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수생 느와르 #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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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년 당시의 강대 5야, 6야의 풍경을 기억하는 사람이 지금 여기에 얼마나 될런지는 모르겠다. 당시 강대가 교대 건물을 버리고 지금의 삐까뻔쩍한 강남 건물로 이전한지 첫해였던 것으로 기억하는데, 야간반 건물은 본원과 걸어서 약 3분 거리의 대로변 건물을 빌려서 쓰고 있었다.
당시 지하에 디스코텍인지 룸쌀롱인지 그 정체를 모를 업소가 하나 있어서 퇴원시간이 되면 1층에 빡빡머리 어깨형님들이 무전기 들고 서있던 기억이 난다.
학원 들어갈 당시는 사실 누구하고 친목한다 이럴 생각도 없었고 그냥 만사가 다 귀찮은 상태였다. 매달 자리 옮기는 것도 귀찮아서 그냥 맨 앞자리 신청해두고 있었을 정도이니 말 다했지 뭐.
학원 첫날 대한민국의 산업화를 이끌었다는 어떤 가카와 동명이인이었던 담임선생님(앞으로 귀찮으니 가카쌤이라 줄이겠다)은 무슨 종이 한장씩을 나눠주셨다. 작년 수능 성적이랑 정시 지원 대학교였나 그렇게 기억한다. 사실 그 기억이란 것도 마냥 정확하지는 않은 것이, 그 당시가 너무나도 심적으로 힘들어서 그런가 정말 중요한 하이라이트를 제외하고는 약간 편집된 상태로만 남아 있다. 내가 쓰잘데기 없는 디테일을 굉장히 잘 기억하는 편임에도.
무슨 이유에서인지 논술 볼때보다 글이 술술 잘 써지기 시작했다. GOD의 첫 데뷔곡의 시작이 '어려서부터 우리집은 가난했었고'의 갬성팔이로 시작하는 것처럼, 나 역시 그 종이에 나의 파란만장하고 개같은 입시 일대기를 써내려가기 시작했다. 판타지소설가가 꿈이었던 한 고등학생은 그렇게 자기 필력을 오랜만에 풀충전하고 있었고, 일필휘지로 써내려간 글은 어느덧 한장을 넘어서 여백이 남지 않을 정도로 빼곡하게 채워졌다.
사실 뭐 설마 그걸 다 읽겠어 하고 낸 글이긴 했는데, 마침 국어 선생님이었던 우리 가카쌤은 내 상담때 글 얘기를 하셨다. 너무 눈물날 정도의 이야기라 기억에 남지 않을 수가 없다고. 그때 그 말씀 한마디가 굉장히 큰 위로가 되었다. 가카쌤은 그래서 앞으로 어떻게 하고 싶냐고 나에게 물어보셨다.
"글쎄요. 전 솔직히 3수때 탐구 잘못 선택해서 말아먹은 것, 정시 폭사한 것 말고는 잘못이 없습니다. 신이란게 있는지는 모르겠는데 진짜 양심이 있다면 이건 말이 안되는 상황입니다. 솔직히 딴건 안바라고, 서울대? 뭐 가면 좋지만 그정도까지 꿈꾸기도 이제 싫으니 그냥 재수할 때 학교라도 돌아갔으면 좋겠습니다. 지금 여기 온것도 진짜 3수 끝나고 온 학교 도저히 못다니겠어서 온거라서요."
가카쌤은 알았다고 하시고 마음 잘 추스르고 남은 4개월정도 한번 힘내보자고 하셨다. 사실 그것도 굉장히 힘이 되긴 했다.
강대 6야가 정말 좋았던 점은 뭐랄까, 일단 엄청나게 자유로웠다. 아니 무슨 흡연하면 이름 박제하고 내쫒는 학원에서 있다가 쉬는시간 학원 출입마저 자유로운 곳에 있다 보니 여기가 원래 나에게 잘 맞았을 곳이라는 생각만 들었다. 아오 진작에 학원 옮길걸 샹.
