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상 [870531] · MS 2019 · 쪽지

2022-04-02 08:48: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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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 번째 방랑(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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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촌 


돼지우리다. 사람이 다가서면 꿀꿀거린다. 나직한 초가지붕마다 호박덩굴이 덮이고, 탐스런 호박이 매달려 있다. 그리고 모양은 노랗고 못생겼으며, 자꾸만 꿀벌을 불러 대고 있다. 자연의 센슈얼한 부면(部面)……. 


우리 속은 지독한 악취다. 허나 이것이 풀의 훈기와 마찬가지로 또한 요란하고 자극적이다. 


돼지, 귀여운 새끼 돼지, 즐거운 오예(汚穢) 속에 흐느적거리고 있는 돼지, 새끼 돼지―수뢰(水雷) 모양을 하고 있는 꿀돼지다. 


바람이 불었다. 비는 이젠 저 철골 망루가 있는 산등성이를 넘어서 또 다른 산촌으로 가버렸나 보다. 


남쪽은 모로 길게 가닥가닥이 푸르고, 자줏빛 구름은 어쩌면 오렌지 빛 안쪽을 유혹이나 하듯 뒤집어 보이곤 한다. 


야트막한 언덕 가득히 콩밭―그것은 그대로 푸른 하늘에 잇닿아 있다. 그것은 그러므로 끝이 없이 넓어 보이는 것이었다. 


그리고 산 쪽으로는 수수밭, 들판 쪽으로는 벼밭과 지경(地境)을 이루고 있다. 


 

또 바람이 불었다. 개구리가 뛰었다. 조그만 개구리다. 잔물결이 개구리밥 사이에 잠시 보였다. 


벼밭에서 벼밭으로 아래로 아래로 맑은 물은 흐르고 있는 것이다. 논두렁을 잘라 물길을 낸 곳을 샴페인을 터뜨리는 그런 물소리가 끊일 새 없다. 


피가, 지칠 줄 모르는 피가 이렇게 내뿜고 있는 대자연은 천고에도 결코 늙어 보이는 법이 없다. 


또바람이 불었다. 좀 비를 머금은 바람이다. 수수 옥수수 잎 스치는 소리가 소조롭다. 그리고 정겨웁다. 어쩌면 치마끈 끄르는 소리와도 같이. 


농가다. 개가 짖는다. 새하얀 인간의 얼굴보다도, 오히려 가축답지 않은 생김새다. 아래 온천 마을에선 개는 어떤 사람을 보아도 짖지를 않는다. 여기선 조심스럽게 겸손하는 태도마저 보이면서, 한층 더 슬픈 소리로 짖어댔다. 


산에 산울림하여 인간의 호흡을 전달하는 것이었다. 


밤나무와 바위와 약간 가파른 낭떠러지에 둘러싸여 온돌처럼 따스해 보이는 농가 두셋, 문어귀의 소로까지 양쪽 댑싸리 옥수수 울타리가 어렴풋하게 구부러지면서 지나갔다. 그래서 문어귀를 곧바로 내다볼 수가 없다. 마당에는 공만한 백일초가 새빨갛게 타오르고 있다. 


울타리 사이로 개가 이쪽을 겁난 눈으로 엿보고 있다. 그리고 마당. 말끔히 쓸어 놓은 마당과 소로엔 수수며 조 같은 곡식이 떨어져 있음직도 하다. 


 

툇마루 끝에선 노파가 손주딸 머리의 이를 잡고 있다. 원후류(猿猴類)가 하듯이―둘이 다 상반신은 알몸이다. 


그리고 어두컴컴한 부엌 속에 이 또한 상반신은 알몸인 젊은 며느리가 서서 일하고 있다. 초콜릿 빛 피부 건강한 육체다. 


집 뒤꼍에는 옥수수가, 이것만은 들쭉날쭉으로 서 있다. 커다란 이삭을 몇 개 달고는 가을풀들 사이에 유난히 키가 크다. 


바위에는 칡넝쿨이 붉다. 그리고 그것은 바위에 낀 무슨 광물이기나 한 것처럼 찰싹 바위에 달라붙어 있다. 그리고 검은 바위를 배경삼아 한층 더 붉다. 


어린아이 둘이 검붉은 머리카락을 바람에 나부끼면서 마당 안에서 놀고 있는 것인지 노는 걸 그만두고 있는 것인지, 둘이 다 멍하니 서 있다. 


