폴드 [622527] · MS 2015 · 쪽지

2019-05-13 01:00:16
조회수 1,744

일기. 방향성을 잃은 각오

게시글 주소: https://orbi.kr/00022754317

지금으로부터 5년전 새벽에 쓴 저의 일기입니다.


공부도 힘듭니다. 아니 공부는 힘듭니다.

공부하는 거 절대 쉽지 않습니다.


다들 말랐다고 하는 제가,

군복무 시절 군장을 메고 누구보다 지치지 않은 이유는

아니, 지쳐보이지 않았던 이유는

오랜 수험 생활이 만든 악 때문이었습니다.


너는 책상머리에서 공부만 했을 텐데, 너보다 뒤떨어졌다는 게 부끄러웠다는

선임의 한마디를 아직도 기억합니다.


여러분은 힘든 길을 걷고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돌아봤을 때

더욱 가치있게 남을 수 있겠지요.


힘들었던 순간의 치열한 고민은

결코 사라지지 않습니다.


여러분의 성공을 응원합니다.


-----------------


'자기에게 끊임없는 성찰의 눈길을 던지는 것, 자신을 정신적인 무위와 혐오할 만한 둔감 속에 방치하지 않기 위해 노력할 것이 필요하다. 그리하여 너는 지금 어떠한 일의 와중에 있으며, 그 의미는 무엇이며 또 그러한 네가 현재에게 지불해야 할 것은 어떤 것들인가에 대해 항상 눈떠 있어야 한다.'

 

'그러므로…… 나는 이렇게 변하지 않으면 안 된다. 일체의 잡념은 버릴 것이다. 상상력의 과도한 발동은 억제할 일이다. 음과 색에 대한 지나친 민감을 경계할 것이다. 언어와 그것의 독특한 설득 형식에는 완강할 것이다. 감정의 분별없는 희롱, 특히 그것의 왜곡이나 과장은 이제 마땅히 경멸할 일이다…….'

 

'시계의 초심 소리를 듣는 데 소홀하지 말아라. 지금 그 한순간 순간이 사라져 이제 다시는 너에게 돌아올 곳 없는 곳으로 가버리고 있다는 것을 언제나 기억해라. 한번 흘러가버린 강물을 뒤따라 잡을 수 없듯이 사람은 아무도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 떠날 수 없다. 더구나 너는 이제 더 이상 그 초침 소리에 관대할 수 없으니, 허여된 최대치는 이미 낭비되고 말았으니.'

 

'너는 말이다, 한번쯤 그 긴 혀를 뽑힐 날이 있을 것이다. 언제나 번지르르하게 늘어놓고 그 실천은 엉망이다. 오늘도 너는 열여섯 시간분의 계획을 세워놓고 겨우 열 시간분을 채우는 데 그쳤다. 쓰잘 것 없는 호승심(好勝心)에 충동되어(바둑을 말함인 듯.) 여섯 시간을 낭비하였다.

 

이제 너를 위해 주문을 건다. 남은 날 중에서 단 하루라도 그 계획량을 채우지 않거든 너는 이 시험에서 떨어져라. 하늘이 있다면 그 하늘이 도와 반드시 떨어져라. 그리하여 주정뱅이 떠돌이로 낯선 길바닥에서 죽든 일찍감치 독약을 마시든 하라.'

 


-이문열, 젊은 날의 초상 1부 하구(河口)

 

 

내가 이 글을 읽고 무슨 생각이 들었을까? 어떤 생각보다 나도 모르게 천천히 예전의 모습으로 돌아간 내가 보였다. 피상적으로 내가 태만한 행동을 지속적으로 보였다는 것은 알고 있었다. 문제는 근본 원인을 알지 못한채 역시 피상적으로 해결하려고 했다는 것이다. 서서히 공부 시간이 떨어지더니 이제는 하루 이틀 안 하는 것도 우습게 되었다. 열심히 집중하던 인터넷 강의는 이제 색깔이 변하며 파동이 전달되는 어떤 것에 불과하게 되었다. 위기 의식을 가지지 않은 것은 아니나, 책상 앞에서 쉽게 사라지고야 마는 그런 형태의 것이었다.

