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병장은 어디에도 없고, 어디에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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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른 사람들이 나에 대해 알지 못하는 것,
나는 그것으로 살아간다.
- 페터 한트케
인간의 영혼은 분명 타자의 시선을 받지 않은 채 자기 혼자 있을 수 있는 공간을 필요로 한다.* 누군가 당신의 과거를 꿰뚫고 현재와 미래까지 예측하고 통제한다면 그것은 그 자체로 삶의 위기가 된다. 내 안의 내밀한 영역을 은밀히 보존하는 것은 이념적 개인의 특권이 아니라 원초적 인간의 생존조건이다.
삶에 많은 고난과 위기가 있지만 이런 위기는 쉬이 찾아오지 않는다. 학교에 다녀도 직장에 다녀도 각자가 그만의 고난은 있지만 탈출구도 있다. 집은 나만의 영역을 확보할 최적의 공간이며 어느 시스템도 내 삶 전체를 관통해 통제할 수 없다. 고3 수험생도 밤늦은 어느날 몰래 롤을 즐길 수 있고 바쁜 직장인도 주말 어느날 계곡으로 떠날 수 있다. 삶이 견딜 수 없을 만큼 괴로울 때 이런 은밀한 일탈이야말로 삶을 유지케 하는 동력이 된다.
그러나 그 얘기가 군대라면 얘기가 달라진다. 군대에 입대한 이상 내 안의 영역을 확보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게임을 하거나, 여행을 떠나는 물리적 행동 뿐 아니라 내 감정까지 통제당한다. 교사에게 혼나면 친구들과의 뒷담화로 풀 수 있지만 군대 하에선 마음을 접는 게 좋다. 혹여나 당신을 괴롭힌 선임에 대한 뒷담화를 믿고 있던 또 다른 선임, 동기에게 하면 십중팔구 그 즉시 욕한 대상에게 내용이 고스란히 전달된다. 믿기 어렵겠지만 사실이다. 군대라 곳은 신뢰나 믿음, 충성으로 굴러가는 곳이 아니다. 일벌백계라는 철저하게 억압된 시스템으로 굴러가는 곳이다.
그리고 이 시스템은 개인의 내밀한 영역을 허용하지 않는다. 혹여나 말도 안 되는 것으로 당신이 괴롭힘당해도 당신은 기분을 조금도 드러내선 안 된다. 이것을 '표정관리'라 한다. 그리고 이 표정관리는 개인의 감정을 말살한다. 친구들과의 뒷담화는 고난의 완충제 역할을 하지만 화장실에서 남몰래 눈물을 흘리는 눈물은 고난에 비참함을 더한다. 일기장에라도 개인의 감정을 드러내면 편할 것 같지만 그랬다가 군생활이 더욱 험난해지는 경우를 나는 여러번 보았다.
임병장은 살인자다. 심지어 그는 평소 자신에게 도움을 주던 병사까지 살해했다. 여기에는 그 어떤 자비도 허용될 수 없을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임병장 외에 또 다른 가해자가 있음을 알아야 한다. 그것은 바로 군대라는, 개인의 영혼에 단 하나의 영역도 허락하지 않는 시스템이다.
군대는 입대하는 순간 심하게 말해 병사는 집에서 키워지는 애완견과 누가 더 나은 처지인지 다퉈야 될 수준으로 전락한다. 그 곳은 돼지우리와 다를 바 없다. 나이, 인성, 학력, 경력, 집안 환경이 모두 천차만별인 이들을 한데 묶어 계급을 부여해 한 곳에 몰아넣고 생활시킨다. 계급에 의한 폭력이 생기고 그 폭력은 전승된다. 피해자가 가해자가 되고 자시 그로 인한 피해자가 가해자가 되는 악순환은 그 어떤 개인도 끊을 수 없다. 이러한 폭력적인 고리에 외부환경 변화에 취약한 인간이 가는 순간 비극이 일어난다. 지금의 임병장처럼.
