젊은 날을 책과 함께 기억할 수 있다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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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 권의 미래
정끝별
허름할수록 늠름한 책, 내 청춘의 도서관에서 빌려 읽은 책, 책꽂이 가장 좋은 위치에 나란히 꽂혀 있는 책.
1985년의 <바슐라르 硏究> (곽광수 · 김현, 민음사, 1976 : 840.9)
반납하려는 순간 꼭 갖고 싶어졌던 책. 절판되었다는 말이 거듭될수록 꼭 가져야만 했던 책. 신촌 일대 서점을 돌다 ‘알서점’을 나왔을 때 한 남자를 내 뒤에 세워두게 했던 책. 담배 한 대 필 시간만 내달라는 한 남자의 손가락이 2층 커피숍을 가리키게 했던 책.
한 남자가 얘기했다. 가난한 남자가 부잣집 여자를 짝사랑했다. 신분이 달라 만날 수조차 없었다. 천우신조로 여자와 맞닥뜨린 남자, 담배 한 대 필 시간만 내달라 했다. 담배 한 대가 타들어가는 시간은 너무 짧았고 여자는 떠났다. 기다란 담배를 만들어 부자가 된 남자가 여자를 다시 찾았으나 여자는 문둥병에 걸려 있었다.
한 남자가 얘기를 마치고 담배에 불을 붙였다. 담배 한 대가 다 타들어갈 때까지 기다린 나, “담배 한 대 다 피우셨죠?” 라는 말을 남기고 커피숍을 나왔다. 버스 정거장에서 그 남자 소리쳤다. “월요일 오후 5시, 이대 앞 파리다방에서 기다리겠습니다, 올 때까지!”
그때 그 바슐라르 硏究 못 샀더라면 월요일 오후 5시 이대 앞 파리다방에 나갔을지 모를 일, 그날 파리다방 아닌 도서관에서 바슐라르 硏究에 그리 빠져 있지 않았더라면!
1990년의 <山海經>(정재서 역, 민음사, 1985 : 915.2)
도서관에서 선 채로 몇 장을 넘기다 입이 딱 벌어졌던 책. 황당무계의 뻥과 구라에 침을 꼴깍 삼켰던 책. 헌책조차 구할 수 없던 책. 딱 훔치고만 싶었던 책. 역자가 다름 아닌 나 다니던 대학의 교수였던 책. 이틀을 망설이다 역자 연구실로 전화했으나 여분은 없고 개정판 낼 계획만 있다던 책.
자신의 역서를 열렬히 되짚어온 제자뻘 초짜 시인이 가상키도 했을 것이다. 국수 전골 사주며 밑그림주이던 ‘우리 시에 미친 山海經’에 대해 탐문하셨던가? 식은땀 흘리며 황지우 시인의 山海經 신작 시들을 주워댔겠으나 그 역자, 황시인과 동기 동창이었으니 하나마나했던 얘기! 지금 그 국숫집 없다. 여차여차 구한 초판본 山海經, ‘중앙일보 · 동양방송 조사자료실’에 꽂혀 있던 ‘일련번호 41898’이다.
한데 그때 그 역자 노총각 교수였다는 것 나만 몰랐다. 몇 해 뒤 나 결혼할 즈음 결혼해 나 첫딸 낳을 즈음 첫딸 낳았다는 것도 나만 몰랐으니, 나 山海經 헛 읽은 셈이다!
1992년의 <封印된 時間-영화예술의 미학과 시학>(안드레이 타르코프스키, 김창우 역, 분도 1991 : 검색 결과가 없습니다)
쿤데라 카프카 루카치 하우저 본느프와 네루다 끝에 타르코프스키를 등재하게 했던 책. 동숭동 문예회관 뒤편 2층이었던가. 기독교 전문서점까지 찾아가 기어코 사고야 말았던 책.
근처 커피숍에 들어갔을 때, 커피 한 잔을 시켜놓고 책을 읽고 있던 그때 그 남자. 수사가 될 신학도여야 마땅했다. 기독교 서점 근처였고 그 남자 읽던 책 ‘성 프란치스꼬’였고 파리한 얼굴에 흰 목폴라가 눈부셨으니.
내 封印된 時間 너머로 힐끗힐끗 그 남자를 다 훔쳐 읽은 후 계산하려는 데, 없었다. 서점에서 있었던 지갑, 커피숍에서 없었다. 우왕좌왕의 내 커피값까지 계산해주었던 그 남자, 커피값을 대신해 封印된 時間을 건넬 때 차마 연락처는 못 건넸다. 책값이 커피값을 초과했고 나 이미 애인도 있었으니.
연필로 북북 밑줄 치며 읽고 지우개로 박박 지워 반납했던 책, 지금은 검색되지 않는다. 누가 훔쳐갔을까? 난 아니다! 내 책꽂이에 꽂힌 책은 그때 그 남자가 종신서원할 때 헌책방에 팔았던, 연락처 대신 건넸던 내 封印된 時間이다. 틀림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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