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장문지르는놈싹다죽이는독해귀신 [509724] · MS 2014 (수정됨) · 쪽지

2018-09-06 14:51:06
조회수 2,578

내가 고전소설, 고전시 공부 안 해도 되는 이유.

게시글 주소: https://orbi.kr/00018336021


원래 문장 읽을 때 꼼꼼하게 읽는 것을 강조하는 나이지만,

고전소설과 고전시 만큼은 그냥 날려서 읽음.

근데 오해하지 말 것은, 이해하지 않고 날려 읽는다는 게 아니고,

대충 읽어도 다 이해가 됨.

진성 역덕후라 중학교 때부터 역사에 관심가지고 실록 같은거 뒤져봄.

그냥 고어에 익숙해지더라.

그리고 국어 비문학 독해력도 많이 늘었음. ㅋㅋ

한때 한국사(서울대 필수 시절), 동아시아사 만점이었음.

질문 안 받는다.


세조실록 34권, 세조 10년 8월 1일 임오 2번째기사                             1464년 명 천순(天順) 8년                                                                                                                                                                                       

양성지가 군법·군정·군액·군제·사역에 관한 일로 상서하다


동지중추원사(同知中樞院事) 양성지(梁誠之)가 상서(上書)하였다.

"신(臣)이 그윽이 우리 나라의 역대(歷代)의 일을 보건대, 수(隋)나라와 당(唐)나라는 고구려(高句麗)에 크게 패(敗)하였고, 사구(沙寇)도 또한 고려(高麗)에 패(敗)하였습니다. 강감찬(姜邯贊)이 거란(契丹)의 30만 병(兵)을 막을 때 한 필의 말도 돌아가지 못하였고, 윤관(尹瓘)이 여진(女眞)을 몰아낼 때 천리의 땅을 개척하고 구성(九城)405)  을 쌓았으니, 그러한 사실이 역사에 실려 있어서 훤하게 상고할 수가 있습니다. 방금 성주(聖主)께서 즉위(卽位)하시고 상신(相臣)들이 국책(國策)을 수립하니, 진법(陣法)을 연습하고 활쏘기를 관람하고 강무(講武)하고 장수(將帥)에게 유시(諭示)하는 등 하루라도 무비(武備)를 닦지 않은 날이 없으며, 《병요(兵要)》·《병서(兵書)》·《진법(陣法)》·《병정(兵政)》으로 병사(兵事)를 알지 못하는 자가 한 사람도 없습니다. 만리의 큰 나라에서 조그마한 좀도둑도 어거하는데, 변장(邊將)이 군사를 쓰는 것이 매우 여의(如意)하지 못하므로, 신(臣)이 항상 분격(憤激)하여 고금(古今)에 용병(用兵)하던 방도를 두루 참고하여, 감히 군법(軍法)을 엄하게 하고, 군호(軍戶)를 구휼(救恤)하고, 군정(軍情)을 보살피고, 군액(軍額)을 실(實)하게 하고, 군령(軍令)을 간략하게 하는 5가지 일을 가지고 먼저 우선으로 삼아, 이로써 군제(軍制)를 정(定)하고, 군기(軍器)를 정비하고, 군문(軍門)을 갖추고, 군정(軍丁)을 보호하고, 군사를 사열(査閱)하는 등 그 차례를 만들어 우러러 예람(睿覽)을 바라니, 성상께서 보아 주시리라고 삼가 생각합니다."

"1. 군법(軍法)을 엄하게 하는 일. 대개 살아 있는 것은 다같이 바라는 것이나 죽는 것은 다같이 싫어하는 것입니다. 만약 나아가면 죽고 물러가면 산다면 누가 즐겨 물러가서 살지 않겠습니까? 다만 물러가면 반드시 죽고 욕되며, 나아가면 혹시 살 수도 있고 비록 죽을지라도 또한 영광인 다음이라야 사람들의 죽을 힘을 얻어내어 사람을 죽지 않을 땅으로 이끌 수가 있는 것입니다. 옛날에 양소(楊素)가 먼저 수백 명을 목베어서 위엄을 세웠고, 곽자의(郭子儀)도 또한 조카[甥]로써 그 위엄을 세우려고 하였으니, 양소가 수백 명을 아끼지 않은 것도 아니었으나, 만약 죽이지 않았다면 10만의 대중이 죽었을 것이요, 곽자의가 조카를 사랑하지 않았던 것이 아니었으나, 만약 조카 한사람을 사랑하였더라면 가국(家國)의 일이 패(敗)하였을 것입니다. 유유(劉裕)가 위(魏)나라 군사를 막을 때 긴 창[矟]을 두어 자 끊어서 쇠망치로써 후려쳐 문득 3,4인을 통관(洞貫)시켰고, 한세충(韓世忠)이 금(金)나라 사람을 막을 때 갑사로 하여금 긴 도끼[長斧]로써 위로 사람의 가슴을 치고 아래로 말의 발을 찢게 하였습니다. 이것은 바로 사람들로 하여금 한걸음을 나가게 하면 한 걸음을 나가고 한 걸음 물러가게 하면 한 걸음을 물러가는 등 한결같이 장수의 명을 듣고 죽음에 이르기로 마음을 먹은 자들이었습니다.

