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laude​ Debussy [870531] · MS 2019 · 쪽지

2022-05-15 07:16: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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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모(日暮) 창산— 


날은 저물었다. 아차! 저물지 않은 것으로 하는 것이 좋을까 보다. 


날은 아직 저물지 않았다. 


그러면 아까 장만해 둔 세간 기구(器具)를 내세워 어디 차근차근 살림살이를 한번 치뤄 볼 천우(天佑)의 호기(好機)가 배 앞으로 다다랐나 보다. 자 — 


태생은 어길 수 없어 비천한 '타'를 감추지 못하는 딸— (전기(前記) 치사(侈奢)한 소녀 운운(云云)은 어디 까지든지 이 바보 이상(李箱)의 호의에서 나온 곡해다. 모파상의'지방 덩어리'를 생각하자. 가족은 미만(未滿) 14세의 딸에게 매음(賣淫)시켰다. 두 번째는 미만(未滿) 19세의 딸이 자진(自進)했다. 아― 세 번째는 그 나이 스물두 살이 되던 해 봄에 얹은 낭자를 내리우고 게다 다홍댕기를 드려 늘어트려 편발 처자(妻子)를 위조(僞造)하여서는 대거(大擧)하여 강행(强行)으로 매끽(賣喫)하여 벌었다. 


비천한 뉘 집 딸이 해빙기의 시냇가에 서서 입술이 낙화지듯 좀 파레지면서 박빙 밑으로는 무엇이 저리도 움직이는가 고 고개를 갸웃거리는 듯이 숙이고 있는데 봄 방향(芳香)을 품은 훈풍(薰風)이 불어와서 스커트, 아니 너무나 슬퍼 보이는, 아니 좀 슬퍼 보이는 홍발(紅髮)을 건드리면

 

좀 슬퍼 보이는 홍발(紅髮)을 나붓나붓 건드리면— 


여상(如上)이다. 이 개기름 도는 가소로운 무대를 앞에 두고 나는 나대로 나다웁게 가문이라는 자지레한 '투(套)'는 어떤 일이 있더라도 잊어버리지 않고 채석장 희멀건 단층을 건너다보면서 탄식 비슷이, 


'지구(地球)를 저며내는 사람들은 필시 자연파괴자리라.'는 둥, 


'개아미 집이야말로 과연 정연(整然)하구나.'라는 둥, 


'비가 오면, 아― 천하(天下)에 비가 오면,' 


'작년에 났던 초목이 올해에도 또 돋으려누. 귀불귀(歸不歸)란 무엇인가.'라는 둥— 


치레 잘 하면 제법 의젓스러워도 보일 만한 가장 한산(閑散)한 과제(課題)로만 골라서 점잖게 방심(放心)해 보여 놓는다. 


정말일까? 거짓말일까. 정희가 불쑥 말을 한다. 한 소리가 '봄이 이렇게 왔군요.' 하고 웃니는 좀 사이가 벌어져서 보기 흉한 듯하니까 살짝 가리고 곱다고 자처(自處)하는 아랫니를 보이지 않으려고 했지만 부지불식(不知不識) 간에 그렇게 내어다 보인 것을 또 어쩝니까 하는 듯싶이 가증하게 내어보이면서 또 여간해서 어림이 서지 않는 어중간 얼굴을 그 우에 얹어 내세우는 것이었다. 


좋아, 좋아, 좋아, 그만하면 잘 되었어. 


나는 고개 대신에 단장을 끄떡끄떡 해 보이면서 창졸간에 그만 정희 어깨 우에다 손을 얹고 말았다. 


그랬더니 정희는 저윽히 해괴해 하노라는 듯이 잠시는 묵묵하더니— 


정희도 문벌이라든가 혹은 간편히 말해 에티켓이라든가 제법 배워서 짐작하노라고 속삭이는 것이 아닌가. 


꿀꺽! 


넘어가는 내 지지한 종생, 이렇게도 실수가 허(許)해서야 물화적(物貨的) 전생애(全生涯)를 탕진해 가면서 사수하여온 산호편의 본의가 대체 어디 있느냐? 내내(乃乃) 울화가 북받쳐 혼도할 것 같다. 


흥천사(興天寺) 으슥한 구석방에 내 종생의 갈력(竭力)이 정희를 이끌어 들이기도 전에 나는 밤 쓸쓸히 거짓말깨나 해놓았나 보다. 


나는 내가 그윽히 음모한 바 천고불역(千古不易)의 탕아, 이상(李箱)의 자지레한 문학(文學)의 빈민굴(貧民窟)을 교란(攪亂)시키고자 하던 가지가지 진기(珍奇)한 연장이 어느 겨를에 뻬물르기 시작한 것을 여기서 깨단해야 되나 보다. 사회(社會)는 어떠쿵, 도덕(道德)이 어떠쿵, 내면적(內面的) 성찰(省察), 추구(追求), 적발(摘發), 징벌(懲罰)은 어떠쿵, 자의식과잉(自意識過剩)이 어떠쿵, 제 깜냥에 번지레한 칠(漆)을 해 내어 걸은 치사스러운 간판(看板)들이 미상불(未嘗不) 우스꽝스럽기가 그지없다. 


'독화(毒花)' 


족하(足下)는 이 꼭두각시 같은 어휘(語彙) 한 마디를 잠시(暫時) 맡아 가지고 계셔 보구려? 


