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nu Roman. [69422] · MS 2004 · 쪽지

2014-01-30 16:59: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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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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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rologue.

보통 3~4일에 한 번, 많아야 하루에 2번 올리는 곳이 이 곳 '나의 일기장'인데 쓰고 보면 온통 작성자가 Snu Roman.밖에 보이지 않아 조금 당황스럽다. 오르비 사용자가 매우 줄었음을 실감하기에 나의 민망함의 핑계를 운영자의 growth stage management 역량에 위탁하고 글을 시작하겠다.

Story

  매일 16~17시간에서 많으면 21시간까지 살인적인 근무를 하고 오랜만에 맞는 이 설이 나는 퍽이나 즐거웁다. 삶을 만끽하는 순간이다. 침대에 드러누워 어제 방영한 짝을 보며 감정이입해 깔깔대는 한편, 묵혀두었던 '맨얼굴의 중국사'(김영사역, 창해)를 보며 책 속을 헤엄친다. 예년 이맘때면 한 해의 계획을 담대히 세우고 120%이상 이뤄왔던 패기와 자신감을 양분으로 살아왔지만 올해 계획을 세워보려니 퍽이나 당황스럽다. 그저 일을 잘해 평정을 잘 받고 휴가를 좀 더 확보하면 그만뿐인 인생이 됐다.

  어려서부터, 내 꿈은 컸다. 꿈 선택의 최우선 기준은 연봉도, 권력도 아닌 남과 다른 삶이었다. 어느 직장을 갖든, 헨리데이빗소로우처럼 호수옆에 오두막지어 책을 쓰지 않을 바에야 차별화를 하기 어렵지만 그 중에선 조금이나마 차별화된 삶을 살 수 있는 직업을 택했다. 그런 의미에서 대기업 직원, 의사, 변호사는 내게는 매력적이지 않은 직업이었다. 많은 사람을 만나며 견문을 넓히는 동시에 똑똑한 사람들과 함께 하며 서로 배울 수 있고, 나의 미래를 능동적으로 설계 가능하게 하는 직업이 바로 지금 내가 하고 있는 이 일이라 믿었고 뛰어들었다.

  하지만 역시나 이 일 역시 국내에서만 수백수천명 이상이 하고 있는 직업이고 그 과정에서 자연스레 룰이 생겨났고 custom practice가 존재했다. 결국엔 직장인과 부대끼며 직장인과 같은 삶을 사는 나는, 올해 처음으로 능동적인 계획을 설계하지 못하는 나 자신의 현실에 대해 적응하기 어렵게 됐다. 이는 필연적으로 예고된 참극이지만 피할 수 없는 자극과 같아 나를 애태운다. 학생, 벤처사업가가 아닌 어디에 소속된 나의 계획은 무얼해도 그 소속된 단체의 범위 내가 아니면 하기 어려운 일이 되었다. 예전처럼 학생이면서, 밴드 앨범을 내고, 책을 내며, 연애하고 해외 컨퍼런스에 참여해 바이올린을 연주하는 일은 불가능하다. 이러한 자유로움이 그 어떤 자유롭다는 직업에도 허용되지 않는 현실을 체감하면서도 언제나 이상과 현실은 괴리되어있기에 땀방울을 흘리게 된다. 이제까지는 상황에 체념하는 그 어떤 정당화 이론도 거부하며 내 삶을 살아오기 위해 노력했지만 이제 생계가 결부된 이 상황을 타개하기엔 전과는 비교도 되지 않는 비용이 예상되기에 그 압박으로부터 오는 느낌이 사실은 썩 달갑지만은 않은 것이다.

  대학 졸업 당시 나는 원하는, 아니 생각지도 못한 곳으로부터 offer를 받았고 내 대학시절을 반추하며 정말 이이상 어떻게 대학생활을 잘하겠는가 싶을 정도로 만족해하며 학사모를 썼다.

  내가 훗날 '일'을 그만두게 될 때 대학 졸업과 똑같은 기억을 전유하기 위해 무얼 해야 할까. 이젠, 예전처럼 내가 할 일을 계획하는 소모적 단계를 넘어 더 큰 차원에서 그림을 그리는 일이 남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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