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월 12일(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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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든 사건이라는 이름 붙을 만한 것들은 다― 끝났다. 오직 이제 남은 것은 ‘그’라는 인간의 갈 길을 그리하여 갈 곳을 선택하며 지정하여 주는 일뿐이다. ‘그’라는 한 인간은 이제 인간의 인간에서 넘어야만 할 고개의 최후의 첨편에 저립하고 있다. 이제 그는 그 자신을 완성하기 위하여 그리하여 인간의 한 단편으로서의 종식(終熄)을 위하여 어느 길이고 걷지 아니하면 아니될 단말마(斷末魔)다.
작가는 ‘그’로 하여금 인간세계에서 구원받게 하여 보기 위하여 있는 대로 기회와 사건을 주었다. 그러나 그는 구조되지 않았다. 작자는 영혼을 인정한다는 것이 아니다. 작자는 아마 누구보다도 영혼을 믿지 아니하는 자에 속할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에게 영혼이라는 것을 부여(賦與)치 아니하고는― 즉 다시 하면 그를 구하는 구하는 최후에 남은 한 방책은 오직 그에게 영혼(靈魂)이라는 것을 부여하는 것 하나가 남았다.)
황막한 벌판에는 흰눈이 일면으로 덮이어 있었다. 곳곳에 떨면서 있는 왜소한 마른 나무는 대지의 동면을 수호(守護)하는 가련한 패잔병(敗殘兵)과도 같았다. 그 위를 하늘은 쉬일 사이도 없이 함박눈을 떨구고 있었다. 소와 말은 오직 외양간에서 울었다. 사람은 방 안으로 이렇게 세계를 축소시키고 있었다.
길을 걷는 사람이 있다. 다른 사람들이 걷기를 그친 황막한 이 벌판길을 걷는 사람이 있다.
그는 지금 어디로 가는지, 어디로부터 왔는지 알 길이 없었다. 벌판 가운데 어디로부터 어디까지나 늘어서 있는지 전신주의 전신은 찬바람에 못견디겠다는 듯이 ‘욍’ 소리를 지르며 이 나라의 이 끝에서 이 나라의 저 끝까지라도 방 안에 들어앉아 있는 사람과 사람의 음신 을 전하고 있다.
「기쁜 일도 있겠지. 그러나 또 생각하여 보면 몹시 급한 일도 있으렷다 아무런 기쁜 일도 아무런 쓰라린 일도 다― 통과시키어 전할 수 있는 전신주에 늘어져 있는 전신이야말로 나의 혈관이나 모세관과도 같다고나 할까?」
까마귀는 날았다. 두어조각 남아 있는 마른 잎은 두서너 번 조고만 재주를 넘으며 떨어졌다.
「깍! 깍!」
「왜 우느냐?」
그는 가슴을 내려다보았다. 어린것은 어느 사이엔지 그 품안에서 잠이 들었었다.
「배가 고프지나 않은지 웬!」
도홍색 그 조고마한 일면 피부에는 두어 송이 눈이 떨어져서는 하잘것 없이 녹아 버렸다. 그러나 어린 것은 잠을 깨이려고도 차갑다고도 아니하는 채 숱한 눈썹은 아래로 덮이어 추잡한 안계(眼界)를 폐쇄(閉鎖)시켰고 두 조고만 콧구멍으로는 찬 공기가 녹아서 드나들고 있었다.
선로가 나타났다. 잠들은 대지의 무장과도 같았다. 희푸르게 번쩍이는 기 쌍줄의 선로는 대지가 소유한 예리(銳利)한 칼이 아니라고는 볼 수 없었다. 그는 선로를 건너서서 단조로이 뻗쳐 있는 그 칼날을 좇아서 한없이 걸었다.
「꽝! 꽝!」
수많은 곡괭이가 언 땅을 내리 찍는 소리였다. 신작로 한편에는 모닥불이 피어서 있었다. 푸른 연기는 건조 투명한 하늘로 뭉겨 올랐다. 추위는 별안간 몸을 엄습하는 것 같았다.