근일에 부령(富寧)의 주장(主將)을 구원하지 않은 것과 의주(義州)의 원병(援兵)이 나아가지 않은 것과 임득정(林得楨)의 군사가 밤에 놀란 것과 영호송군(迎護送軍)이 스스로 궤멸(潰滅)한 것이 어찌 나아가면 죽고 물러가면 산다고 마음을 먹은 것이 아니겠습니까? 그러나 나아가면 혹은 살지만, 물러가면 죽은 경우가 도리어 많았습니다. 지금의 계책으로서는 모름지기 이와 같은 풍습을 크게 고친 다음이라야 우리 사졸(士卒)의 기운을 길러서 적인(敵人)의 기운을 점점 빼앗을 수가 있으므로 싸움을 말할 수가 있을 것입니다. 금후로는 싸우다가 물러가는 자와, 주장(主將)을 구(救)하지 않는 자는 모두 군법(軍法)에 의하여 시행하면 위엄이 이웃의 적(敵)들에까지 미쳐 변방(邊防)이 다사(多事)한 지경에 이르지는 않을 것입니다.

1. 군호(軍戶)를 구휼(救恤)하는 일. 대개 내지(內地)에 사는 백성들은 변방(邊方)의 경호(警護)를 알지 못하니 문반(文班)의 자제(子弟)를 어찌 군무(軍務)를 알 수 있겠습니까? 이른바 변민(邊民)과 무사(武士)는 평상시에는 갑옷을 입고 병기(兵器)를 잡고서 부지런히 숙위(宿衛)를 하고, 위급한 일이 있으면 봉인(鋒刃)을 친히 무릅쓰고 몸을 나라에 바치는데, 만일 위태한 것을 보고 생명을 바치는 자가 있다면 그의 애긍(哀矜)함을 이루 말할 수가 없을 것입니다. 신(臣)이 듣건대, 수(隋)나라 때에 푸른 옷을 입고 전상(殿上)에 섰던 자들은 전쟁에서 죽은 자의 아들이었다고 합니다. 또 신라(新羅)의 풍속에 전쟁(戰爭)이 한창이면 한 사람이 적진(敵陣)으로 돌연히 뛰어 들어가서 참살(斬殺)당하여 사기(士氣)를 북돋우고, 이로써 승리(勝利)를 얻었다고 하니, 이는 다름이 아니라 신라 사람들이 싸우다 죽은 집을 우대하는데, 높은 벼슬을 추증(追贈)하고 그 부모와 처자를 종신토록 국가에서 늠양(澟養)하였던 것입니다. 근일에 국사(國事)에 죽은 사람은 오직 진선(盡善)한 사람이 아니면 별로 특별한 은전(恩典)이 없으며, 그 으레 주는 부의(賻儀)의 쌀도 또한 사람에 청촉(請囑)하여 근근히 어렵게 받을 수가 있습니다. 이와 같아서야 어찌 사졸(士卒)들의 백인(白刃)을 무릅쓰는 마음을 기르겠습니까? 빌건대 특히 성려(聖慮)를 두시어 후(厚)하게 그 집을 구휼(救恤)하시어, 벼슬을 내려 주고 자손을 음서(蔭敍)하여 그 애영(哀榮)을 극진하게 하소서.

1. 군정(軍情)을 보살피는 일. 신(臣)이 평일에 《삼국사기(三國史記)》를 보니, ‘우리 나라 사람들이 중국인[漢人]과 싸우면 열 번 싸울 때 일곱 번 이기고, 왜인(倭人)과 싸우면 열 번 싸울 때 세 번 이기고, 야인과 더불어 싸우면, 열 번 싸울때 다섯 번 이긴다.’고 하였습니다. 야인(野人)들이 호시(弧矢)의 이기(利器)가 있지만 또한 우리 나라의 장기(長技)인 것입니다. 근일에 양계(兩界)의 변장(邊將)들이 싸움에서 불리한 경우가 많은데, 이것은 저들이 강하여서 그러한 것도 아니며, 또한 저들의 힘이 커서 그러한 것도 아닙니다. 삼군(三軍)의 일은 용기(勇氣)를 주로하는데, 처음에 회령(會寧)에서 싸우던 때에 전사(戰士)들이 힘을 쓰지 아니하여 능히 큰 승리를 얻지 못하였습니다. 이로부터 사기(士氣)가 날마다 떨어지고 저들의 기운은 날마다 장대하여져 갑산(甲山)과 의주(義州)의 싸움서 순치(馴致)406)  하였으니, 이것이 한탄할 만한 일입니다. 이러한 폐단을 구(救)하려 한다면 군법(軍法)을 엄중하게 하는 것보다 나은 것이 없습니다. 그러나, 바야흐로 싸울 때에 군법을 엄중하게 하여 사졸들의 사력(死力)을 얻고, 이미 싸운 뒤에 국사(國事)에 죽은 신하(臣下)들을 구휼(救恤)하여, 후일의 사졸들의 마음을 거두는 것이 좋겠습니다.

