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생기(3)
게시글 주소: https://orbi.kr/00056641141
선생님! 어제 저녁 꿈에도 저는 선생님을 만나뵈었습니다. 꿈 가운데 선생님은 참 다정하십니다. 저를 어린애처럼 귀여워해 주십니다.
그러나 백일(白日) 아래 표표(飄飄)하신 선생님은 저를 부르시지 않습니다
비굴이라는 것이 무슨 빛으로 되어 있나 보시랴거든 선생님은 거울을 한번 보아 보십시오. 거기 비치는 선생님의 얼굴빛이 바로 비굴이라는 것의 빛입니다.
헤어진 부인과 삼년을 동거하시는 동안에 너 가거라 소리를 한 마디도 하신 일이 없다는 것이 선생님의 유일의 자만이십디다그려! 그렇게까지 선생님은 인정에 구구하신가요.
R과도 깨끗이 헤어졌습니다. S와도 절연한 지 벌써 다섯 달이나 된다는 것은 선생님께서도 믿어 주시는 바지요? 다섯 달 동안 저에게는 아무것도 없습니다. 저의 청절을 인정해 주시기 바랍니다.
저의 최후까지 더럽히지 않은 것을 선생님께 드리겠습니다. 저의 히멀건 살의 매력이 이렇게 다섯 달 동안이나 놀고 없는 것은 참 무엇이라고 말할 수 없이 아깝습니다. 저의 잔털 나스르르한 목, 영한 온도가 선생님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선생님이어! 저를 부르십시오. 저더러 영영 오라는 말을 안 하시는 것은 그것 역시 가신쩍 경우와 똑 같은 이론에서 나온 구구한 인생 변호의 치사스러운 수법이신가요?
영원히 선생님 '한분'만을 사랑하지요. 어서 어서 저를 전적으로 선생님만의 것을 만들어 주십시오. 선생님의 '전용'이 되게 하십시오.
제가 아주 어수룩한 줄 오산하고 계신 모양인데 오산 치고는 좀 어림없는 큰 오산이리다.
네 딴은 제법 든든한 줄만 믿고 있는 네 그 안전지대라는 것을 너는 아마 하나 가진 모양인데 그까짓 것쯤 내 말 한 마디에 사태가 나고 말리라, 이렇게 일러 드리고 싶습니다. 또—
예끼! 구역질 나는 인생 같으니 이러고도 싶습니다.
3월 3일날 오후 두 시에 동소문(東小門) 버스 정류장(停留場) 앞으로 꼭 와야 되지 그렇지 않으면 큰일 나요 내 징벌을 안 받지 못하리다.
만 19세 2개월을 맞이하는
정희(貞姬) 올림
이상(李箱) 선생님 께
물론 이것은 죄다 거짓부렁이다. 그러나 그 일촉즉발의 아슬아슬한 용심법(用心法)이 특히 그 중에도 결미(結尾)의 비견할 데 없는 청초(淸楚)함이 장히 질풍신뢰를 품은 듯한 명문이다.
나는 까무러칠 번하면서 혀를 내어둘렀다. 나는 깜빡 속기로 한다. 속고 만다.
여기 이 이상(李箱) 선생님이라는 허수아비 같은 나는 지난 밤 사이에 내 평생을 경력(經歷)했다. 나는 드디어 쭈굴쭈굴하게 노쇠해 버렸던 차에 아침(이 온 것)을 보고 이키! 남들이 보는 데서는 나는 가급적 어쭙지않게(잠을) 자야 되는 것이어늘, 하고 늘 이를 닦고 그리고는 도로 얼른 자 버릇하는 것이었다. 오늘도 또 그럴 세음이었다.
사람들은 나를 보고 짐짓 기이하기도 해서 그러는지 경천동지의 육중한 경륜을 품은 사람인가 보다고들 속는다. 그러니까 고렇게 하는 것이 내 시시한 자세나마 유지시킬 수 있는 유일무이의 비결이었다. 즉 나는 남들 좀 보라고 낮에 잔다.