「꽝! 꽝!」
청둥한 금속의 음향은 아직도 계속되었다. 그 소리는 이쪽으로 점점 가까이 들려온다. 그리고 그는 그 소리 나는 곳을 향하여 걷고 있었다. 그는 모닥불가에 가 섰다. 확 끼치는 온기가 죽은 사람을 살릴 것같이 훈훈하였다.
「우선 살 것 같다―」
오므라 들었던 전신의 근육이 조곰씩 조곰씩 풀어지는 것 같았다.
「불! 흥! 불―내 심장을 태우고 내 전신의 혈관과 신경을 불사르고 내 집 내 세간 내 재산을 불살라 버린 불! 이 불이 지금 나의 몸을 이 얼어 죽게 된 나의 몸을 뎁히어 주다니! 장작을 하나씩 하나씩 뜬숯을 만들고 있는 조고만 화염들! 장래에는 또 무엇 무엇을살라 뜬숯을 만들려는지! 그것은 한 물체가 탄소로 변하는 현상에만 그칠까―산화작용? 아하 좀더 의미가 있지나 않을까? 그렇게 단순한 것인가?」
그의 눈앞에는 이제 한 새로운 우주가 전개되고 있었다. 그곳은 여지껏 그가 싸여 있던 그 검은 빛의 분위기를 대신하여 밝은 빛의 정화된 공기가 있었다. 차디찬 무관심을 대신하여 동정이 있었고 사랑이 있었다. 그는 지금 일보 일보 그 세계를 향하여 전진을 계속하고 있는 것이었다.
「이리 오너라. 그대 배고픈 자여!」
이러한 소리가 들려왔다.
「이리 오너라, 그대 심혈의 노력에 보수받지 못하는 자여!」
이러한 소리도 들렸다.
「그대는 노력을 버리지 말 것이야. 보수가 있을 것이니!」
이러한 소리가 또 들려오기도 하였다.
「꽝! 꽝!」
그때 이 소리는 그의 귀 밑까지 와서 뚝 그쳤다. 그리하고는 왁자지껄하는 소리와 함께 많은 사람들이 그의 서 있는 모닥불가에 모여들었다.
「불이 다― 꺼졌네!」
「장작을 좀더 가져 오지!」
굵은 장작이 징겨졌다. 마른 장작은 푸지직 소리를 지르며 타올랐다. 그리하여 검푸른 연기가 부근을 흐리어 놓았다.
「에― 추워― 에― 뜨시다」
모든 사람들의 곱은 입술에는 이런 소리가 흘러나왔다.
연기는 검고 불길은 붉었다. 푸지직 소리는 여전히 났다. 이제 그의 눈앞에 나타났던 새로운 우주는 어느 사이에인지 소멸되고 해수욕 도구(道具)를 불사르던 어느 장면이 환기되었다.
「불이냐! 불이냐!」
그의 심장은 높이 뛰었다. 그 고동은 가슴에 안기어 있는 어린것을 눌러 죽일 것 같았다. 그는 품안의 것을 끌러서는 모닥불 곁에 내려 놓았다. 그리고는 가슴을 확 풀어 헤치고 마음껏 그 불에 안기어 보았다. 새로이 끼쳐오는 불기운은 그의 뛰는 가슴을 한층이나 더 건드리어 놓는 것 같았다.
무슨 동기로인지 그의 머리에는 알콜이라는 것이 연상되었다.
「에―ㅅ? 불? 불이냐?」
어린것을 모닥불 곁에 놓은 채 그는 일직선으로 그 선로를 밟아 뛰어 달아나기를 시작하였다. 그의 시야를 속속으로 스쳐 지나가는 선로 침목(枕木)이 끝없이 늘여 놓여섰을 뿐이었다. 그의 전신의 혈관은 이제 순환을 시작한 것 같았다.
「누구야, 누구야」
「앗!」
「누구야 어디 가는 거야」
「아― 저 불! 불!」
「하……!」
그의 전신은 사시나무 떨리듯 떨렸다.
「아― 인제 죽을 때가 돌아왔나 보다! 아니 참으로 살아야 할 날이 돌아왔나 보다!」
그는 이렇게 생각하였다. 그 사람은 그의 그 모양을 조소와 경멸의 표정으로만 내려다 보고 있었다. 그러나 이제야 최후로 새 우주가 그의 앞에는 전개되었던 것이다.
