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학이순한맛 [869984] · MS 2019 · 쪽지

2020-03-29 22:15:32
조회수 7,814

수능연기 경험자가 개학이 연기된 학생들에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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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녕하세요. 학학이 칼럼을 연재하는 서울대학교 철학과 18학번입니다. 코로나 19 때문에 정말 어려운 시기인 것 같아요. 여러분의 개학이 추가로 연기된 것은 물론이고, 대학에서도 3월 캠퍼스의 낭만도 느끼지 못한 채로 애매하게 온라인 개강을 맞이했네요.



언제 끝날지 모르는 이 상황에서 특히 입시를 준비하던 학생들은 더욱 흔들리고 불안할 듯 합니다. 그래서 오늘은 제가 실질적인 정보를 전달하기보다는 모두가 처음 겪는 이 무서운 상황에서 혼란과 불안을 느끼고 있을 수험생들에게 위안을 드리고자 글을 쓰게 되었습니다. 저도 이 정도까지는 아니었지만 나름 수능이 연기되어본 경험이 있는 학년이었고, 그 경험을 통해 여러분들께 조금이라도 공감을 할 수 있지 않을까 해서 작성하게 되었습니다. 어떤 내용을 쓰면 좋을지 많은 고민을 해보았는데, 제가 그 당시에 처했던 상황과 어떻게 그 시간을 보냈는지, 그리고 나중에 그때를 어떻게 성찰했는지를 한 번 공유해보면 좋겠다고 생각했어요. 편하게 썰을 듣는다고 생각하고 읽어주시면 될 것 같습니다.



저는 2017년 10월, 수능을 약 40일 정도 앞두고 아주 크나큰 시련을 겪게 됩니다. 예상하신 분들도 있겠지만 3년 사귄 여자 친구와의 이별이었습니다, (심지어는 굉장히 안 좋게, 여러 문제가 엮인 채 헤어졌습니다,,) 당시 수시에 무게를 두고 준비했지만 최저학력기준 때문에 수능까지 긴장을 풀 수 없었던 저는 멘탈이 완전히 무너지고 말았습니다. 일주일 정도 공부를 모두 놓은 채 방황했던 것 같아요. 



 그러나 그때 저는 다행히 '아, 내가 여자 친구도 잃고, 대학까지 실패하면 진짜 바보가 되는 거 아닌가?' 하는 생각을 했고, 한 달 정도 남은 기간만 이 악물고 버텨보고, 슬퍼하고 싶으면 수능이 끝나고 슬퍼하자고 마음을 고쳐먹게 되었습니다.



일단 그렇게 마음을 먹고 나니 세상이 정말 혐오스러웠기 때문에 주변과의 소통을 모두 단절한 채 공부만 할 수 있었습니다. 슬픔을 동력으로 공부하니 독기가 되더라구요. 아침 8시에 학교에 도착하면 그때부터 오후 5시에 하교할 때까지 한 번도 일어나지 않고 책상만 보았습니다. 물론 한 마디도 하지 않았구요. 오전에는 모의 수능을 보았고, 점심에는 포도당 사탕 두 알을 씹으면서 오답을 했으며 오후에는 부족한 과목을 보충했어요. 그렇게 끔찍한 한 달 남짓을 버텨내며 드디어 수능 전날까지 올 수 있었습니다. 저는 내일이면 다 끝난다는 생각에만 온 신경을 집중하고 있었죠.



아직까지도 그날은 잊을 수가 없네요. 후배들의 장도식을 받고 집에 와서는 우선 1년 동안 풀었던 문제집을 방 한 구석에 쌓았습니다. 저의 키보다도 높게 쌓인 문제집들을 보며 뿌듯함을 한 번 느끼고, 대충 개념정리를 해놓은 노트들을 훑어보는데 눈에 하나도 들어오지 않았던 기억이 나네요. 마지막 공부를 마친 뒤에는 그동안 써온 플래너를 돌아보았습니다. 아, 열심히 살았구나하면서요.