1. 군액(軍額)을 실(實)하게 하는 일. 대개 군사(軍士)는 정(精)한 것을 귀하게 여기므로, 그 숫자가 많음에 있지 않습니다. 이제 국가에서 추쇄(推刷)한 군호(軍戶)는, 충청도(忠淸道)에서는 본래 2만 호(戶)인데 지금 11만 호(戶)가 되었고, 경상도(慶尙道)에서는 본래 4만 호(戶)인데 지금 30만 호(戶)가 되었으니, 두 도(道)를 가지고 미루어 보면, 다른 도(道)도 모두 그러할 것입니다. 그러나 군액(軍額)을 나누어 정(定)할 때에 간리(姦吏)가 장실(壯實)한 자로써 봉족(奉足)을 삼고, 약(弱)한 자로써 호수(戶首)407)  를 삼으며, 장실한 자를 병자(病者)로 삼고 병자를 장실한 자로 삼으며, 말[馬]이 없는 자를 기병(騎兵)으로 삼고, 말[馬]이 있는 자를 보병(步兵)으로 삼으니, 가령 1호(戶)인 경우에도 다른 사람을 가지고 봉족(奉足)으로 삼거나, 자기 자손들을 다른 사람의 봉족으로 삼으며, 혹은 서촌(西村) 사람을 가지고 동촌(東村) 사람의 봉족(奉足)으로 삼거나, 동촌(東村) 사람을 가지고 서촌(西村) 사람의 봉족(奉足)을 삼습니다. 이와 같이 법을 희롱하는 것이 모든 도(道)가 다 그러합니다. 호구(戶口)의 수(數)는 비록 옛날에 비하여 배(培)가 되나, 정(精)하고 강(强)함은 옛날에 미치지 못할 것 같으며, 평안도(平安道)의 병(兵)은 더욱 미약합니다. 대저 인정(人情)이 부실(富實)하면 기운도 따라 성(盛)하여져서, 용감한 것을 가르칠 수가 있는 것이며, 그로 하여금 생사(生死)를 바치게 할 수가 있는 것이지만, 그 빈약한 사졸(士卒)은 위협(威脅)당하게 되면 더욱 약하여지고, 상(賞)을 주더라도 유익함이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이러한 폐단을 구(救)하여 약한 것을 고쳐서 강하게 하고자 하려면, 그 계책은 윤탁(尹鐸)408)  이 그의 호수(戶數)를 덜고 주(周)나라의 세종(世宗)이 모든 군사를 크게 간략하게 한 것과 같은 데에 지나지 않을 따름입니다. 그러므로, 약(弱)한 자 10만 명을 합하여 5만 명으로 만들면 쓸 수 있을 것이나, 옛날과 같이 10만 명으로 하면 쓸 수 없을 것입니다. 금후로는 노비(奴婢)가 있는 인사(人士)를 제외하고는, 15세 이상부터 60세 이하까지 3정(丁)으로써 1호(戶)를 삼으며, 기병(騎兵)에서는 군사(軍士)·갑사·별시위(別侍衛) 같은 것은 3호(戶)를 1병(兵)으로 삼고, 평로위(平虜衛)·정병(正兵)·진군(鎭軍) 같은 것은 2호(戶)를 1병(兵)으로 삼고, 보병(步兵)에서는 선군(船軍) 같은 것도 또한 2호(戶)를 1병(兵)으로 삼으며, 기타 나머지의 연호(煙戶)·잡색(雜色)은 1호(戶)를 1병(兵)으로 삼되, 약(弱)한 사람으로써 정(丁)을 삼지 말며, 그 자손들은 분속(分屬)시키지 말며, 인보(隣保)는 나누지 말며, 질병(疾病)은 계산하지 말면, 비록 군사의 숫자는 감하여진 것 같으나 모두 정병(精兵)이 될 것입니다.

호적(戶籍)에는 이미 누락한 정(丁)이 없으니, 유사시(有事時)에는 모두 뽑아서 병정을 만들 수가 있을 것이며, 번갈아 휴식할 수도 있을 것이며, 사고가 나면 그 곳을 보충할 것이며, 또 그의 치중(輜重)을 맡을 수도 있을 것입니다. 이로써 산성(山城)을 지키며, 이로써 곡식을 전수(轉輸)를 한다면 불가(不可)할 것이 없을 것이니, 그 군사를 후(厚)하게 하는 이익이 어떠하겠습니까?

