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쥬✨ [979083] · MS 2020 (수정됨) · 쪽지

2020-10-14 08:35:40
조회수 295

공황장애 단약기3)당신들의 세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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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 문득 그런 생각이 든다. 어른들의 세상에 들어가 보면, 이미 내가 가야할 길은 다 정해져 있다는 것. 탁구장에 탁구를 치다가 한 어른이 내게 말을 걸었다. 


“학생, 탁구를 되게 열심히 치는 것 같네?”


-네! 탁구가 너무 재미있어서요. 요즘 많이 치죠.


“근데, 술 같은 건 안 마셔? 탁구를 재미있게 오래 치는 것도 좋은데 그 나이면 술집에서 친구들이랑 술 마셔야 할 나인데..”


글쎄.. 난 이말을 듣고 난 후 지금까지 그 사람에게 헷갈리고 있다. 21살의 나이이다. 이 맘 때 쯤이면 반드시 무얼 해야 하는 걸까? 난 술을 좋아하지 않는다. 더하여, 내가 생각했을 때 배울점이 전혀 없는 친구들과 모여 담배를 태우는 시간을 갖는 것도 싫다. 그냥 현실적 조건에 맞게 내가 나를 직접 디자인하는 삶을살고 싶을 뿐이다. 어른들의 세상에선, 내가 살아가야 할 타임스케줄과 시간표가 반드시 존재한다. 몇 살엔 군대를 가고, 몇 살엔 취직을 해야하고, 몇 살엔 결혼을 해야하고, 몇 살엔 시험을 합격해야 하고...


근데, 삶의 경험이 참 많이 있다고 자부하면서도 그런 스케쥴을 내게 떠미는 어른들이 어쩔 때는 보면 참 우습다. 정말로 이 세상에서 성공했던 사람들은, 그네들이 말했던 타임 스케쥴이 통용되지 않는 역사를 가졌으므로. 뭘로 성공할 지도 모르겠고, 뭘로 돈을 벌어 먹고 살지도 모르겠지만, 한 가지는 확신할 수 있다. 나만의 색깔을 살리는 역사를 내가 만들 수 있어야 한다.


앞으로의 사회에서는 그렇다고 난 생각한다. 더 이상 이차방정식의 근의 공식이 통하지 않는, 우리는 지금, 5차방정식의 세계에 살고 있다. 근의 공식 따위 존재하지 않는 세계. 그러기에 해을 구하고 싶다면, 다른 원리를 필연적으로 빌려와서 대략적인 근삿값만을 구할 수 있는 그런 세계에 살아가고 있다.


이 세상에서 수 많은 어른들과 대화를 하며 지내다보면 마치 내가 이미 어떻게 살아가야 할 지가 다 정해진 기분을 받는다. 나는 솔직히 그러긴 너무도 싫다. 때론 탁구를 원없이 치고, 때론 수도 없이 넘어지고, 때론 무언가에 사로 잡혀 공부를 하고..


누군가의 타임스케쥴이 아닌 내 내면의 소리에 근거한 삶의 그림을 그리고 싶다. 삶은 그런 것이라 배웠다. 어린 왕자가 그렇게 살아가야 한다고 말했다. 수많은 사람들이 명작이라고 칭찬했던(당연히 누군가에겐 아닐 수도 있지만) 신카이 마코토의 <너의 이름은>의 타치바나와 미야미즈가 그렇게 해야한다고 말했다.


이 세상을 어딘가에선가 밝게 만들고 있는 사람들은 한결같이 나 자신에 근거한 소리를 중요시 여긴다. 그래서, 내 주변에 어른들의 목소리를 당분간 닫기로 했다. 그것이 잘못 되었다고 생각한다기 보단, 내가 살아가고 싶은 자신의 운명과 교집합이 없는 것 같아서. 나의 배반사건을 보는 일이란, 참으로 의미없는 것이 아닌가.


