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nu Roman. [69422] · MS 2004 · 쪽지

2014-01-12 01:55:24
조회수 566

끄적끄적 #1 지키고 싶은 것에 대하여

게시글 주소: https://orbi.kr/0004207826




끄적끄적 #1. 지키고 싶은 것에 대하여


널 지키고 싶었다. 너만은 내 모든 것을 다해서라도 지키고 싶었다. 사람들이 바보같다 했지만, 그래도 난 널 사랑했다. 왜냐면, 그냥 널 사랑했다. 이유는 딱히 없었다. 그냥 사랑해서다. 날 사랑해서. 그러니까, 널 사랑하는 거다. 인간의 근원적인 본능을 이성으로 풀어내려 할 때 두통은 생긴다. 집어치우자. 본능을 설명하는 건 죄악이다. 솔직하지 못한 것이다. 그녀와 자고 싶은데 이유 없고 저 음식을 먹고 싶은데 이유 없다. 자고 싶어서, 먹고 싶어서 그게 이유다.  


그래도, 사람들은 말리더라. 왜 널 지킬 거냐고. 그렇게 지켜서 뭐하느냐고. 밥먹여 주느냐고. 맞아. 넌 내게 밥을 먹여주지 못한다. 되려 널 지키는 데엔 엄청난 스트레스가 따른다. 때론 다치고, 때론 죽는 사람까지도 있다. 널 지키기 위해서. 넌 모든 이들에게 사랑받는 존재다. 특히 어떤 이들에겐 종교와도 같다. 나도 널 사랑하지만 그런 광신도의 흐름에 편입되긴 싫어 겉으론 부정한다. 난 널 사랑하지 않는다고. 널 지키고 싶어하지 않는다고  

시험이 많았다. 널 사랑하는가를 묻는 시험. 대학교에 원서 낼 때, 친구와 시비가 붙을 때, 여자친구와 싸웠을 때 넌 항상 힘이 되어주기는 커녕, 나의 고민에 불을 지피고 날 더욱 괴롭게 했다. 싸우라고, 헤어지라고, 후회할 게 뻔한 선택으로 날 부추겼다. 더욱 폭력적으로, 더욱 파괴적으로. 그래서 네가 싫으면서도 난 널 지키기 위해 내 모든 걸 투자했다. 해서 남는 게 뭐다냐. 결국 알량한 신체 하나와 상처받은 내 자신, 그리고 갈기갈기 찢겨진 네 모습 하나가 남았다. 굳이 널 지키지 못할 거였다면 그냥 널 내버려둘 걸. 경기해서 핀치에 몰릴 바에야, 아예 그 경기를 시작하지 말 것을.  


사람들이 그러더라. 너에 대해 열렬히 구애하는 나의 모습을 보면서, 나이가 들면 너도 바뀔 거라고. 그런데 신기한 건, 실제로 그렇게 되어가고 있다는 거다. 이제 나도 나의 인생을 살고 싶다. 더 이상 네게 끌려다니기 싫다. 비록 한 핏줄이고 일체라지만 타인의 시선에 삶을 조타당하는 것만큼 불행한 인생은 없기에, 이제 너를 포기하려 한다. 그간 너를 지키기 위해 했던 나의 모든 노력, 눈물 다 잊으마. 다 없애주마. 너도 그냥 나빌레라. 훠이훠이. 저 멀리 바다 끝까지. 얼씬도 않도록.  


자존심. 널 지키기 싫다. 아니 솔직히 말하자면, 싫다기보다 지킬 자신이 없다. 그래서 슬프다.


0 XDK (+0)

  1. 유익한 글을 읽었다면 작성자에게 XDK를 선물하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