신(臣)이 일찍이 1정(丁)도 국민으로써 누적(漏籍)됨이 없게 하고, 1정(丁)도 단정(單丁)으로써 입역(立役)하는 일이 없게 하고자 한 것은 이러한 뜻이기 때문입니다. 대개 군사를 쓸 때는 기병(騎兵)을 중하게 여기나, 지금의 기병은 노둔(駑鈍)한 말[馬]이 많아 만일에 강역(疆域)의 사변이 있으면 비록 2, 3일 사이라 할지라도 말들이 잇달아 넘어져서 능히 전군(全軍)이 적진(敵陣)에 나가지 못할 것입니다. 그 피곤한 기마(騎馬)를 거느리다가 적인(敵人)들에게 사로잡혀 타는 것보다는 어찌 장사를 뽑아 보졸(步卒)을 만들어 원습(原隰)409)  한 곳에 출입하면서 걸핏하면 문득 공(功)을 세우는 것이 더욱 낫지 아니하겠습니까? 이제 만약 중외(中外)의 기병(騎兵)과 보병(步兵)을 모두 그 재주를 시험하고 인하여 그 군액(軍額)을 정한 다음, 반복하여 고열(考閱)하되, 그 재주와 힘이 있는 자는 호수(戶首)로 삼고, 자산(資産)이 있는 자는 봉족(奉足)을 삼아서, 덜도 또 덜어서 그의 장실(壯實)한 자와 허약(虛弱)한 자가 서로 구제하게 하며, 빈자(貧者)와 부자(富者)가 서로 이바지하게 하소서. 이와 같이 한다면 가히 정병으로써 건장한 말[馬]을 타고 한 사람이 1백 명을 당하고, 그 향하는 곳에 앞에 설 사람이 없게 되면, 평상시에는 정병(精兵) 10만으로써 적(敵)을 위협(威脅)할 것이요, 나라에 사변이 있으면, 백 만의 대중(大衆)이 모두 때에 따라 준비될 것입니다.

1. 군령(軍令)을 간략(簡略)하게 하는 일. 대개 5위(五衛)에서 결진(結陣)하면 눈으로 다 볼 수가 없기 때문에 그 휘(麾)를 설치하여서 지휘하는 것이고, 1만 명이 줄[列]을 이루면 귀로 능히 들을 수가 없기 때문에 징[錚]과 북[鼓]을 설치하여서 진퇴(進退)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 나라의 풍속(風俗)에 보고 듣는 것이 온전치 못하고 명령을 듣는 것이 한결같지 않아서 습진(習陣)하는 날에 대장(大將)이 위장(衛將)을 구(求)하고, 위장이 부장(部將)을 구하고 부장이 두루 통장(統將)과 여대(旅隊)의 사이에 이르러 직접 명(命)하여 왼쪽에 두었다가 다시 오른 쪽으로 옮기고, 앞에 두었다가 다시 뒤로 나오는 등, 두세 차례 설명하여도 오히려 능히 통일을 하지 못합니다. 엎드려 빌건대 금후로는 대장(大將)이 기고(旗鼓)를 어소(御所)에 간각하였다가 습진(習陣)하는 날이 되거든 장패(將牌)410)  와 아울러 주시면, 이때에 대장(大將)이 받아서 순청(巡廳)의 남쪽에 이르러 곧 기고(旗鼓)를 세우고, 위장(衛將)이 기(旗)를 진무소(鎭撫所)에서 받아 대장(大將)을 구하고, 부장(部將)이 기(旗)를 병조(兵曹)에서 받아 위장(衛將)을 구하면 이때에 대장(大將)이 기고(旗鼓)를 눕히고 먼저 가고 위장(衛將)과 부장(部將)이 또한 차례차례로 가는데 문(門) 밖에 이르러 기고(旗鼓)를 다시 세우고, 결진(結陣)하면 이때에 5위(五衛)의 군사들의 귀와 눈이 모두 기고(旗鼓)에 주목하여 비록 초계(哨戒)하는 집 비둘기를 매달더라도 보지 않을 것이요, 비록 바람 소리와 학(鶴)의 울음이라도 듣지 않을 것이니, 그들로 하여금 엷은 얼음을 밟고서 호타하(滹沱河)411)  를 건너 가게 하여도 또한 건너갈 것이며, 그들로 하여금 눈 오는 밤에 채주(蔡州)에 들어가게 하여도 또한 들어갈 것입니다. 옛사람이 이르기를, ‘10년 동안 생취(生聚)412)  하고 10년 동안 교열(敎閱)한다.’고 하였으니, 이제 교열(敎閱)한 지 이미 10년이 되었습니다. 만약 군령(軍令)을 범(犯)하는 경우에는 대장(大將)이 위장(衛將)을 죄(罪)주고, 위장이 부장(部將)을 죄주고, 부장(部將)이 통장(統長)을 죄주되, 한결같이 병정(兵政)에 의하여 시행하고, 혹시라도 너그러이 용서하여 주는 일이 없게 한 다음에라야 옛 습관을 변화시켜 군병(軍兵)을 행(行)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행군(行軍)하여 적진(敵陣)에 나아갈 때, 모름지기 장수(將帥)와 사졸(士卒)로 하여금 서로 마음을 알도록 해야 할 것이니, 사졸(士卒)의 용맹(勇猛)과 겁약(怯弱)을 장수가 알지 못함이 없고, 장수의 호령(號令)을 사졸이 알지 못함이 없은 다음이라야, 이에 정예(精銳)를 가려 이에 심복(心腹)을 펼 수 있고, 이에 은혜와 위엄(威嚴)을 보여 이에 상벌(賞罰)을 행할 수 있으며, 이에 더불어 물·불의 사지(死地)에 다니면서 생사(生死)를 함께 할 것입니다. 지금 장수(將帥)가 된 자는 혹 임시(臨時)하여 가고, 경계 상(上)에 이르러 아무 고을 군사를 아무 장군에게 붙이고, 아무 장군으로써 아무 군사를 통솔(統率)하게 하니, 참으로 이른바 ‘본래 사대부(士大夫)를 어루만져 위로하는 것이 아니라’고 하지만, 어찌 바야흐로 당금(當今)의 마땅히 강구(講究)할 바가 아니겠습니까?

