케렌시아 [979083] · MS 2020 (수정됨) · 쪽지

2020-08-10 09:33:01
조회수 609

공황장애 투병기1) 소중한 것

게시글 주소: https://orbi.kr/00031523100

2주 전부터, 자율 신경계에서 이상 신호를 보내는 병, 공황 장애가 나의 삶에 못처럼 찾아왔다. 평소 겁이 많던 나는, 가슴으로 부터 우러나오는 정신과를 향한 거부감에도 불구하고, 단박에 그곳을 찾아가서 상담을 나누게 되었다. 


의사는 차분하게, 나의 심장이 왜 곤두박질 치듯, 두근두근 대는지, 왜 편히 잠을 잘 수 없는지, 죽음을 향한 공포에 휩싸이게 되는지를 설명해주었다. 이 복합성은 내가 삶을 건강하게 이끌어내지 못했던 죗값이었다고 요약하면 될 것이다.


모든 것들을 잠시 다 내려놓기로 결심했다. 인간관계, 사념, 일시적 목표, 글 등을 모두. 그런 정상적이고 어떤 측면에선 퍽 일상적인 일들을 아무렇지 않게 해내기 위해서는, 나 자신의 아픔부터 치유해야 겠단 생각이 들어서다. 그렇다면, 치유법은? 내가 나를 잘 챙겨오지 못한 탓으로 가지게 된 죗값을 덜 받는 방법은?


떨리는 손가락으로, 온 시선은 작은 액정을 향한 채, 나는 공황을 이겨내는 법을 찾아 보았다. 약간의 약물치료와 직면훈련, 그리고 규칙적인 생활과 건강한 운동이 그 방법의 핵심이었다. 항불안제와, 항우울제를 가감없이 내 목에 털어놓고, 공황이라는 발작이 나를 찾아올 때 마다, 나는 필시 타락하지 않으리라는 인지적 용기를 내는 의지, 하루에 규칙적으로 3끼를 먹고 1시간 가량의 운동을 하며 지내는 걸 연습해야 했다.


이 과정에서 숲길을 걷는 것이 꽤나 많은 도움이 된다고 했다. 그리하여, 10일 전 즈음에 초록비가 한창 내리고 있어 인적이 드문, 그렇지만 내 집에선 꽤 가까운 숲길을 찾아갔다. 당시의 나는 — 지금도 그렇지만 — 모든 것들을 잠시 내려놓았던 터라, 숲길을 걷는 와중에도 세속을 향한 무의식적 욕망 따위는 표출하진 않았다. 그저, 이 숲길을 걸으며 소나무의 피톤치드가 나의 호흡에 고요히, 그리고 완연히 스며들길 바라며, 나의 병이 건강히 치유되길 바라며, 이제 막 공연을 끝낸 가수처럼 땀을 흘린 채 저벅저벅, 그저 걸었다. 


그런 처해-있음의 상황 덕이었을까. 은연 중에, 내 시선에 꽃들의 행렬이 꽂히게 되었다. 무슨 이유에선지 몰라도, 그냥 그의 냄새를 맡아보고 싶어졌다. 이윽고, 짙은 냄새와 함께 내 코에 강한 죄책감이 들어왔다. 이제껏 세계를 사랑할 것이라고, 사랑하고 있다고 강력히 주창해왔지만, 도대체 나는 이제껏 생을 이어오며 길가에 핀 꽃의 향기를 맡아본 적도 없는 놈이었다. 비를 꽤 머금어 향이 짙어진 그 길가의 아름다운 무관심이 나를 몇 번이고 두드렸을 터였다. 한데, 나는 그것을 끝까지 무관심으로 시야를 처리하고야 말았던 것이었다. 그 죄책감을 후, 하고 뱉어내니 이윽고 말로는 도저히 형용할 수 없는 쾌활함이 내 허파를 가득 칠하기 시작했다.


어쩌면 이것일까. 내가 진정으로 찾고 있었던 삶의 보물이. 이제껏, 고상한 꿈과 나만이 해나갈 수 있는 사념만이 삶의 보물이라 생각해왔다. 그야, 그것으로 말미암아 비로소 자아실현이 가능할 테니까. 한데, 공황이라는 질병에 걸리고, 잠깐 나의 시간을 가져 보니, 그 보물이 다르게 보이곤 한다. 내가 찾고 있는 보물은, 나에게 꽤 가까이에서 존재하고 있었던 ‘일상’이라는 녀석이었다는 것을, 공기 중의 질소와 산소의 비율을 예민하게 계산하지 않으며 후하고 내뱉을 수 있는 ‘생기’의 축복이었다는 것을 깨닫게 되면 말이다.








0 XDK (+0)

  1. 유익한 글을 읽었다면 작성자에게 XDK를 선물하세요.

  • 심리학개론 · 802910 · 20/08/10 11:10 · MS 2018

    글 쓰는 것을 보니 정말 세심한 사람이라는게 느껴져요. 자기착취의 원인은 긍정성의 과잉으로 부터 시작된다고들 하죠, 워낙 사회가 좁은 문을 통과할 것을 강조하다 보니...하여튼 이 아픔의 모든 귀책사유가 당신에게 있다는 것은 아니라고 말해주고 싶어요. 응원할게요.

  • 케렌시아 · 979083 · 20/08/10 17:27 · MS 2020

    힘이 됩니다. 고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