 

변화를 꾀해보자고 수면 시간과 신체적 활동을 개선하기 위해 간단하지만 실천은 어려운 그런 계획을 세웠다. 물론 좋다. 그러나 과연 이게 바닥으로 치달은 내 생활을 개선시킬 수 있었을까? 잠깐이나마 책상에 앉아본 오늘의 경험에 미루어 보았을 때 그런 일은 결코 일어나지 않을 것이라고 확실히 말할 수 있다.

 

글로 돌아가본다. 젊은 날의 초상 중 '일기' 부분이다. 환경이 다르지만 대입이라는 목표는 같다. 철저한 자기 관리, 공부를 위해 몸부림쳤던 그 날이 그대로 묻어나는 표현들이다. 하나 하나 정말 공감되는 내용 뿐이다. 누구나 공부 앞에서는 비슷한가보다. 그러나 달리 말하면 결국 소위 '승자'들은 이것들은 결국 견디었다는 말이다. 쉽게 무너져내리고 있는 누군가와 대조되는 모습이다. 그러면서 그 자들과 같은 목표를 향해간다는 사실이 부끄러울 따름이다.

 

누구도 인정하지 않을 수 없는 극한의 자기 절제와 노력. 조금 황당하기도 하지만, 나는 대학 간판보다 나태하게 보냈던 지난 시간을 후회하며 나를 바꾸기 위해서, 지난 시간을 되갚기 위해서 재수를 그것도 독학 재수를 하기로 결정했다. 다시 말해 수험 생활 동안 견디기 힘든 인고의 시간을 기어코 견뎌내어 그 값진 경험을 평생 들고다닐 수 있도록 하자는게 내 궁극적인 목표였다. 물론 더 좋은 대학에 가는 것 또한 매우 중요한 목표이다. 다만 대학은 그에 상응하는 만큼 따라오리라고 생각했을 뿐이다.

 

그러나 현재 내 모습은 고통과 괴로움을 견딜 수 없어 회피하기 급급한 모습일 뿐이다. 고통을 견디자며 시작해놓고 고통이 무서워서 어떻게든 피해보려고 애쓰고 있다. 그렇다면 도대체 이 시간은 무얼위해 존재하게 된 것인가? 간단하다. 무엇을 위해 존재하는게 아니다. 목적없이 흐름에 떠밀려갈 뿐이다. 아무런 목적도 없이 책을 보고 있는 내가 대견스러울 따름이다.

 

미쳤다. 다시 돌아오지 않는 이 시간에 나는 무엇을 하고 있는 것인가? 결의에 찬 각오는 어느새 옛 습관과 자기합리화에 잡아먹혀있었다. 그럼에도 시나브로 일어난 일이기 때문에 모르고 있었다.

 

다시, 초심으로 돌아간다. 조금 공부해서 명문 대학에 간 사례들은 잊어버리자. 성공한 사람의 과정은 매우 쓰지만, 그 결과는 매우 달다. 그 사람이 '조금 공부'해서 좋은 결과를 거두기 위해 그 때까지 어떻게 살아왔는지 내가 알 수 있나? 앞뒤 다 잘린 달콤한 결과따위에 현혹되어 스스로를 망칠 뿐이다. 잃어버린 방향 속에 피상적으로 공부하겠다 공부하겠다 이런 건 아무런 쓸모가 없는 것이다. 처음 목표 그대로 다시 간다. 극한의 자기 통제와 인고의 시간을 견디는 것. 이것이 앞으로 남은 시간의 존재 이유이다. 일기장 속 '나'가 쓴 말- 한낱 대학입시에 그처럼 무거운 의미를 부여하게 된 경위는 지금으로서는 역시 잘 이해되지 않지만- 내가 충분히 대답했다고 생각한다.

