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선과 위악 [728914] · MS 2017 · 쪽지

2018-11-22 16:28: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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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 올레길에서 만났던 해사한 청년을 기억하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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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연히 만난 사람이지만, 좋은 기억으로 오래 남는 이가 있다.


이름도 모르고, 지금 다시 본다 한들 얼굴조차 기억하지 못할 사람인데도...


2017년 3월. 나는 제주도 표선마을에 있었다. 해변이 무척이나 아름다운 곳이다.


당시 나는 어린 시절부터 ‘나중에 꼭 써야지’라고 생각했던 책의 마지막 교정 작업을 하던 중이었다. 머리도 식힐 겸 3월 하순 초, 올레길(둘레길)을 걸었다. 2박 3일 예정으로.


첫째 날이었나, 둘째 날이었나, 아침 일찍 길을 나서서 오후 2시쯤 되었으니 25km쯤 걸었을까? 해변가 도로를 고집하던 나는 중간에 길을 잃었다. 주변을 두리번거리던 중 해사한 청년에게 길을 물었다. 그 역시 자신도 올레길을 걷고 있는 중이라며 “같이 찾아보자”고 했다.


힐끗 보아도 너무 반듯하게 잘 생긴 청년이었다. 키도 180cm는 돼 보였고... 


우리는 도반(道伴)이 됐고, 이런 저런 이야기를 했다.


서강대 전자공학과 재학생이었다. 


“아, 그러세요? 정말로 공부 잘하셨구나. 제가 어릴 적 옆집에 살던 형도 서강대 전자공학과를 졸업했는데. 동네에서 수재로 소문난 분이었지요. 아 참, 입시계에서 물량공급님이라고 아주 유명한 분이 있는데, 그 분도 서강대 전자공학과생으로 아는데요. 아시나요?”


“아, 예, 이름을 알고는 있습니다. 워낙 유명하신 분이어서...”


도보 여행을 홀로 해 보면 안다. 처음 보는 이와 길동무를 하더라도 서로를 쉽게 털어 놓는다는 것을. 여행이 주는 자유로움 때문인지, 혼자 길을 걷는 외로움 때문인지는 알 수 없으되.


반수를 성공하지 못했다고 했다, 17학년도 수능에서... 서울대를 가고 싶었다고, 그래서 과탐 2를 쳤는데, 그리고 국어와 수학 성적은 100점이었는데(국영수 세 과목이 100점이라고 했는지, 아니면 그 중 2 과목이 100점이라고 했는지는 기억나지 않는다.) 과탐이 말도 안 되는 성적으로 나왔다고 했다. 


청년은 분명 과탐 과목과 점수까지 말했지만 내 머리가 나쁜 탓에 이제는 기억을 못하겠다. 다만 물리 1과 화학 2를 쳤다고 했던 것 같고, 그 중 화학 2는 30점 중반대가 나왔다고 말했던 것으로 기억한다.


“에이... 왜 굳이 형극의 길로 가셨나요? 과탐 2가 공부량이나 모집단의 수준에서 과탐 1과는 너무도 차원이 다른데... 그냥 과탐 1을 해서 의대를 지망하시지... 한데, 탐구 반영 비율이 낮은 의대를 갈 수도 있었던 것 아닌가요?”


“아뇨, 서울대 공대를 가고 싶었습니다. 그리고 그런 어려운 과목을 잘 이겨낸 사람들에게 저는 존중을 보냅니다. 제가 부족한 탓이지요.”(당시 그는 분명 지망학과까지 이야기했을 것이다. 그조차 기억 못하는 내 머리란...)


의대를 지망했어야 한다는 말을 너무도 쉽게 내뱉는 나 자신이 실망스럽지만, 어쩌랴. 세상이 그런데... 내 주변 친구들의 50대 중반 현재 모습을 보면서 굳어진 경험칙인 것을...


“더 이상 미련은 없으세요?”


“예, 이제 군대 가려고요. 곧 입대합니다.”


3월말인가 입대를 앞두고 홀로 걷고 싶어서 제주도를 찾았다고 했다. 군 입대 전 마지막 여행이라면서.


그와 두 시간 이상 함께 같이 걸었던 듯하다. 


오후 2시쯤부터 함께 걸었으니까...


해군기지 건설 문제로 말이 많았던 강정포구까지 함께 걸었던 것은 확실하다. 


“서강대 전자공학과도 정말로 명문대학 명문학과입니다. 서울대, 물론 좋은 대학이지만, 나중에 사회생활 하시면 큰 차이가 없을 수도 있어요. 대학 졸업 이후의 노력에 따라 또 달라지는 것이니까... 다만 사회생활을 하게 되면 반드시 기억하실 게 있습니다. 싸움에서, 펀치만큼 중요한 게 맷집입니다. 능력도 물론 중요하지만, 참는 것, 참을 줄 아는 것도 무척 중요합니다. 특히 상사와의 관계에서...”


한데, 그런 말을 할 자격이 나에게 있던가? 나는 상사와의 관계에서 잘 참는 편이었나? 피식, 쓴웃음만 나왔다. 누가 누구에게 조언하는가?


너무도 바르게 잘 자란, 잘 생긴 청년,


그와 오후 5시쯤 헤어진 것 같다. 


“여행 잘 하시고, 군 생활도 건강히 마치세요.”

“고맙습니다. 여행 잘 마치십시오.”


생각해 보면, 국밥에 소주라도 함께 나누면서 이야기를 했다면 좋았을 터인데...


3월 말에 입대한다고 했으니, 이제 제대가 얼마 남지 않았을 것이다. 아마 내년 3월에 복학을 하겠지?


그 청년도 제주도 올레길에서 만났던 50대 중반 사내를 때로 기억할까? 자신의 이력을 짧게 이야기하면서 책을 쓰고 있다고 말했던 이를...


왜 그 청년에 대한 기억이랄까 인상이 이리도 강렬한 것인지... 


미소년을 좋아하는 내 스타일 때문인가.(아, 오해는 마시라, 나는 동성애자나 양성애자가 아니다. 그럼에도 미 자체는 사랑한다.)


아니면 이루고 싶었던 것을 아쉽게 이루지 못한 청춘에게서 느껴지는 아쉬움에 대한 공감인가.


이번 겨울, 다시금 제주도 올레길을 찾을 생각이다.


***혹여 이 못난 글이 그 청년에게 조금이라도 누가 된다면, 바로 지울 생각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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