 그렇게 저녁까지 시간을 보내고 나서는 경건한 마음으로 목욕재계를 하고, 최후의 식사를 했습니다. 한참 식사를 하던 중 갑자기 반 친구들 카카오톡방이 시끄러운 거예요. 수능이 연기되었다면서. 저는 당연히 믿지 않았죠. 오히려 신경이 날카로울 때여서 수능 전날까지 그런 장난을 치는 것에 짜증을 냈던 기억이 있습니다. 

 그런데 잠시 후 교육부장관이 화면에 나온 모습을 보고는 저는 더 이상 식사를 할 수가 없었습니다. 그날은 정말,, 난리가 났어요. 독서실에서 우는 애들, 버린 문제집 다시 찾으러 가는 애들, 바로 봉투모의고사 사러 서점에 가는 애들,, 저는 밥을 남기고 일단 밖으로 나와서는 동네 친구들과 한숨만 쉬며 벤치에 앉아있었던 기억이 있네요.



아무튼 그 다음날 아침 저는 도살장에 끌려가는 소 마냥 서점으로 향했죠.. (그때가 가장 죽고싶었던 것 같아요) 어차피 없었을 시간인데 이미 공부 끝난 거 아닌가? 하는 생각이 쉴 새 없이 저를 유혹했지만 일주일 뒤에 결과가 좋지 않았을 때 그 기간이 얼마나 후회될지 생각하니 어쩔 수가 없더라구요. 그렇게 이번에는 진짜로 마지막이라는 생각으로 일주일치 봉투모의고사를 더 사서 집으로 다시 돌아왔답니다. 저는 제게 갑자기 생겨버린 그 시간 동안에 정말 반 시체 상태로 그때까지 해왔던 것보다 더 기를 쓰고 문제를 풀었습니다. 특히 불안했던 영어(6월에 3등급..을 맞았나..)는 하루에 세 개까지도 풀고 그랬죠. 지금은 웃으면서 말하지만 그때는 정말...하하



 지옥같은 일주일을 더 보내고 나서 미뤄지기 전에 수능 전날과 같은 의식을 치루고 드디어 저는 시험을 볼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 결과는 아주 만족스러웠어요. 인생에서 최고 점수를 수능날 받았거든요! 특히 영어를 다 맞았는데 저는 지금도 그 마지막 일주일이 있었기 때문에 그게 가능했다고 생각해요. 다른 과목들도 마지막까지 놓지 않았기 때문에 그런 좋은 결과를 받을 수 있었구요. 이렇게 해서 저의 다사다난한 수험생활은 끝이 나게 됩니다.



 요즘 무언가가 연기되었다는 기사들을 많이 보면서 그때를 종종 회상하곤 한답니다. 그럴 때마다 가장 먼저 드는 생각은 그때 흔들리지 않고, 하던 대로 하길 참 잘했다는 것입니다. 여러 후배들, 과외 학생들에게 코로나에 관련한 수많은 질문들을 받고 있습니다. '개학이 연기되어서 계획이 다 틀어졌어요, 마음이 불안하고 집중이 안 돼요, 중간고사가 없대요' 와 같은 여러분의 고민들을 보면서 참 공감이 되기도 하고, 누구도 탓할 수 없음에 안타깝기도 합니다. 그런 여러분들께 제가 가장 드리고 싶은 조언이자, 제 모든 답변을 관통하는 핵심은 여러분은 충분히 잘 하고 있었을 테니 하던 대로 계속 해보자는 것입니다.



 원래 세운 계획이 틀어지고, 뭔가가 바뀌는 것은 누구나 불안하고 마음에 들지 않는 상황일 것입니다. 괜찮아요. 당연한 거예요. 하지만 불안하고 공부가 안 된다고 해서 그 시기를 그냥 흘려보내버리면 나중에 결과가 좋지 않게 되었을 때 분명히 누군가를, 무언가를, 혹은 자신을 원망하게 될 것입니다. 반대로 예정에 없던 시간이 생겨버렸을 때 그것을 잘 활용한다면 저처럼 나중에 그때를 회상하면서 그 시간들이 선물과 같은 것이었다고 생각하겠죠! 개학을 하든 하지 않든, 시험을 보든 안 보든 똑같이 흐를 시간이니 그것을 어떻게 활용할지는 여러분들의 몫이랍니다.




2020. 3. 29.

 코로나 19로 힘든 시간을 보내고 있을 모든 학생들에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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