 

남은 날 중에서 단 하루라도 그 계획량을 채우지 않거든 너는 이 시험에서 떨어져라. 하늘이 있다면 그 하늘이 도와 반드시 떨어져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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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가느응세계 · 865439 · 19/05/13 01:39 · MS 2018

    정말 감명깊게 읽었습니다
    일요일 헛되게 보낸 저를 반성하게 되네요
    풀어질때마다 두고두고 읽겠습니다

  • 폴드 · 622527 · 19/05/13 02:57 · MS 2015

    팔로우까지 해주셔서 프로필 들어갔다가
    진짜 예전 생각나서 답글답니다.

    저도 본가에서 나와서 혼자 고시원 생활하면서 수험생활했습니다.
    그때는 몰랐지만 힘들었지만 또 좋았던 시절이었습니다.
    앞으로 다가올 생존에 대한 고민을 유예할 수 있었고
    혹시 모를 가능성과 희망에 몸을 맡길 수 있었습니다.
    한편으로는 불안습니다.
    수능 그 날 잘해낼 수 있을까?
    또 무너지지 않을까?

    너무 무서워서, 완벽한 수능 시험장은 아니었지만
    수능 그날을 체감해보려고 했습니다.
    익숙한 모의고사라는 말 대신 모의시험이라는 말을 쓰면서
    8시 10분 전에 도서관 혹은 독서실에 도착해서
    국어 지문을 요약해보고 시험 대책을 다시 적어보고
    그렇게 진동 알람이 울리면
    안 보이게 두었던 OMR카드를 꺼내서
    컴퓨터용 사인펜으로 저의 이름과
    미리 만들어두었던 수험 번호를 적었습니다.
    다시 진동 알람이 울리면
    시험지를 꺼내고
    컴퓨터용 사인펜으로 필적 확인 문구를 적었습니다.
    시험지 상단
    머릿속의 대학수학능력시험이라는 '그' 디나루체 문구를 떠올리며
    오늘이 그 날이라고 몇 번이고 되뇌이며
    다시 진동이 울리면
    시험지를 확 넘기면서 문제를 풀었던 기억이 있습니다.
    가채점표가 완성되니 한 30초 남았을까요
    곧 1교시 국어 영역이 종료되었습니다.
    사이 쉬는 시간이 되면
    차가워진 손으로 초콜릿바를 집어서
    바람을 새려고 잠시 나갔습니다.
    이번 시험은 잘 봐야 할 텐데....라는 생각
    다음 있을 수학에 대한 생각을 했습니다.
    순식간에 수학 시험이 지나가니
    익숙하지만 익숙하지 않은 그 기분으로
    죽을 먹었습니다.
    영어라도 잘 보자. 제발
    왜 인지 영어 시험지를 보다보면
    시야가 깜깜해지면서 잘 안 보이고 그랬습니다.
    아니 이건 지금도 그럴 겁니다.
    눈을 감았다떠면서 이거 시험이야
    정신차리자 그러면서 문제를 풀었습니다.
    다시 초콜릿바.
    벌써 마지막이구나.
    허탈해지면서 다시 심장이 뜁니다.
    과학탐구는 수학만큼 중요하니까요.
    그렇게 모의시험이 끝났습니다.
    힘이 쫙 빠지면서 그래도 모의의 특권으로
    바로 답을 확인했었습니다.
    풀서비스 이용이 가능하면 꼭 그걸로 채점했습니다.
    수능시험지를 손으로 채점할 자신이 없었으니까요.
    그래도 안 되면 차선으로 가채점표로 채점했습니다.
    문제를 보면서 채점할 자신이 없었으니까요.

    점수가 너무 낮았습니다.
    그래도 그날은 고생한 나를 위해서
    그리고 생각도 정리할 겸
    멀리 떨어진 피잣집에 가서 피자를 사왔었죠.
    결국 그날은 수능이 아니었으니까요.
    수능은 다를거라고, 굳게 믿고
    더 열심히 해야 했습니다.
    아마 그때 즈음은 정말 열심히 했던 걸로 기억합니다.