매일같이 가뭄이 계속되어, 땅바닥은 입덧 난 것처럼 균열이 생기고, 암석은 맹수처럼 거칠게 숨쉬었다. 


농부는 짙푸르게 개어 오른 초가을 허공을 쳐다보았다. 한 점 구름조차 없다. 


 

삶을 지닌 모든 것은 모두 피를 말려 쓰러질 것이다. 이제 바야흐로. 아카시아 이파리엔 흰 티끌이 덧쌓이고, 시냇물은 정맥처럼 가늘게 부어올라 거무죽죽하다. 


뱀은 어디에도 그 꼴을 보이지 않는다. 옥수수 키 큰 풀숲 속에 닭을 작게 축소한 것 같은 산새가 꼭 한 마리 내려앉았다. 천벌인 양. 


그리고 빈민처럼 야위어 말라빠진 조밭이 끝없이 잇달아, 수세미처럼 말라 죽은 이삭을 을씨년스럽게 드리우곤 바람에 울부짖고 있었다. 


그러는 사이에도 잠실 누에는 걸신들린 것처럼 뽕을 먹어 치웠다. 


아가씨들은 조밭을 짓밟았다. 어차피 인간은 굶어 죽지 않으면 안 되는 것이라면, 지푸라기보다도 빈약한 조밭을 짓밟고 그리곤 뽕을 훔치라고. 


야음을 타서 마을 아가씨들은 무서움도 잊고, 승냥이보다도 사납게 조밭과 콩밭을 짓밟았다. 그리고는 밭 저쪽 단 한 그루의 뽕나무를 물고 늘어졌다. 


그래도 누에는 눈 깜박할 새에 뽕잎을 먹어 치웠다. 그리곤 아이들보다도 살찌면서 커갔다. 넘칠 것만 같은 건강. 풍성한 안심(安心)이라고도 할 만한 것은 거기에밖엔 없었다. 처녀들은 죽음보다도 누에를 사랑했다. 


그리곤 낮 동안은 높은 나뭇가지 위로 기어올라갔다. 부끄러움을 무릅쓰고, 그 하얀 세피아 빛 과일을 해는 태워 버릴 것만 같이 쬐고 있었다. 


 

어디에도 행복은 없다. 천사는 소년군(少年軍)처럼 도시로 모여들고 만 것이다. 


풍우에 쓰러진 비석 같은 마을이여. 태고의 구비(口碑)를 살고 있는 촌사람들. 거기엔 발명은 절대로 없다. 


지난해처럼 옥수수는 푸짐하게 익어, 더욱더 숱한 주홍빛 수염을 바람에 나부끼고는, 초가을 고추잠자리 날으는 하늘에 잎 쓸리는 흥겨운 소리를 울렸다. 


그리고 옥수수 수수깡을 둘러친 울타리엔, 황금빛 탐스런 호박이 어떤 축구공보다도 크고 묵직하다. 


산기슭 도수장(屠獸場)은 오래도록 휴업중이다. 그리고 아이들은 고무신을 벗어 들고는, 송사리보다 조금 더 큰 붕어를 잡는다. 


개들은 가족들이 보는 앞에서 마구 야위어 갔다. 그리고 시집을 앞둔 많은 처녀들이 노파와 같은 얼굴로 되어 갔다. 


줄기는 힘없이 부러지기만 했고, 조 이삭의 큰 것은 자살처럼 제 체중 때문에 모가지를 접질리곤 했다. 


마른 뱅어같이 딱딱하고 가느다란 콩넝쿨은 길 잃은 자라처럼 땅바닥을 기고 있다. 그리고는 생식기 같은 콩 두서너 개를 매달고 있다. 버들잎이 담겨 있는 시냇물까지 젊은 두 아낙네가 물동이를 이고 물길러 왔다. 


그리하여 피[血]는 이어져 있다. 메마른 공기 속 깊숙이.나는 물을 마셨다. 시원한 밤이 오장으로 흘러들었다. 


귀뚜리 소리는 한층 야단스레 한결 선연해진 것 같다. 달 없는 천근(千斤)의 마당 안에. 


홀로 이 귀뚜리는 속세의 시끄러움에서 빠져나와, 이 인외경(人外境)에 울적하게 철학하면서 야위도록 애태움은 어찌 된 까닭일까? 이 귀뚜리는 지독한 염세가인지도 모른다. 램프의 위치는 어쩌면 그 화려한 자살 장소로서 선정된 것이나 아닐지. 