날씨가 흐릿흐릿한 어느 가을이다. 아무래도 지금 떠오르는 건

며칠 전 산책로에서 보았던, 눈에 고름이 낀 한 고양이다. 그 고양이에게 먹이를 주면서 말해주었다. 언젠가 이 고름이 다 나아서 너만의 방역을 찾으라고. 세상은 아름다운 것이니, 부디 다른고양이들과 같이 이 세계를 한없이 여행하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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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살자소년 · 977294 · 20/10/14 09:26 · MS 2020

    멋진 글이에요, 재밌게 잘 읽었습니다!
  • ✨공쥬✨ · 979083 · 20/10/14 11:43 · MS 2020

    감사합니다. 무존재주의를 공부하고 있는 소년 :)

  • Isshoman 빈지노 · 962597 · 20/10/15 01:16 · MS 2020

    오늘 처음 공쥬라는 닉네임을 보기 되고 쓰신 최근 글을 몇개 찬찬히 읽어보았습니다
    예술적인 기질적 우울감의 소유자,
    인생 속에서 생각하는 법을 아시는 분 같아요

    주변을 둘러싼 저마다의 의미가있는 것들의 깊음이라해야하나?를 느끼는 인간으로서의 대가로 정신적인 고통을 수반하는 것 같기도 하고..
    참 .. 혼란스러움이란게 이렇게 문학적인 삶을 사시는 분들의 숙명같은걸까요

    내면 깊이까지 너무 내려가버려서 우울감에 아예 잠식되어버리지 않고
    님이 행복하고 편안하다고 하시는 모습 앞으로 많이 보고싶네요

  • Isshoman 빈지노 · 962597 · 20/10/15 01:19 · MS 2020

    가장 공부하기 싫어서 도망쳐와서
    별거 아닌 일들에 화도 내고 웃기도 해보려고 들어오는 오르비인데
    님 글을 읽으면 뭔가 가라앉는 기분이 드는게 있네요
    글 좋은 것 같아요
    마침 오르비에 구독기능이 있는지도 알아서 처음으로 구독해봅니다..ㅎㅎ

  • ✨공쥬✨ · 979083 · 20/10/15 07:14 · MS 2020

    감사드려요..! 사실 이렇게 살게 된 이유는 다른 것은 아니고 그저 선천적인 성격때문인 것 같아요. 어릴 때부터 무언가 당연하다고 어른들이 말했을 때 잘 까불었고 의문을 많이 던졌어요.

    납득이 잘 안갔거든요. 빈지노를 좋아하시니까 빈지노씨로 예를 들자면, 미대를 졸업하고 나와서 붓을 놓고 마이크를 잡는 것도 누군가의 꿈이 될 수 있으므로 마땅히 응원받아야 하는 것인데 20살에 내가 알게 된 세상은 그렇지 못했어요.

    오히려 그런 사람을 비정상적으로 몰아가다가, 막상 성공하게 되면, 그를 영웅시하고, 또 언제 그랬냐는 듯 네가 그렇게 될 줄 알았다며 ‘팬’을 자처하죠. 주체성의 부재로 인한 사고같았어요.

    그래서 내가 살아가는 삶만큼이라도, 이 주체성을 키우고 내가 스스로 세상을 보는 방식과 방법을 공부해왔는데, 마음 속에서 서서히 자라나던 슬픔과 공허가 터져버렸어요. 그게 결국 우울과 공황이 되었죠. 서울이란 도시에서 말이에요...

    물론, 지금이야 더할나위 없이 괜찮아져서 다시 삶을 잡고 있음에 어려움을 느끼지는 않지만, 그 당시에는 너무도 슬펐던 기억이 있어요. 따뜻함 말씀해주셔서 감사해요. 앞으로 잘 부탁해요!

  • 연대사회학과가즈아 · 990373 · 20/11/09 01:39 · MS 2020

    너무 공감이 되는 글들입니다 지금 알아서 쓰신글들 하나하나 다 읽어보고있어요 저랑 비슷한 사고를 하는사람이 있다니 너무 영광입니다 긴 우울증 터널속에서 한줄기 광명을 찾은 느낌이에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