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황장애 회복기17)재수 찬성론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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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짧은 21년의 인생을 돌이켜 보았을 때, 가장 격정적이고 역동적인 순간은 무엇이었을까.
고등학교에서 내면적 상처를 받아, 하는 수 없이 그 아픔을 치유하고 더 이상의 부담을 갖지 않기 위해 고등학교 졸업식을 가지 않았던 어느 겨울? 외국어 고등학교의 진학 실패로 말미암아, 친구들을 보는 것이 너무 쪽팔려서 중학교 졸업식을 가지 않았던 어느 겨울?
저 두 가지의 사건들도 물론 내 인생에서 정말 중요한 순간을 차지하고 있음은 맞는 것 같으나, 나는 그것보다도, 재수를 결심하고 강남 러셀에서 처음으로 공부했던 그 겨울을 뽑고 싶다. 어떤 소리도 없고, 어떤 손짓도 없고, 어떤 말도 없는, 그리하여 내 기억 속에는 온통 담담함 뿐인 그 씬들을.
그 담담함이, 그 고요함이 결국 내 삶에서 가장 격정적이었던 순간인 성싶다.
주위의 담담함과, 일상의 답답함 속에서 사랑을, 무한함을, 꿈을, 순수를 발견했으니까. 그 고요함 덕에 젊음의 소중함을 깨달았으니까. 재수는 분명 쉽지 않다. 매 순간 삶이 고난이고, 외로움이고, 고독함이다. 그러기에 누군가는 나처럼 재수를 하는 어느 과정에서 우울증이나 공황장애를 앓게될 수도 있다. 다만, 나는 그것을 감내해서라도, 재수를 통해서 얻을 수 있는 "넓음"을 취해야 한다고 보는 입장이다. 그 결과가 실패적일 수도 있다 한데도 말이다. 그 아픔과 고독함을 삶에서 이겨내게 되면, "눈에 보이지 않는 것이 꽤나 소중할 수 있다는 것"을 깨닫게 된다. 그것을, 나는 넓음이라 칭하고 있는 것이다.
표면적이고, 외면적으로, 재수생은 분명 고독하고, 외롭고, 담담하고, 아픈 사람들이다. 그렇지 않은가? 당장, 이 비극적인 입시 사이트의 메인글만 보아도 알 수 있다. 누군가를 위로하고, 응원하는 글이 찬송을 받기 보다는, 호사가들의 자극적인 저격글과 문과와 이과의 처절하다 못해 더러운 싸움이 메인 이슈가 되곤 하지 않은가. 이는, 분명 입시판에 뛰어든 사람들이 과도한 정신적 스트레스를 받고 있음을 표상하고 있음이 틀림없다.
그럼에도, 나는 재수를 해보라고 권하고 싶다. 위험 요소는 분명 있다. 그런 처절한 외로움과 고독 속에서 자기 자신을 되려 혐오하게 될 수도 있고, 누군가를 향한 사랑을 키우기 보다는, 분노와 증오를 키우게 될 수도 있다. 자기자신이 괴물이 되어버린 것을 깨닫지 못한 채, 젊음을 맞이하게 될 수도 있다. 한데, 그것을 삶의 동반자라고 여기고, 자신의 친구로 여기고, 증오를 잠재우고 사랑을 키워나갈 수만 있다면, 또 그를 역설하는 여러 훌룡한 강사들을 만날 수야 있다면, 그런 위험함은 자신의 삶을 아름답게 비추는 샹들리에로 변모할 것이다.
메말라버린 겨울 속에서 풍성한 여름을 만날 수 있는 것.
재수는, 나 자신을 성찰하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가를 스스로에게 주입하는 시기다. 그러기에 고독감과 외로움이 그윽히 펼쳐진 시공간으로 이루어져 있다. 다만, 크게 걱정하지 않아도 좋다. 그들을 자신을 이루는 본질적 요소로 생각할 수만 있다면, 그 아픔은 오히려 기회가 된다. 자신의 자존감, 그리고 더 나아가 세상의 무한함을 느낄 수 있는 절호의 찬스가 된다. 움직일 수 없고, 멈추어 서 있는 입장이기에 그것이 가능하다. 급히 따라가다 보면, 많은 것을 잊고 잃어버릴 수 있지 않을까? 정녕, 어른들이 말하는 것처럼 이른 나이에 대학가고, 이른 나이에 취직만 할 수 있다면, 그렇게 해서 눈에 보이는 것들만을 내 삶에 가득히, 두둑히 챙겨놓을 수 있다면 인생은 행복해지는 걸까?
도대체, 그것은 아니다.
어린 왕자가 말했듯, 수 많은 장미들과 단 하나의 빨간 장미가 구별될 수 있는 이유는, 아름다움이 아니라, "인연"의 여부 때문이다. 대학을 가기 전에, 잠시 멈추어 서서, 내가 궁극적으로 지향해야 하는 이상이 무엇일까를 차근차근 고민할 수 있는 시간이다. 그러기에, 재수는 위험 요소를 분명 가지고 있지만, 한편으로는 거대한 장점들을 머금고 있는 시공간이라고 나는 보고 있다. 무난함 속에서, 답답함 속에서, 고독함 속에서, 외로움 속에서, 어떤 파도보다도 더 격정적인 순간들을 만들어낼 수 있는 시기라고 보고 있다.
그래서, 나는 재수를 찬성하는, 재수 찬성론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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