그의 저 등피 밖에서 흥분과 주저는 어떠했던가. 


귀뚜리의 자살. 여기에 일가권속을 떠나, 붕우(朋友)를 떠나, 세상의 한없는 따분함과 권태로 해서 먼 낯설은 땅으로 흘러온 고독한 나그네의 모습을 보지 않는가. 나의 공상은 자살하려고 하는 귀뚜리를 향해 위안의 말을 늘어놓는다. 


귀뚜리여, 영원히 침묵할 것인가. 귀뚜리여, 너는 어쩌면 방울벌레인지도 모른다. 네가 방울벌레라 해도 너는 침묵할 것이다. 


죽어선 안 된다. 서울로 돌아가라. 서울은 시방 가을이 아니냐. 그리고 모든 애매미들이 한껏 아름다운 목청을 뽑아 노래하는 계절이 아니냐. 


서울에선 아무도 너를 기다리고 있지 않다 그 말인가. 그래도 좋다. 어쨌든 너는 서울로 돌아가라. 그리고 노력해 보게나. 그리하여 전과는 다른 의미에서의 삶의 새로운 의의와 광명을 발견하게나, 고안해 보게나. 


 

하지만 나의 이 같은 우습지도 않은 혼잣말은 귀뚜리의 귀에는 가닿지 않은가 보다. 어쩌면 귀뚜리는 내심 나를 몹시 조소하면서도, 외관만은 모르는 척하고 꿀 먹은 벙어리로 있는 것이나 아닐지. 나는 적이 불안하다. 


나는 이 지방에 와서 아무와도 친하지 않는다. 그들은 모두 나를 질색하는 것만 같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일주일도 안 되어 슬금슬금 그들은 두어 마디 서너 마디 나한테 말을 걸어 오는 수도 있게 됐다. 그것이 나로선 참을 수 없이 무섭다. 


그들은 도대체 나한테서 무엇을 탐지하려는 것일까? 내 악의 충동에 대해 똑똑히 알고 싶은 것이리라. 나는 위구(危懼)를 느껴 마지 않는다. 나는 그들의 누구를 보고도 싱글벙글했다. 무턱대고 싱글벙글함으로써 나의 그러한 위구감을 얼버무리는 수밖엔 없었다. 아침부터 밤까지 남을 보면 나는 그저 싱글벙글했다. 그들의 어떤 자는 괴상하다는 표정조차 했다. 하지만 나는 그런 것에 상관하지 않았다. 


하지만 이제 나는 귀뚜리를 향해 어찌 싱글벙글할 수 있겠는가? 너의 혜안은 나의 위에 별처럼 빛난다. 


다시금 귀뚜리는 아무것도 아직 써넣지 않은 나의 원고용지 위에 앉았다. 그리곤 나의 운명을 점쳐 주기라도 할 그런 자세이다. 이번은 몹시도 생각에 골똘한 것 같다. 그리고 나의 이 펜촉이 달리는 소리를 열심히 도청하고 있는 것만 같다. 


귀뚜리여, 이 사각거리는 소리를 듣기만 해도, 너는 능히 나의 이 모자란 글을 읽어 내릴 수 있을 것이다. 정녕 선지자 같은 정돈된 그 이지적인 모습을 보면, 나는 그렇게 생각되니 말이다. 그러나 어떠냐, 나는 이렇게 많은 거짓말을 하고 있다. 얄미운 놈이라고 생각하느냐, 요사한 놈이라고 생각하느냐. 


하지만 너만은 알 것이다. 보다 속 깊이 싹트고 있는 나의 악에 대한 충동을, 그리고 염치도 없는 나의 욕망을, 그리고 대해(大海) 같은 나의 절망까지도. 그리고 너만이 나를 용서할 것이다. 나를 순순히 받아들여 줄 것이다. 


 

그러나 귀뚜리는 다시 흰 벽으로 옮아 앉았다. 그것이 내가 필설로써 호소할 수가 전혀 없는 수많은 깊은 악과 고통마저 알고 있다는 꼭 그런 얼굴인 것이다. 나는 나의 무능함이 폭로되는 것을 생생하게 보았던 것이다. 나는 더욱 깊이 절망할 수밖에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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