1. 군제(軍制)를 정(定)하는 일. 병위(兵衛)의 일을 임명할 때 모름지기 피차(彼此)가 서로 이바지하여 혹은 서로 견제한 다음이라야 옳은 것인데, 지금 내금위(內禁衛)와 겸사복(兼司僕)이 대개 서로 같아서 서로 유지(維持)할 수가 있으니, 엎드려 빌건대 겸사복(兼司僕)은 50명으로 정하고, 또 내금위(內禁衛) 3백 명 가운데 50명을 가려서 군기(軍器)를 겸(兼)하게 하여 그대로 군기(軍器)의 책임을 행하게 하여, 그들로써 본감(本監)의 구사(丘史)를 적당히 거느리게 하소서. 내금위(內禁衛)는 전소(前所)에 입직(入直)하고 겸사복(兼司僕)은 경회루(慶會樓)의 근처에 입직(入直)하여, 이와 같이 내금위(內禁衛)는 대내(大內)의 동남쪽 모서리에서 숙직하고, 겸사복(兼司僕)은 대내(大內)의 서북쪽 모서리에서 숙직(宿直)하니, 동쪽과 서쪽이 서로 연관(聯關)되어 안팎에 겸하여 정비되고 완급(緩急)할 때 의지(依支)할 수 있는 것이니, 실로 만세(萬世)를 위한 염려인 것입니다. 또 본조(本朝)의 군사 가운데 친병(親兵)은 내금위(內禁衛)·겸사복(兼司僕)이라 하고, 위병(衛兵)은 갑사·별시위(別侍衛)라 하고 훈위(勳位)는 충의위(忠義衛)·충찬위(忠贊衛)라고 하고, 숙위(宿衛)는 봉충위(奉忠衛)·공신위(拱辰衛)라고 하고 번상군(番上軍)은 정병(正兵)·평로위(平虜衛)라 하고, 보병(步兵)은 파적위(破敵衛)라 하고, 역군(役軍)은 방패(防牌)라 하고, 사령군(使令軍)은 섭육십(攝六十)이라 하고, 공학군(控鶴軍)은 근장(近仗)이라고 하고, 노군(奴軍)은 장용대(壯勇隊)라 하고, 군기감(軍器監)은 별군(別軍)이라 하고, 의금부(義禁府)는 도부외(都府外)413)   라 하고, 진수군(鎭守軍)은 진군(鎭軍)·선군(船軍)·수성군(守城軍)이라 하는데, 이것이 안팎의 기병(騎兵)·보병(步兵)의 액수(額數)입니다. 대저 입법(立法)은 비록 능히 만세(萬世)에까지 전(傳)할 수 없으나, 모름지기 10년 동안 유지하고 지키기를 기약해야 할 것입니다. 지금 군사(軍士)의 정액(定額)과 분번(分番)·번상(番上)의 달 수가 1년에 여러차례 바꾸어져, 따를 바를 알지 못하니 옳지 못한 듯합니다. 또 변진(邊鎭)의 방수(防戍)에는 토병(土兵)이 중대한데 지금 양계(兩界)의 갑사가 4천 2백 46명이 11번(番)을 나누었으나, 엎드려 빌건대 7백 54명을 더 정(定)하여 5천 명을 만들어 10번으로 나누고, 그의 녹과(祿科)는 보병의 월봉(月俸)을 옮겨 미루어 주며, 또 정병(正兵)은 오로지 기사(騎士)를 쓰고, 보졸(步卒)은 선군(船軍)에 옮겨 붙이되, 그 서울[京]의 정병(正兵)은 기타 나머지 군사로서 서울 밖[京外]이라는 명칭이 별로 없으니, 이른바 서울의 정병(正兵)이란 것도 또한 혁파(革罷)하여 갑사·방패(防牌)에 나누어 붙이며, 또 봉충위(奉忠衛) 29통(統)도 또한 공신위(拱辰衛)의 수(數)에 의하여 1통(統)을 더하여 30통(統)으로 만들며, 또 별군(別軍)은 7번으로 나누면 1번이 1백 명의 수에 차지 못하니, 엎드려 빌건대 매번(每番)을 1백 명으로 정하여 8번으로 나누며 기선군(騎船軍)과 진군(鎭軍)·수성군(守城軍)에 이르러서도 또한 모두 액수를 정하여 군려(軍旅)를 정비하소서.

신이 듣건대, 천보(天寶)414)   말년에 시정배(市井輩)의 자제(子弟)가 이름을 병사(兵士)의 대오(隊伍)에 올려 두고 남을 고용하여 대신 세웠는데, 위태할 때 임하여 병사(兵士)를 주니, 병사가 모두 백도(白徒)415)  였으므로 송(宋)나라 때 얼굴에 묵자(墨刺)416)  를 한 것이 진실로 이 때문이었다고 합니다. 지금 방패(防牌) 60명이 대개 대신 세운 사람이 많으니, 봉록(俸祿)을 주는 것이 심히 마땅치 않습니다. 빌건대 금후로는 같이 사는 아들·사위의 봉족(奉足)이외에 그 역(役)을 대신하는 자와, 남의 역(役)을 대신하는 자는 실정을 아는 관리와 함께 모두 군법(軍法)으로써 시행(施行)하소서.