그래서 수업 50분 들으면 머리 아파 죽을 것 같으니, 매 쉬는시간 나가서 담배나 한대 피우고 들어가는게 그 시기의 낙이었다. 다른 학원이었으면 상상도 못할 일이지. 이전 학원에서는 담배 피우겠다고 담장 넘었다 오는 애들도 있었는데. (물론 최소한의 매너로 흡연용 외투는 챙겨 다녔다. 사물함에 넣었다가 담배 피울때만 입고 다시 사물함에 넣어두는)
흡연자들이면 다들 알겠지만, 어느 집단이든 형성되고 나면 꼴초들끼리는 안면도 트이고, 왜인지 모를 내적 친밀감이 생기게 된다. 그 당시 나도 그래서, 1층 주차장 흡연구역에 상습 출몰하는 꼴초들끼리는 서로가 서로를 어느 정도 알고 있었다. 그리고 역으로, 꼴초가 아닌 자가 그곳에 있으면 그것을 캐치하는 속도 또한 매우 빨랐다.
어느날 부터인가, 점심시간이나 저녁시간에 익숙하지 않은 얼굴 하나가 수줍게 전자담배를 몇모금 들이키다가 조용히 들어가곤 했다. 그런데 뭔가 어디서 본 듯한 느낌이 계속 드는 것이다. 원래 내 성격이면 먼저 가서 말을 걸어봤겠지만, 그 당시 나는 모든게 다 귀찮은 심각한 귀차니즘에 잠식되어 있었고 성인 되어서 처음 담배를 시작했는데 몸에 안좋다니 어찌저찌 전자담배나 쓰는 사람 1 정도로 받아들이고 있었다.
그러던 하루, 그 사람이 나에게 갑자기 와서 말을 걸기 시작했다.
"혹시 XX학원 아니셨어요?"
그리고 그 사람의 얼굴을 자세히 보니, 기억이 나기 시작했다. 반도 다른반이었고, 이름도 모르는 사람이었지만, 늘 충혈된 빨간 눈에, 뭔가 억울해 보이는 얼굴. 한번 보면 기억이 안나기 쉽지 않은 얼굴이었지 맞다.
"네 맞아요. 아니 어떻게 아셨어요?"
"그쪽 XX학원에서 좀 유명하셨어야죠."
내가 그렇게 유명했던가? 뭐 좀 특이한 캐릭터로 홍보가 된 것 같긴 한데.
뭐 어쨌든, 그렇게 이 친구와 나의 인연은 시작되었다. 15년부터 해서 현재까지 7년째인 사이이며, 연합동아리도 같이 하고, 이성문제로 삽질도 번갈아가며 거하게 하고 다니고, 각자 본과 실습생과 직장인이 된 지금도 거의 매일 연락하는 내 유튜브 편집자와의 인연이.
"그쪽은 3수이신가요?"
"네 어쩌다 이판에 3년째 있게 되네요."
"그렇군요. 저는 씨발 4년째네요 허허."
잊어버리고 싶은 XX학원의 기억이었건만, 그 당시의 나를 기억하는 사람이 있다 보니 어느덧 둘은 급속도로 친해지게 되었다.
시간이 오래 지나고, 내가 5수를 마친 뒤 의대 진학을 앞둔 시점, 난 이친구에게 도대체 XX학원에서 내 이미지가 어땠냐고 물어봤다. 내가 니 처음 봤을떄 이미지는 존나 불쌍하게 생긴 눈 충혈된 친구였다고 하면서.
"아니 형 시발 형 3수, 나 재수때 이미지면 형 그때 존나 재수없긴 했어. 쉬는시간에 뭔가 인싸같은데 맨날 빌보드 차트에 들어가지고 특권층이나 누리는 자습실 쓰고 있고, 맨날 우리 때려잡던 학생 관리 선생님들하고도 능글맞게 얘기하면서 학원 썩은물 티 존나 내던데? 속으로 '하 저런새끼가 대학은 또 잘가겠지 인생 존나 불공평하네'이랬는데 강대에서 그인간을 다시 볼줄은 몰랐지."
흠 내가 그렇게 재수없는 이미지였나. 난 나름 아싸라고 생각하고 다녔는데. 그래서 업보스택을 맞은건가 싶긴 했다.