지금 국방부에서 내놓고 있는 여러 대책들은 하나마나인 경우가 많다. 관심병사를 면밀히 검토해 현역복무부적합 심사를 받게 해 전역시키는 것 역시 폭력의 연장선상이다. 애초 사회에선 멀쩡히 잘 생활하던 사람이 저런 낙인을 받는 것이 합당할까. 징집병만이 이런 폭력에 시달리는 것은 아니다. 똑같이 2년을 복무하지만 현역보다 좀 많이 편하게 생활했다는 이유로 공익은 '국가공인 장애인'이라 조롱당한다. 면제는 말할 것도 없다. 우리 사회에서 병역은 크건 작건 모두에게 상처를 안기는 산파 역할을 하고 있다.
누구나 환경변화에 대한 최저한계선이 있고 역치가 존재한다.** 학교에서, 사회에서 멀쩡히 잘 생활하는 당신이 관타나모 수용소같은 극한 환경에서도 자존감을 잃지 않고 생활한다는 보장은 어디에도 없다. 결국 최저한계선만 다를 뿐 누구나 어느 지점에선 미쳐서 아무것도 안 보고 뒤엎는 지점이 존재하고 국가는 개인이 그 지점을 만나지 않도록 모든 노력과 비용을 아끼지 않아야 한다. 그게 국가의 의무이자 사명인데 지금 거꾸로 그러한 지점을 만나게 하는 국가를 우리는 만나고 있다.
이런 저간의 많은 정황에도 불구하고 임병장은 죄를 사함받을 수 없다. 누군가 따돌리고 누군가 인격적 모욕을 했다 해서 총으로 쏴갈겨도 된다면 이 세상에 남아남을 사람이 없을 것이다. 하지만, 인격적 모욕을 당하는 환경을 만든 뒤 총기와 수류탄을 손에 쥐어주는 현 시스템이 유지되는 한, 누군가는 또 다른 임병장이 될 것이다.
군대는 긍정사회다. 어떠한 부정적 감정도 허용하지 않는다. 거기엔 "예 알겠습니다", "예 그렇습니다"라는 두 마디밖에 없다. 그리하여 사람들은 괴로움과 고통을 대하는 법, 그러한 감정을 형식에 담는 법도 잊어버린다. 그리고 이 때 축적된 감정은 파괴적 수단을 동반한다. 이 시스템을 바꾸는 방법은 이 시스템을 사회 성원 각자가 나의 문제로 대하는 것이다. 그리고 그 첫 출발이 나 또한 전군의 어느 부대에서는 임병장처럼 될 수 있음을 깨닫는 것이다.
임병장은 어디에도 없고, 어디에도 있다.
* 한병철, 2012
** 나르테스크 카이솔로, 20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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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과는 무관한 내용입니다만 에쎈유로만님은 제가 고등학생때 생각했던 대학생의 이상적인 모습을 현실에서 갖고 계신 듯 해요.. 부럽습니다. 1학년 여름방학은 어떻게 보내는게 좋을지 조언좀 부탁드려도 될까요?
여기서 또 궁금한게 있다면 에쎈유님은 여름방학시기에 뭐할지 다른사람들에게 물어봣냐에요ㅋㅋ
목적과 본인의 의지에 따라 다를 겁니다. 어떤 게 궁금하시죠? 다른 사람에게는 물어본 기억이 없네요.
영어공부, 알바, 여행, 전공관련예습, 독서 등등 하고싶은것은 많은데 1학년 1학기 여름방학 때는 뭘하면 보람도 있고 나중에 도움도 될지 잘 모르겠네요.. 지금 되는대로 이것저것 하고 있는데 사실 나중에 이게 남는 경험이 될지도 모르겠고 혼란스러워서 경험많은분의 이야기를 들어보고싶습니다. 그리고 나중에는 가능하다면 투자은행이나 컨설팅쪽으로 가고 싶은데 이를 위해서 지금 뭘 할 수 있을지도 궁금합니다.
차후 말씀드리지요.
읽으면서 감탄했습니다.
필력이...
잘읽고갑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징병제를 유지해야 하는 현 상황상 실제적 대책을 세우기는 힘든 현실
요즘 읽었던 책중 가장 감명깊었던 글이 뭐냐고 묻는다면
한병철교수의 피로사회와 투명사회인데..
저만 그렇게 생각한것은 아니었군요...
으으..ㅋ 미필 입장에서 ㅋㅋㅋㅋㅋ
아나 ㅠ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