1. 군기(軍器)를 정비(整備)하는 일. 신(臣)이 연경(燕京)에 이르니, 한 사람이 이르기를, ‘귀국(貴國)에서 야인(野人)들을 많이 죽인 것은 진실로 통쾌한 일인데, 귀국(貴國)에서는 편전(片箭)의 예리(銳利)함이 있으니, 야인(野人)들이 어찌 감히 귀국(貴國)과 대적(對敵)하겠는가?’고 하였고, 한 사람은 이르기를 ‘소전(小箭)은 중국에서도 또한 비로소 사용한다.’고 하였는데, 이와 같이 말하는 자가 한둘이 아니었습니다. 편전(片箭)은 진실로 우리 나라의 장기(長技)이니, 뜻을 두어 강습(講習)하지 아니할 수가 없습니다. 빌건대 남도(南道)의 삼포(三浦)와 북방 연변(沿邊)의 주진(州鎭) 이외에는 편전(片箭)을 쏘는 것을 더욱더 연습하여 군진(軍鎭)을 이롭게 하소서. 화포(火砲)의 제도는 신라 때부터 시작하여 고려 때에 이르러 갖추어졌고 본조(本朝)에 이르러 그 진가(眞價)를 다하게 되었으니, 가위(可謂) 군국(軍國)의 이기(利器)라 할 수 있을 것입니다. 경인년417)  에 진포(鎭浦)의 싸움과 계축년418)  에 북벌(北伐)을 할 때에 크게 그 활용(活用)을 보게 되었는데, 어찌하여 근년에는 화포(火砲)를 가지고 적병(敵兵)을 제압한 일이 없었으니, 진실로 한탄스러운 것입니다. 빌건대 금후로는 특히 감련관(監鍊官)을 보내어 항상 교습(敎習)을 더하여서 적인(敵人)들을 위협하게 하소서. 또 공격(攻擊)하고 수비(守備)하는 도구는 임시에 만드는 것이 옳지 못합니다. 우리 나라는 수성(守城)을 잘한다고 이름 났는데 수(隋)나라와 당(唐)나라가 천하의 힘을 모아서 공격하였으나 능히 이기지 못하였습니다. 고려 현종(顯宗)이 24반(般)의 병기(兵器)를 변성(邊城)에 설치하였기 때문에 몽고(蒙古)의 군사가 내침(來侵)할 때에 이르러서 방어(防禦)하여 조금 늦출 수가 있었습니다. 수성(守城)의 도구는 세상에 전(傳)하는 바가 없고 공성(攻城)의 일은 또 전혀 들은 바가 없습니다. 신(臣)이 전일에 춘추관(春秋館)에서 ‘《성제 공수도(聖制攻守圖)》’를 보고 얻어서 바치었는데, 이것은 진실로 군국의 중한 보배입니다. 빌건대 한두 신료(臣僚)에게 명하여 오로지 강구(講究)하도록 맡기시고 그 알 수 없는 것은 중국에 들어가서 찾아 묻는 일을 번거롭게 여기지 마소서. 신(臣)이 봉명 사신(奉命使臣)으로 갔을 때 또 다시 노시(弩矢)의 제도를 사람에게 물었더니, 대답하기를, ‘노시는 이제 많이 사용하지 아니하고 다만 연대(煙臺) 위에 두었다가 혹 호랑이를 잡는 데 쓴다.’ 하고 이어서 장설(張說)하는 법을 대략 말하였습니다. 금후에 공격·수비하는 기계(機械)는 중국에 입조(入朝)하는 사람으로 하여금 유의(留意)하여 듣고 보게 하여서 만세(萬世)에 대비(對備)하게 하소서. 또 야인(野人)은 매양 기병(騎兵)을 매복(埋伏)하였다가 바야흐로 싸울 때 크게 부르짖으면서 충돌(衝突)하는데, 이때에 진(陣)이 이 때문에 요동(搖動)합니다. 신(臣)이 오인(吳璘)의 첩진법(疊陣法)을 보니, 매양 싸울 때 장창(長槍)을 앞에 두었으며 우리 태조(太祖)께서 왜구(倭寇)를 칠 때에도 또한 장창(長槍)으로 결진(結陣)하였으니, 빌건대 지금 진(陣)을 설치할 때 팽배(彭湃)를 앞에 두게 하고 다음에 장창(長槍)을 두고 다음에 총통(銃筩)을 두어서 적(賊)으로 하여금 말을 달려 충돌(衝突)할 수 없게 하소서.