둘은 얘기해보니 생각보다 겹치는 것이 많긴 했다. 판타지 소설을 워낙 좋아해서 국어영역 썩은물이었던 것도 그렇고, 서태석 선생님이라고 그 당시 유명한 생명과학 선생님이 계셨는데 각자 그 선생님 단과 듣다가 에피소드가 하나씩 있었다. 나는 생2 수업을 들으면서 DNA 복제의 모가닥과 딸가닥 얘기가 나오길래 개드립이 치고 싶어서 옆에 있던 친구한테 딸가닥 딸가닥 말타는 흉내를 내다가 '이놈시끼'하고 분필로 헤드샷을 당한 적이 있어서 그 수업 관종이 되었던 전적이 있는 사람이었다. 그 친구는 그 선생님이 눈이 빨갛다고 '여 토끼야'맨날 그렇게 부르시니까 '선생님 저 그래도 3초 이상은 버텨서 토끼 아니에요'드립을 쳐서 그 선생님의 어안을 막은 전적이 있었다. 한마디로 그 단과의 '선생님이 수업때 맨날 두들겨패던 타의적'관종 전적이 있는 사람들이니 어떻게 안친해지고 배기리.
사실 이 친구를 만난 이후나 그 이외의 이야기를 별로 쓸 것이 없는 것이, 재수학원 생활이란게 늘 그렇치만 아무리 자유로워도 다람쥐 쳇바퀴 그 자체였고, 뭐 이친구랑 매일 시시콜콜한 판타지 설정 이야기, 내가 나중에 소설을 쓴다면 어떤 세계관을 만들고 싶다 이런 이야기 한 것 말고는 크게 에피소드가 없었다.
아 딱 하나 있긴 했는데, 그 당시 강욱이라고 딱 풍채에서부터 수학의 은둔고수 느낌이 풀풀 나던 선생님이 한분 계셨다. 이분이 보면 수업시간때 맨날 이상한 아재개그를 쳤는데, 어느날 OX벡터를 보고 퀴즈벡터 이러시길래 '에이 황소벡터도 되는데'중얼거렸다가 그분이 갑자기 '어 이친구가 새로운 관점을 보여줬어요! OX벡터는 황소벡터도 됩니다. 제가 한거 아니에요. 이친구가 한거에요. 여기 맨 앞에 앉은 친구.'이래서 좀 많이 쪽팔렸던 기억이 난다.
그렇다고 공부가 즐겁고 잘 되던 것은 아니었는데, 당시 나는 극심한 스트레스로 40분 이상 공부를 못하는 몸이었고, 집중력이 그냥 오링이 나버린 상태였다. 정신과 실습 때 본인 분석 레포트를 써본 학생현자의 좆문가적인 지식으로 보건데 그 당시 약간 기분장애나 이런 정신적인 만성 감기가 있던 상황이 아니었나 싶다. 그래서 내가 스트레스 심한 장수생이면 꼭 정신건강의학과 한번 가보라고 하는 이유기도 하고.
그 상태로 억지로 끌고갔으니 뭐 사실 더 높은 성적을 기대하기는 무리였고, 그럼에도 그 당시 강대의 역량은 너무나도 엄청나서 강대에서 주는 숙제나 어째 좀 깔짝대었더니 그래도 수능때 연고대 낮은과나 서성한정도 공대 성적은 나오긴 했다. 강대의 미친 멱살캐리+3수때 쌓아둔 실력을 덜 깎아먹어서의 콜라보가 아니었나 싶다.
-물론 그 과정도 순탄하진 않았다. 분명 가채점상으로 내가 생2가 43점인가 그랬는데 이게 예상 등급컷에서는 안정적 2등급이었다. 그런데 16생2는 아는 사람은 알겠지만 믿고 찍는 2번이라는 역대급 사태로 인해 그 난이도로 1컷이 48이 되고 2컷이 45가 되는 모친이 사라져버린 시험이었다. 성적표 받는 전날 등급컷을 보고 멘탈이 그냥 갈려버려서 전날 술 존나 마시고 자려고 했는데 잠이 안와서 숙취로 밤을 꼴딱 샌 뒤 바들바들 떨면서 성적표를 받으러 갔는데 알고 보니 생2가 46이었나 45였나 그랬다. 가채점보다 실채점이 높아서 그나마 다행인 경우였달까-
그리고 별 생각 없이 털레털레 가서 본 논술에서 고대 성대 서강대 3합격을 이뤄내며 논술이 나이를 보지 않는다는 것을 증명함과 동시에 정말 내 말대로 재수때 붙은 그 곳을 다시 가게 되었다. 그 당시 강대는 위대했다. 찬양해 강대. 지금은 시대인재도 있어서 그정도인진 모르겠다.
