은 적이 있습니다.
황도경 평론가는 '아스피린과 아달린'이 단순히 감기약과 수면제라는 의미상의 대립만을 보여주는 게 아니라고 합니다.
언어의 유사성에도 주목하는데요. 둘다 '아'로 시작해서 '린'으로 끝나는 언어적 유사성을 가지고 있습니다.
즉 아스피린과 아달린은 단순히 아내가 나를 어떻게 인식하는 지를 보여주는 것을 넘어서
굉장히 유사하지만 대립적인 것에 대한 화자의 고찰이 드러나는 부분이라고 해석할 수 있습니다.
마르크스, 말사스, 마도로스 부분도 마찬가지입니다.
좋은 정보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