「여보십시오!」
그는 수작하기 곤란한 이 자리에서 이렇듯 입을 열어 보았으나 별로 그 사람에게 대하여 할 말은 없었다. 그는 몹시 머뭇머뭇하였다.
「왜 그리오?」
「저 오늘이 며칠입니까?」
「오늘? 십이월 십이일?」
「네!」
기적일성과 아울러 부근의 ‘시그낼’은 내려졌다. 동시에 남행열차의 기다란 장사(長蛇)가 그들의 섰는 곳으로 향하여 달려왔다.
「여보, 여보 여보 기차! 기차!」
「…………」
「여보, 저거! 이리 비켜!」
「…………」
「앗!」
그는 지금 모든 세상에 끼치는 많은 노력에도 불구하고 보수받지 못하였던 모든 거룩한 성도(聖徒)들과 함께 보조를 맞추어 새로운 우주의 명랑한 가로를 걸어가고 있는 것이었다.
그의 눈에는 일상에 볼 수 없었던 밝고 신선한 자연과 상록수(常綠樹)가 보였고 그의 귀에는 일상에 들을 수 없었던 유량(嚠喨) 우아한 음악이 들려왔다. 그리고 그가 호흡하는 공기는 맑고 따스하고 투명하였고 그가 마시는 물은 영겁을 상징하는 영험의 생명수였다. 그는 지금 논공행상(論功行賞)에 선택되어 심판의 궁정(宮廷)을 향하여 걷고 있는 것이었다.
순간 후에 그의 머리에 얹혀질 월계수의 황금관을 생각할 때에 피투성이 된 그의 일신은 기쁨에 미쳐 뛰었다. 대 자유를 찾아서 우주애(宇宙愛)를 찾아서 그는 이미 선택된 길을 걷고 있는 데 다름 없었다.
그러나 또한 생각하여 보면 불을 피하여 선로 위에 떨고 섰던 그는 과연 어디로 갔던가.
그는 확실히 새로운 우주의 가로를 보행하였을 것이다. 그러나 또 그의 영락한 육체 위로는 무서운 ‘에너지’의 기관차의 차륜이 굴러 넘어갔는지도 모른다. 그리하여 그의 피곤한 뼈를 분쇄시키고 타고 남은 근육을 산산히 저며 놓았는지도 모른다. 그리하여 기관차의 ‘피스톤’은 그의 해골을 이끌고 그의 심장을 이끌고 검붉은 핏방울을 칼날로 희푸르러 있는 선로 위에 뿌리며 십리나 이십리 밖에 있는 어느 촌락의 정거장까지라도 갔는지도 모른다. 모닥불을 쪼이던 철로 공사의 인부들도, 부근 민가의 사람들도 황황히 그곳으로 달려들었다. 그러나 아까에 불을 피하여 달아나던 그의 면영은 찾을 수도 없었다. 떨어진 팔과 다리, 동구(瞳球), 간장(肝臟), 이것들을 차마 볼 수 없다는 가애로운 표정으로 내려다보며 새로운 우주의 가로를 걸어가는 그에게 전별의 마지막 만가(輓歌)를 쓸쓸히 들려주었다.
그 사람은 그가 십유여 년 방랑생활 끝에 고국의 첫발길을 실었던 그 기관차 속에서 만났던 그 철도국에 다닌다던 사람인지도 모른다. 사람은 이 너무나 우연한 인과(因果)를 인식치 못할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사람이 알거나 모르거나 인과는 그 인과의 법칙에만 충실스러이 하나에서 둘로, 그리하여 셋째로 수행되어 가고만 있는 것이었다.
「오늘이 며칠입니까?」 이 말을 그는 그 같은 사람에게 우연히 두 번이나 물었는지도 모른다. 따라서 「십이월 십이일!」 이 대답을 그는 같은 사람에게서 두 번이나 들었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모든 것은 다 그들에게 다만 모를 것으로만 나타나기도 하였다.