그러나 그 편지를 받고 흔희작약, 나는 개세(蓋世)의 경륜과 유서의 고민을 깨끗이 씻어버리기 위하여 바로 이발소로 갔다. 나는 여간 아니 호걸답게 입술에다 치분을 허옇게 묻혀가지고는 그 현란한 거울 앞에 가 앉아 이제 호화장려(豪華壯麗)하게 개막하려드는 내 종생을 유유(悠悠)히 즐기기로 거기 해당하게 내 맵시를 수습하는 것이었다.
위선 그 작소(鵲巢)라는 뇌명(雷名)까지 있는 봉발(蓬髮)을 썰어서 상고머리라는 것을 만들었다. 오각수는 깨끗이 도태(淘汰)해 버렸다. 귀를 우비고 코털을 다듬었다. 안마(按摩)도 했다. 그리고 비누 세수를 한 다음 문득 거울을 들여다보니 품(品) 있는 데라고는 한 귀퉁이도 없어 보이는 듯하면서 또한 태생(胎生)을 어찌 어기리오, 좋도록 말해서 라파엘 전파 일원 같이 그렇게 청초한 백면서생이라고도 보아줄 수 있지 하고 실없이 제 얼굴을 미남자거니 고집하고 싶어 하는 구지레한 욕심을 내심 탄식하였다.
아차! 나에게도 모자가 있다. 겨울내 꾸겨박질러 두었던 것을 부득부득 끄집어내어다 15분간 세탁소로 가지고 가서 멀쩡하게 만들었다. 그리고 흰 바지저고리에 고동색 대님을 다 치고 차림차림이 제법 이색이 있다. 공단은 못되나마 능직 두루마기에 이만하면 고왕금래 모모(某某)한 천재의 풍모에 비겨도 조곰도 손색이 없으리라. 나는 내 그런 여간 이만저만 하지 않은 풍모를 더욱더욱 이만저만 하지 않게 모디파이어 하기 위하여 가늘지도 굵지도 않은 고다지 알맞은 단장을 하나 내 손에 쥐어주어야 할 것도 때마침 잊어버리지는 않았다.
별 수 없이—
오늘이 즉 3월 3일인 것이다.
나는 점잖게 한 30분쯤 지각해서 동소문(東小門) 지정받은 자리에 도착하였다. 정희는 또 정희대로 아주 정희다웁게 한 30분쯤 일찍 와서 있다.
정희의 입상은 제정 노서아쩍 우표 딱지처럼 적잖이 슬프다. 이것은 아직도 얼음을 품은 바람이 해토(解土)머리답게 싸늘해서 말하자면 정희의 모양을 얼마간 침통하게 해 보일 탓이렷다.
나는 이런 경우에 천만(千萬) 뜻밖에도 눈물이 핑 눈에 그뜩 돌아야 하는 것이 꼭 맞는 원칙(原則)으로서의 의표(意表)가 아닐까 그렇게 생각하면서 저벅저벅 정희 앞으로 다가갔다.
우리들은 이 땅을 처음 찾아온 제비 한 쌍처럼 잘 앙증스럽게 만보하기 시작했다. 걸어가면서도 나는 내 두루마기에 잡히는 주름살 하나에도 단장을 한번 휘저었는 곡절에도 세세히 조심한다. 나는 말하자면 내 우연한 종생을 깜쪽스럽도록 찬란하게 허식(虛飾)하기 위하여 내 박빙을 밟는 듯한 포즈를 아차 실수로 무너뜨리거나 해서는 절대로 안 된다는 것을 굳게굳게 명(銘)하고 있는 까닭이다.
그러면 맨 처음 발언으로는 나는 어떤 기절처참(奇絶慘絶)한 경구(警句)를 내어놓아야 할 것인가, 이것 때문에 또 잠깐 머뭇머뭇 하지 않을 수도 없었지만 그렇다고 바로 대이고 거 어쩌면 그렇게 똑 제정 로서아쩍 우표 딱지 같이 초초(楚楚)하니 어쩌니 하는 수는 차마 없다.