1. 군문(軍門)을 방비(防備)하는 일. 적유령(狄踰嶺) 이북 3백 리 사이에는 높은 산과 큰 내가 있고 토지가 비옥(肥沃)한데, 의논하는 자들이 혹은 말하기를, ‘가볍게 버릴 수가 없다.’고 합니다. 그러나 지키고자 한다면 그 형세가 심히 고단(孤單)하니 적병(賊兵)이 한편으로는 바로 만포(滿浦)에 충돌하여 이 곳에 미칩(糜縶)419)  하고, 한편으로는 죽전현(竹田峴)으로 들어오거나, 혹은 허공교(虛空橋)로부터 들어와서 빨리 강계(江界)를 포위하면, 큰 고개[大嶺] 이북은 봉화(烽火)가 연속(連續)되지 않고 성원(聲援)이 또 끊어져 매우 위태한 길이 될 것입니다. 모름지기 입석(立石) 등지에 하나의 진(鎭)을 특별히 설치하고 성자(城子)를 견고하게 쌓아서 토병(土兵)으로써 숙위(宿衛)를 시킨 다음이라야 큰 고개[大嶺]의 길을 통(通)할 수 있어서 강계(江界)가 위태한 지경에 이르지 않을 것입니다. 신(臣)이 보건대, 의주(義州)는 우리 나라의 서문(西門)이고, 중국 사람을 접대(接待)할 때 처음 대하는 곳입니다. 성이 산의 등성마루에 걸쳐 있고, 띠집[茅屋]이 많지 않아 손바닥을 가리키는 듯하여 지극히 미편(未便)합니다. 빌건대 압록강(鴨綠江)의 동쪽 언덕에다가 긴 제방(堤防)을 높이 쌓고 버드나무를 두루 심어서 성터를 가려 그 형세(形勢)를 장엄하게 하소서.

