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황장애 회복기9)문학과 철학을 공부하는 이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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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은 약하다. 문학을 해오면서, 또 향유하면서 내가 한 가지 느끼게 되는 것은, 볼을 따뜻하게 만드는 눈물을 흘릴 때야 비로소 소설 속 주인공의 마음에 가까워질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러니 어찌, 문학이 강하다 말할 수 있다 하겠는가. 온통, 슬픔과 고뇌,그리고 안타까움으로 가득 찬 글들인 것을.
밝다면 그것은 문학이 아니다. 밝음엔 고뇌가 없는 법이니까.
그래서 문학은 약해도 강하다. 고뇌하고 아파하는 모습을 보는 나의 마음 또한 약해지지만, 도리어 그곳에서 강함을 찾아낸다.
앞으로 내가 바라보아야 할 방향, 이상. 그것이 정해진다. 그 고귀함이란 스스로 분출되는 것이 아니라 치열한 고뇌와 아픔에서파생되는 것이다.
공황장애를 앓아오면서 문학을 한 동안 즐기지 못했다. 하루에도 몇 번씩 죽음이 내 삶에 가득찬 느낌을 받았기 때문인 것. 그 상태에서 누군가의 슬픔과 아픔까지 봐버린다면, 이 세상에 더이상 실존할 수 없을 것 같았다. 한데, 그건 역시 착각이었을까.
다시 한 번, 오늘 문학을 들추어보니 말로는 잘 형용할 수 없는 생의 의지가 떠오른다. 그래, 어쩌면 문학은 이 공황장애의 본질적이고 근본적인 치료제일지도 모르겠구나. 우울증에 걸린 내 또래쯤의 소녀가 [달이 아름답다]며 사모하는 누군가를 찾아나섬으로써 그를 극복해가는 부단한 여정이, 죽음을 부러운 듯 여기고, 삶을 같잖게 여기곤하는 내게 필요했을 것이다.
가끔 대학생 친구들하고 얘기를 나누다 보면, 또 독서실에서 CPA와 각종 자격증 고시, 공무원 시험을 준비하는 사람들을 흠칫 볼 때면, 나는 내 스스로 내게 묻는 것이 있다.
‘문학과 철학은 도대체 실용적이지 않은 학문인데, 나는 왜 이 두 가지에 함몰되어 버린 걸까?’
맞는 말이다. 하이데거의 일상적 현-존재의 존재양식, 퇴락을 이해한다고 해서, 칼 포퍼의 카를 마르크스를 향한 비판을 흥미있게 배운다고 해서, 우울증에 걸린 익명의, 그리고 글 속에서만 호흡하는 소녀를 사랑한다고 해서, 내게 떨어지는 이익은 그 무엇도, 어떤 것도 없다.
그런데 도대체 왜?
문학과 철학은 약하기 때문인 성싶다고 그 때마다 내게 읊조린다. 그 둘은 내게 눈물을 주니까. 말로는 형용할 수 없기에 살며시 떨어지는 그 아픔들이 있으니까. 그 속에서 내가 있을 때 비로소 강해질 수 있으니까. 이 세계 속에서 내가 존재한다는 의미와, 내가 겪어보지 않은, 혹은 앞으로 삶을 살아내는 과정에서 겪게 될 감정의 깊이를 배우는 것은 분명 실용적이지 못하다. 하지만, 하지만 말이다. 그것들이 이 세상을 더 행복하게 하고 아름답게 만드는 본질적 구성요소라고, 나는 생각한다.
그래서, 그들은 나의 치료제가 되기도, 세상의 치료제가 되기도 한다. 어른들이 가끔 그런다. 문학, 철학, 사회학을 공부할 시간에 실용적인 경영학과 경제학을 공부해보라고. 물론, 어렸을 때부터 수학에 흥미가 있었기에 언젠가 그 두가지도 내 삶에서 펼쳐보고 싶지만, 당분간은 이 감정들에 더 함몰되고 싶다.
비실용적인 실용성을 만들기 위해서, 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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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과 별개로 우울할 땐 같이 울어 줄 수 있는 소설 같은 걸 읽어도 참 좋은 듯해요 우울하다고 꼭 억지로 예쁜 거만 보고 웃을 필요는 없으니까
정말 예쁜 생각이신 것 같아요. 맞는 말이에요. 억지로 밝은 척하고 나는 괜찮으리라며 아픈 자신을 억누르는 것보다는, 때로는 널부러진 채 펑펑 울며 다음을 기약하는 것이 훨씬 아름다울 때가 있지요. 조언해주어서 감사해요. 오늘도 민아님 마음처럼 예쁜 날 되세요 :-)

저도 요즘 계속 철학 쪽에 관심이 가는데 이 글 읽으면서 그 의미를 다시 생각해보게 되네요.. 잘 읽었어요 감사합니다참 부족한게 많은 사람이지만, 좋게 읽어주셨다니 몸 둘 바를... 감사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