나는 선뜻
'설마가 사람을 죽이느니.'
하는 소리를 저 배 속에서부터 우러나오는 듯한 그런 까라앉은 목소리에 꽤 명료한 발음을 얹어서 정희 귀 가까이다 대이고 지껄여 버렸다. 이만하면 아마 그 경우의 최초의 발성으로는 무던히 성공한 편이리라. 뜻인즉, 네가 오라고 그랬다고 그렇게 내가 불쑥 올 줄은 너 꿈에도 생각하지 못했으리라는 꼼꼼한 의도다.
나는 아침 반찬으로 콩나물을 3전어치는 안 팔겠다는 것을 교묘히 무사히 3전어치만 살 수 있는 것과 같은 미끈한 쾌감을 맛본다. 내 딴은 다행히 노랑돈 한푼도 참 용하게 낭비하지는 않은 듯싶었다.
그러나 그런 내 청천(晴天)에 벽력(霹靂)이 떨어진 것 같은 인사에 대하여 정희는 실로 대답이 없다. 이것은 참 큰일이다.
아이들이 고추 먹고 맴맴 담배 먹고 맴맴 하고 노는 그런 암팡진 수단으로 그냥 단번에 나를 어지러뜨려서는 넘어뜨려버릴 작정인 모양이다.
정말 그렇다면!
이 상쾌한 정희의 혹호(確乎) 부동자세야말로 엔간치 않은 출품(出品)이 아닐 수 없다. 내가 내어놓은 바 살인촌철은 그만 즉석에서 분쇄되어 가엾은 불작(不作)으로 내려떨어지고 마는 것이다 하고 나는 느꼈다.
나는 나로서 할 수 있는 가장 큰 규모의 손짓발짓을 한벌 해 보이고 이윽고 낙담하였다는 것을 표시하였다. 일이 여기 이른 바에는 내 포즈 여부(與否)가 문제 아니다. 표정도 인제 더 써먹을 것이 남아 있을 성싶지도 않고 해서 나는 겸연쩍게 안색을 좀 고쳐가지고 그리고 정희! 그럼 나는 가겠소, 하고 깍듯이 인사하고 그리고?
나는 발길을 돌쳐서 집을 향해 걷기 시작했다. 내 파란만장의 생애가 자지레한 말 한 마디로 하여 그만 회신(灰燼)으로 돌아가고 만 것이다. 나는 세상에도 참혹한 풍채 아래서 내 종생을 치룬 것이다 고 생각하면서 그렇다면 그럼 그럴 성싶기도 하게 단장도 한두 번 휘두르고 입도 좀 일기죽일기죽 해보기도 하고 하면서 행차하는 체해 보인다.
0 XDK (+0)
유익한 글을 읽었다면 작성자에게 XDK를 선물하세요.
-
공대 갈건데 2 0
물리 싫어
-
백분위만점자는 모르겠고 0 0
백만장자 되고싶다
-
나 금태 만들게 맞팔좀 0 0
ㅇ
-
백분위만점자가되고싶다 0 0
28설대는표점아니고백분위봐서
-
2학기 시간표 짰다 1 0
13학점만 들을꺼다
-
어쩌다 그 시간에 올리시는 걸까 흠
-
평우구나 7 1
녀석 잘 지내니
-
사탐런 생윤 쌩노베 조언좀요ㅠ 1 0
리밋 올림픽 하고나서 임정환거 실모 어떤가요? 수특 수완은 기출 끝내고 할까요?...
-
지구과학교육과vs화학교육과 1 0
흠…
-
더프 보정 컷 추측 해봄 1 0
국어 화작 1컷 91 2컷 84 수학 확통 1컷 85 2컷 76 영어 1등급 8%...
-
한양대지인의 주장에대해서어떻게생각하십니까
-
아 나도 에피달고싶다 2 1
한주리랑 보라색이 너무 잘 어울리는데 하..