그렇게 합격증을 수집하고, 방배동의 고시텔에서 편안한 마음으로 쉬면서 일년을 정리했다. 지긋지긋하게 오래 있었던 단칸방이었고, 내 인생에서 가장 정신적으로 힘들었던 시기를 함께했던 방이었다. 그렇게 내 신변들을 정리하며, 한 해를 마무리할 무렵, 여자친구로부터도 이별을 통보받았다. 그 당시는 내가 대학도 붙었고 맨날 부리던 꼬장도 안부리고 더 잘해줄 자신이 있는데 왜 지금 나를 찬건가 이해를 못했었다. 나이가 든 지금 와서 생각해 보면 그 친구도 3수로 스트레스가 많았을텐데 1년간 내 꼬장 받느라 얼마나 힘들었을까 싶다. 딱 내가 대학교 붙고 나서 헤어지자 한 것을 보면 그 친구 나름대로 이미 진작에 정이 털렸을 것임에도 나에게 준 마지막 배려가 아니었을까.
그렇게, 3수로부터 시작된 모든 스노우볼을 다 정리하고, 새로운 대학교에서 새로운 인생을 살리라 다짐하며 4수생의 느와르는 그렇게 막을 내렸다. 대치동에 와서 먹었던 첫 끼가 오니기리였고, 고대 논술 전 마지막 끼니도 오니기리여서 내 나름대로는 수미상관 완벽했다고 여겼던 그 느와르 말이다. 그리고 인생 모른다고, 다시는 입시 쳐다도 안볼 것 같았던 내가 5수를 하고, 6수를 하고, 편입을 하고, 과외강사로, 또 이제는 유튜브 하겠다고 나대면서 아직 이 판에 있을지 누가 예상했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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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건 진짜 여담인데, 내 고등학교 1학년때 담임선생님이 서강대 수학과 출신이셨다. 그때 우리반이 그 선생님의 첫 담임반이어서 정말 엄청 잘해주셨고, 그래서 지금도 나는 은사님이라 생각하는 분이다.
그런데 시대 서바이벌 수학이 첫 런칭했을 때가 15년도였고, 뭐 당시에 강대에서 떠오르는 신흥 강자라는 선생님 수업이 있다길래 뭐 수업은 들을 생각 없고 모의고사 연습이나 해야징 하고 무지성으로 그 선생님 강의를 신청했다(사실 좀 늦게 알아서 빈자리가 거기밖에 없기도 했고). 음 근데 잘 가르치셔서 이쌤 성공하시겠네 했었다. 그리고 실제로 몇년 뒤 시대로 이적하셔서 꺼무위키에 등재될 정도의 선생님이 되셨고.
이 얘기를 왜하냐고? 그 선생님도 서강대 수학과셨으니까.
고대 붙고 나서 담임선생님을 찾아가 그 강대 선생님도 서강대 수학과시던데 혹시 아시냐고 여쭤봤다. 설마 아시겠어 하고 던진 얘기였는데 선생님이 굉장히 반가워 하시는 것이다.
"아 XX이 동기였어. 걔 그때 과탑이었는데 어디 특목고 교사 하다가 강사한단 얘기까지는 들었지. 그 이름을 너한테 들을줄은 몰랐네. 걔 뭐하고 지내니?"
"아 그쌤이요? 지금 강남에서 잘나가셔서 차가 벤츠던데요?"
담임선생님은 내가 본 이래 가장 현타가 온 표정을 지으며 한숨을 푹 쉬셨다.
"에효 동기는 그러고 있는데 나는 여기서 뭐하고 있는거니..."
그리고 그 선생님은 진짜로 현타가 오셨는지 몇년 뒤 교사를 떄려치우고 세계일주를 다니다 지금은 코로나로 국내 모처에서 휴양중이시다. 설마 내가 농담으로 한 소리가 나비효과를 가져온건 아니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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