    제 인생의 마지막 수능날
    너무 긴장을 많이했는지
    고3때는 너무 긴장을 안해서 이게 수능인가 싶었는데
    그날은 국어를 마킹하는데 손이 벌벌 떨려서 조금 그어버렸습니다.
    시간이 촉박했는데 말이죠.
    시험장에서 나오면서 물리 문제 하나가 스쳐갑니다.
    틀렸다. 그거 이건데.
    기분이 어두웠습니다.
    수능은 마지막까지 날 기쁘게 하지 못했습니다.
    시험장에서 걸어 나오면서 그때의 생각이 아직도 선명합니다.
    결국 나에게 봄날은 없구나.
    그래도 의외로 국수영 채점하는데는 무덤덤했습니다.
    논술 봐야겠다. 그 생각뿐이었습니다.
    다시 역으로 가서 기차를 탔습니다.
    대기실에서 TV를 보고 있는데
    갑자기 눈물이 나올 것 같은 느낌이 드는 겁니다.
    애써 누르고 기차가 와서 기차에 탔습니다.
    앉아 있으니 다시 시험 생각이 납니다.
    그리고 또 생각했습니다.
    왜 나에게 봄날은 오지 않는걸까
    시험을 망쳐서 논술을 봐야하는구나
    생각하던 순간
    갑자기 눈물이 터졌습니다.
    기차에서 너무 크게 울었습니다.
    정말로 꺽꺽대면서 울었는데
    그때는 아무 생각도 안 났습니다.
    한참 울다가 탐구 영역 답안 공개 시간이 되었고
    정말 무덤덤하게 채점을 끝냈습니다.

    결과적으로 그때 수능은
    다른 누군가가 알면
    세상 다 살았다싶을 정도로 울어댄 저를
    한대 때려도 할 말 없을 성적이었습니다.
    그렇게 잘 본 편은 아니지만 그래도 제가 본 수능 중에는 제일 나았습니다.
    그런데도 그렇게 울었고
    지금도 시간을 되돌려준다고 가겠다고 말할 정도로
    후회가 남는 건
    그래도 나태하게 살았다는 죄책감과
    너무 많은 걸 걸어버려서 일지 모릅니다.

    그 상처가 아직도 남아서
    지금도 오르비에 글을 쓰고
    지금 댓글도 적고 있습니다.

    가느응세계님
    닉네임만 봐도 작년 국어에 남은 상처가 보입니다.
    누구나 성공할 수는 없으니 성공해야만 한다고는 못하겠지만
    저처럼 메울 수 없는 상처는 갖지 않게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너무 무리한 계획보다는 납득할 수 있는 계획으로
    꾸준히
    순간의 감정에 지배되지 말고
    꾸준히
    최대한 후회를 남길 행동은 삼가세요.
    놀지 말고 쉬지 말란 게 아니라
    후회하지 않을 정도로.

    사람은 아무도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 떠날 수 없다고
    '그 일기'에 적혀 있습니다.
    그래서 저는 너무 안타깝습니다.
    그래도 과거에 미래를 묻어서는 안 되었기 때문에
    저는 열등감으로 다시 출발했습니다.
    하지만 그때 열등감이 아니라 성취를 얻었다면
    역시 더 좋았을 것 같습니다.

  • 가느응세계 · 865439 · 19/05/13 06:30 · MS 2018

    익명에다가 아무 접점 없는 타인한테 이렇게까지 신경써주시다니.. 말주변이 없어서 어떻게 감사를 표현해야할지 모르겠습니다 ㅜㅜ.
    어제 써있는 글들을 손으로 써보면서 잤어요
    얼마 전까진 6시 30분에 일어났는데 최근 매일 8시에 일어나고.. 생각없이, 관성적으로 책장만 넘겼는데..재수 시작 계기도 그렇고 글보면서 느낀게 많았습니다.
    마음가짐을 새로했어요.
    오늘 일어났을때 그냥 다시 잘까 생각도 들었는데 이 글을 생각하니 정신이 바짝 들었습니다
    제 수험생활의 변곡점을 만들어주신 분 같습니다 정말 감사합니다!
    +)스탑워치 공부팀이 개설되었네요
    매일 참여하겠습니다 ㅎㅎ

  • 진리의사바사 · 800274 · 19/05/13 12:59 · MS 201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