예술(藝術)이라는 허망(虛妄)한 아궁지 근처(近處)에서 송장 근처(近處)에서보다도 한결 더 썰썰 기고 있는 그들 해반죽룩한 사도(死都)의 혈족(血族)들 땟국내 나는 틈에가 끼어서, 나는— 


내 계집의 치마 단속곳을 갈가리 찢어 놓았고, 버선 켤레를 걸레를 만들어 놓았고, 검던 머리에 곱던 양자(樣姿), 영악(獰惡)한 곰의 발자국이 질컥 디디고 지나간 것처럼 얼굴을 망가뜨려 놓았고, 지기(知己) 친척(親戚)의 돈을 뭉청 떼어먹었고, 좌수터 유래(由來) 깊은 상호(商號)를 쑥밭을 만들어 놓았고, 겁쟁이 취라자(取利者)는 고랑때를 먹여 놓았고, 대금업자(貸金業者)의 수금인(收金人)을 졸도(卒倒)시켰고, 사장(社長)과 취체역(取締役)과 사돈과 아범과 애비와 처남(妻男)과 처제(妻弟)와 또 애비와 애비의 딸과 딸, 이 허다중생(許多衆生)으로 하여금 서로 서로 이간을 붙이고 붙이게 하고 얼버무려서 싸움질을 하게 해놓았고, 사글세방(貰房) 새 다다미에 잉크와 요강과 팥죽을 엎질렀고, 누구누구를 임포텐스를 만들어 놓았고— 


'독화(毒花)'라는 말의 콕 찌르는 맛을 그만하면 어렴풋이나마 어떻게 짐작이 서는가 싶소이까. 


잘못 빚은 증(蒸)편 같은 시(詩) 몇 줄, 소설(小說) 서너 편을 꿰어 차고 조촐하게 등장(登場)하는 것을 아 무엇인줄 알고 깜빡 속고 섣불리 손뼉을 한두 번 쳤다는 죄(罪)로 제 계집 간음당한 것보다도 더 큰 망신을 일신(一身)에 짊어지고 그리고는 앙탈 비슷이 시침이를 떼지 않으면 안 되는 어디까지든지 치사스러운 예의절차(禮儀節次)— 마귀(魔鬼)(터주가)의 소행(所行)(덧났다)이라고 돌려버리자? 


'독화(毒花)' 


물론 나는 내일 새벽에 내 길들은 노상(路上)에서 무려 내게 필적하는 한 숨은 탕아를 해후할런지도 마치 모르나, 나는 신바람이 난 무당처럼 어깨를 치켰다 젖혔다하면서라도 풍마우세(風磨雨洗)의 고행(苦行)을 얼른 그렇게 쉽사리 그만두지는 앓는다. 


아― 어쩐지 전신이 몹시 가렵다. 나는 무연(無緣)한 중생(衆生)의 뭇 원한 탓으로 악역(惡疫)의 범함을 입나보다. 나는 은근히 속으로 앓으면서 토일렡 정한 대야에다 양(兩) 손을 정하게 씻은 다음 내 자리로 돌아와 앉아 차근차근 나 자신을 반성 회오— 쉬운 말로 자지레한 세음을 좀 놓아보아야겠다. 


에티켓? 문벌(門閥)? 양식(良識)? 번신술(翻身術)? 


그렇다고 내가 찔끔 정희 어깨 우에 얹었든 손을 뚝 떼인다든지 했다가는 큰 망발이다. 일을 잡치리라. 어디까지든지 내 뺨의 홍조(紅潮)만을 조심하면서 좋아, 좋아, 좋아, 그래만 주면 된다. 그리고 나서 피차 다 알아들었다는 듯이 어깨에 손을 얹은 채 어깨를 나란히 흥천사(興天寺) 경내로 들어갔다. 가서 길을 별안간 잃어버린 것처럼 자분참 산(山) 우으로 올라가버린다. 산 우에서 이번에는 정말 포즈를 할 일 없이 무너뜨렸다는 것처럼 정교하게 머뭇머뭇 해준다. 그러나 기실 말짱하다. 


풍경(風磬) 소리가 똑 알맞다. 이런 경우에는 제법 번듯한 식자(識字)가 있는 사람이면— 


아― 나는 왜 늘 항례(恒例)에서 비껴 서려드는 것일까? 잊었느냐? 비싼 월사(月謝)를 바치고 얻은 고매한 학문과 예절을, 


현역(現役) 육군중좌(陸軍中佐)에게서 받은 추상열일의 훈육(訓育)을 왜 나는 이 경우에 버젓하게 내세우지를 못하느냐? 


창연(愴然)한 고찰(古刹) 유루(遺漏)없는 장치(裝置)에서 나는 정신차려야 한다. 나는 내 쟁쟁한 이력을 솔직하게 써먹어야 한다. 나는 고개를 숙이고 담배를 한 대 피워 물고 도장(屠場)에 들어가는 소, 죽기보다 싫은 서툴고 근질근질한 포즈, 체모(體貌) 독주(獨奏)에 어지간히 성공해야만 한다. 


그랬더니 그만두 한다. 당신의 그 어림없는 몸치렐랑 그만 두세요. 저는 어지간히 식상이 되었습니다 한다. 


그렇다면? 


내 꾸준한 노력도 일조일석에 수포로 돌아가는 것이 아닌가. 


대체 정희라는 가련한 '석녀'가 제 어떤 재간으로 그런 음흉한 내 간계를 요만큼까지 간파했다는 것이다. 


일시에 기진한다. 맥은 탁 풀리고는 앞이 팽 돌다 아찔 하는 것이 이러다가 까무러치려나 보다고 극력(極力) 단장을 의지하여 버텨보노라니까 희(噫)라! 내 기사회생의 종생도 이번만은 회춘(回春)하기 장히 어려울 듯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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