-
21 22 30틀렷는데 21 그래프잘그려놓고 계산실수조지고 22는 아예 못풀고...
-
이미 온갖 몸 비틀기에 입학처의 메시급 드리블로 고려대보다 높아보이는 착시 효과를...
-
오르비에 활기를 넣어주신 5 0
모 오르비언"들"에게 감사를 표합니다
-
궁금한개 3 0
설대 원래 반수생 많나 아님 오르비 특성상 많아보이는건가
-
새르비기념맞팔구 7 0
은테 되고 싶어여
-
난 사1과1 왜하는거지 3 2
화학 그래도 사람처럼 해서 못버리겟음 물투병신고아과목은버리는게맞음
-
공과대학을 가고싶다 0 0
경북부산공까지는 옮길게
-
고려대좀 ㅅㅂ 8 2
보내주십시오.
-
나도 7모인?증 29 1
설대식 462.2
-
광장에 한 그루 묘목을 심었다. 불행을 먹고 자란 나무였지만 그들은 그것을 추모의...
-
수학8488단 4 0
실력이 조금씩은 느는것같긴 한데 딱 이 라인 들어오고 나서 늘어나는 속도가 느려짐요..
-
나도곧틀딱이네 1 0
유언장써야지 ㅜㅜ
-
사1과1은 포지션이 너무 애매함 10 1
근데 원과목 백분위 3 올리는 것보다 사탐 노베에서 백분위 99 찍기가 훨씬 쉬워서...
-
7모 ㅇㅈ 21 1
뭐가올해게~ 패패?패승..
-
잘생기고싶다 2 0
공부고뭐고잘생긴게최고야
-
내가 딸수있는 면허는 1 0
운전 면허뿐
-
생윤 누가 쉽다했냐 2 1
환경윤리 정답률이 반타작 수준인데 ㅋㅋ
-
자연대가고싶다 2 0
-
인생 첫 모의고사 만점 과목 8 2
선택국사
-
저는 집에 갈 거임 2 0
-
외지주 ㅈㄴ 웃기네 0 0
이도규 대사로 이지영 틀포티 고백 오마주 ㅋㅋ
-
나는 천문학과 갈거임 2 0
천문학적인 돈을 벌고싶거든.
-
히든카이스 난이도 0 0
작년 히카 평보니까 쉽다는 평이 지배적이던데 올해는 어떰? 히카 히든카이스 킬캠...
-
안녕하세여 7 2
반가워여
-
다같이수특피는거여그냥 8 1
대학이족같잖아 나한테 수특피고 서바 풀라고 강요하잖아 그럼 그냥 하는거여 조지면 군대가는겨
-
Im fcked off 1 0
Jae su.... 는 안된다
-
의사가되면 2 0
의사표현능력이좋아지나요
-
새기분 8월에 들으면 늦나요? 0 0
문학만요!
-
저질러 버렸는데 답은 맞았네요 f(t)->(0,f(0))점대칭 정도로 생각하고...
-
잘자르비 9 2
7시 반에 일어날거임
-
지금이 좋은때야~
-
46일차 5 1
4규 수2 극한 끝 어제그제 쌓아둔 오답 짬처리 간쓸개 5-1 3일차 수학 공통...
-
메디컬 가고싶긴하지만 3 1
진짜 하고싶은 일도 아니고 오직 돈과 명예땜에 (갈수만있다면) 가고싶은거 사실...
-
그냥 공대 보내주면 4 0
석사 하고 열심히 살겠습니다
-
중1때로 돌아가고 싶다 6 1
딱히 뭔가를 바꾸고 싶은 건 아니고 엔딩까지 본 게임을 다시 처음부터 플레이하는 것과 같은 이유..
-
5모 수학 4 6모 수학 4 6 1
6모 안정 3이라매.... 안정 3이라매....
-
미적하다가 28 29 30은 죽어도 못맞추겠어서 확통런했습니다 1학기 내신으로...
첫번째 댓글의 주인공이 되어보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