인과에 우연이 되는 것이 있을 수 있을까? 만일 인과의 법칙 가운데에서 우연이라는 것을 찾을 수 없다 하면 그 바퀴가 그의 허리를 넘어간 그 기관차 가운데에는 C간호부가 타 있었다는 것을 어떻게나 사람은 설명하려 하는가? 또 C간호부가 왁자지껄한 차창 밖을 내어다보고 그리고 그 분골쇄신한 검붉은 피의 지도(地圖)를 발견하였을 때 끔찍하다하여 고개를 돌렸던 일은 어떻게나 설명하려는가? 그리고 C간호부가 닫친 차창에는 허연 성에가 슬어 있었다는 것은 어찌나 설명하려는가? 이뿐일까, 우리는 더욱이나 근본적 의아에 봉착(逢着)할 수도 있다는 것이다.
만일 지금 이 C간호부가 타고 있는 객차의 고간이 그저께 그가 타고 오던 그 고간 뿐만 아니라 그 자리까지도 역시 그 같은 자리였다 하면 그것은 또한 어찌나 설명하려느냐?
북풍은 마른 나무를 흔들며 불어 왔다. 먹을 것을 찾지 못한 참새들은 전선 위에서 배고픔으로 추운 날개를 떨며 쉬이고 있었다.
그가 피를 남기고 간 세상에는 이다지나 깊은 쇠락의 겨울이었으나 그러나 그가 논공행상을 받으려 행진하고 있는 새로운 우주는 사시상춘이었다.
한 영혼이 심판의 궁정을 향하여 걸어가기를 이미 출발한 지 오래니 인생의 어느 한 구절이 끝난 것인지도 모른다. 그러나 사람들 다 몰켜가고 난 아무도 없는 모닥불 가에는 그가 불을 피하여 달아날 때 놓고 간 그 어린 젖먹이가 그대로 놓여 있었다.
끼쳐오는 온기가 퍽 그 어린것의 피부에 쾌감을 주었던지 구름 한점 없이 맑게 개어 있는 깊이 모를 창공을 그 조고마한 눈으로 뜻있는 듯이 쳐다보며 소리없이 누워있었다. 강보(襁褓) 틈으로 새어나와 흔들리는 세상에도 조고맣고 귀여운 손은 일만년의 인류역사가 일찍이 풀지 못하고 고만둔 채의 대우주의 철리를 설명하고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 부근에는 그것을 알아 들을 수 있는 ‘파우스트’의 노철학자도 없었거니와 이것을 조소할 범인(凡人)들도 없었다.
어린 것은 별안간 사람이 그리웠던지 혹은 배가 고팠던지 ‘으아’ 울기를 시작하였다. 그것은 동시에 시작되는 인간의 백팔번뇌를 상징하는 것인지도 몰랐다.
「으아!」
과연 인간세계에 무엇이 끝났는가. 기막힌 한 비극이 그 종막을 내리우기도 전에 또 한 개의 비극을 다른 한 쪽에서 벌써 그 막을 열고 있지 않은가?
그들은 단조로운 이 비극에 피곤하였을 것이나 그러나 그들은 그것을 연출하기도 결코 잊지는 아니하여 또 그것을 구경하기에도 결코 배부르지는 않는다.
「으아!」
어떤 사람은 이 소리를 생기에 충만하였다 일컬을는지도 모른다. 또한 그러할런지도 모른다. 그러나 이것이 확실히 인생극의 첫막을 여는 ‘사이렌’인 것에도 틀림은 없다.
「으아!」
한 인간은 또 한 인간의 뒤를 이어 또 무슨 단조로운 비극의 각본을 연출하려 하는고. 그 소리는 오늘에만 ‘단조’라는 일컬음을 받을 것인가.
「으아!」
여전히 그 소리는 그치지 아니하려는가.
「으아!」
너는 또 어느 암로(闇路)를 한 번 걸어보려느냐. 그렇지 아니하면 일찍이 이곳을 떠나려는가. 그렇다. 그 모닥불이 다 꺼지고 그리고 맹렬한 추위가 너를 엄습할 때에는 너는 아마 일찌감치 행복의 세계를 향하여 떠날 수 있을는지도 모른다.
「으아!」
「으아!」
이 소리가 약하게 그리하여 점점 강하게 들려오고 있을 뿐이었다.
완(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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