1. 군정(軍丁)을 보호하는 일. 신(臣)이 그윽이 생각하건대, 평안도(平安道)가 지경(地境)이 요동(遼東)과 심양(瀋陽)에 맞닿았으니, 무수(撫綬)하는 방법을 염려하지 아니할 수가 없습니다. 고려 때에 해마다 한 차례씩 순수(巡狩)하고, 인하여 조세(租稅)를 내려 주고 작(爵)을 내려 주고 시설을 내려 주어 은혜와 위엄을 베풀었고, 매양 회시(會試)를 과(科)할 때마다 으레 본도(本道)의 향시(鄕試)의 한 사람을 취(取)하였으니, 진실로 그 뜻이 있었던 것입니다. 지금 강가에서 방수(防戍)하는 노고는 다시 논(論)할 필요가 없으나, 북경(北京)으로 가는 사신(使臣)들이 앞뒤에 서로 잇달으므로 으레 마른 양식[乾糧]을 내려 주는 외에도 노상(路上)에서 사사로이 주는 것이 혹은 수십 석(石)에 이르고, 음식물(飮食物)도 갑절이나 되는데, 이것은 귀신이 운수(運輸)하는 물건이 아닙니다. 모두 영호송군(迎護送軍)과 기재지(騎載持)420)  의 말[馬]이 이와 같이 받으니, 한 사람이 한 해에 혹은 두서너 차례를 가는데, 여름철 비와 겨울철 눈에 두축(頭畜)이 죽고 재상(宰相)의 말 뼈가 길에 잇달아 버려지고, 혹은 중[僧]이 아버지와 형을 대신하여 가는 자가 있습니다. 이 때문에 파산(破産)하며, 이 때문에 요동(遼東)으로 도망하여 들어가는데 대개 그 숫자가 몇 천만 명이 되는지 알지 못합니다. 신(臣)이 《요동지(遼東志)》를 보건대, 동녕위(東寧衛)에 소속된 고려(高麗) 사람이 홍무(洪武)의 연간(年間)에 3만여 명이 되었으며, 영락(永樂)의 세대에 이르러서 만산군(漫散軍)이 또한 4만여 명이 되었습니다. 지금 요동(遼東)의 호구(戶口)에서 고려 사람이 10분의 3이 살고 있어 서쪽 지방 요양(遼陽)으로부터 동쪽 지방 개주(開州)에 이르기까지 남쪽 지방 해주(海州)·개주(蓋州)의 여러 고을에 이르기까지 취락(聚落)이 서로 연속하였으니, 이것은 진실로 국가에서 급급(汲汲)히 진려(軫慮)할 것입니다. 빌건대 금후로는 정조사(正朝使)와 성절사(聖節使) 등의 사신(使臣) 이외에 사은사(謝恩使)와 주문사(奏聞使) 등 여러 사신(使臣)은 정지(停止)할 만한 것은 정지하고, 부득이한 것은 관대(官帶)에 따라서 가서 진응(進鷹)하는 따위에 이르러서는 특별히 사람을 보내지 말고 또한 정조사(正朝使)와 사은사(謝恩使) 등의 사신에게 부치며, 그 건량(乾糧)은 예(例)대로 하사(下賜)하는 이외에 노상(路上)에서 사사로이 주는 것은 엄격히 금지하소서. 또 삼포(蔘布)·입모(笠帽)·선자(扇子)·건육(乾肉)·건어(乾魚) 이외에 다른 물건은 일체 금지시켜서 한 지방의 민력(民力)을 소생하게 하소서. 또 해마다 영호송(迎護送)과 기재지(騎載持)는 천추절(千秋節)·성절(聖節)일 때는 전라도(全羅道)와 충청도(忠淸道)의 평로위(平盧衛)·정병(正兵)이 스스로 응모(應募)한 사람을 취하여 하고, 정조사(正朝使)가 갈 때는 경상도(慶尙道)에서 하고 정한 때가 없는 사은사(謝恩使)·하례사(賀禮使)·주문사(奏聞使) 등의 사신(使臣)일 때는 영호송(迎護送)에는 본도(本道)에서 하고 기재지(騎載持)는 황해도(黃海道)에서 하고, 이때에 하삼도(下三道)의 사람은 한 번 가면 산관직(散官職) 1자급(資級)을 주고, 평안도(平安道)와 황해도(黃海道)의 사람은 두 번 가면 또한 1자급(資級)을 주며, 또 평안도(平安道)의 군사 가운데 재력(才力)은 있으나, 기마(騎馬)가 없는 자는 본도(本道)의 목장(牧場) 말을 뽑아서 주며, 또 수수(戍守)421)  에 부지런하고 삼가면서 추운 때 옷이 없는 자는 고려 때 정포 도감(征袍都監)의 예(例)에 의하여 하삼도(下三道)의 감사(監司) 행영(行營)에 쌓아 둔 포백(布帛)으로써 적당히 지급하고 또 본도(本道)에서 없앨 만한 공물(貢物)을 온전히 없애어서 오로지 정벌(征伐)과 수자리 일만을 책임 지우며, 세 차례 수어(戍禦)에 과실이 없는 자는 예(例)대로 산관(散官)의 직(職)을 주어서 한 지방의 민심(民心)을 위로하게 하고, 한 지방의 힘을 쉬게 하소서. 또 신(臣)이 을해년422)  에 평안도(平安道)에 출사(出使)하여 강계부(江界府)에 저장된 군량(軍糧)이 매우 적은 것을 보고 주관(州官)에게 물으니, 대답하기를, ‘고을 사람이 매양 미곡(米穀)을 싣고 재[嶺]를 넘어 안주(安州) 삼현(三縣) 등지에 이르러 소금[鹽]을 바꾸어서 먹는다.’고 하였습니다. 만약 안주(安州) 등 고을의 국고(國庫)에 있는 소금을 배로 실어 수상(水上) 영변(寧邊) 지방에 두고, 강계(江界)의 사람으로 하여금 소금을 이곳에서 받게 하고, 미곡을 고을에 바치게 하면 자연히 농우(農牛)와 전마(戰馬)가 피폐(疲弊)하는 지경에 이르지 아니하고 저장되는 양식도 풍족할 것입니다. 신(臣)이 그때에 계책(計策)을 올렸으나, 일이 끝내 시행되지 못하였습니다. 신(臣)이 또 경진년423)  에 봉명 사신(奉命使臣)이 입조(入朝)할 때에 안주(安州)로 지나는 길에 소금이 있는지 없는지 물으니 대답하기를, ‘관염(官鹽)이 수백 석(石)이 곳곳에 묵어 쌓였다.’ 하였습니다. 이로써 미루어 보건대, 다른 군(郡)도 모두 그러할 것입니다. 신(臣)이 또 생각건대, 방금 서쪽의 사변(事變)이 그치지 않으니, 비단 강계의 축적(蓄積)을 마땅히 저축(貯蓄) 대비(對備)해야 할 뿐만 아니라, 강변(江邊)의 군사들이 양식을 운반하는 폐단도 더욱 조치해야 마땅할 것입니다. 동로(東路)에서는 진(陣)을 친 영변(寧邊) 수상(水上)에 염창(鹽倉)을 설치하고, 강계(江界)·위원(渭原)·이산(理山) 사람으로 하여금 본 고을에 다 곡식을 바치게 하고서, 소금을 이곳에서 받게 하며, 서로(西路)에서는 청산 산성(靑山山城)에 창고(倉庫)를 설치하고 창성(昌城)·벽동(碧潼)·삭주(朔州) 사람으로 하여금 본 고을에 곡식을 바치게 하고 소금을 이곳에서 받게 하여, 얻은 미곡(米穀)을 고을의 창고에 저장하였다가 남도(南道) 수졸(戍卒)에게 예(例)대로 양식을 지급하여 유망(流亡)하는 폐단을 막고 방어(防禦)하는 일을 튼튼히 하소서.

1. 군사(軍士)를 사열(査閱)하는 일. 대개 서울에서 습진(習陣)하는데, 한 달에 두 차례씩 행하는 것은 진실로 좋은 법이라 하겠으나, 다만 외방(外方)의 작은 현(縣)의 군사는 혹 십수 명에 차지 아니하여 능히 군대를 이루지 못하나 습진(習陣)한다고 이름하면서 매 달에 두 차례씩 부르니, 한갓 서리(胥吏)들의 침어(侵漁)할 구실만이 될 뿐이다. 빌건대 금후로는 매년 봄·가을의 두 중월(仲月)이 되거든 각각 거진(巨鎭)에 모아서 3일 동안 머물면서 습진(習陣)하고, 10월이 되거든 유신(儒臣)들을 나누어 보내서 주진(主鎭)에 나아가 사열(査閱)하고 상벌(賞罰)을 행하며, 또 먼 도(道)의 군사를 매년 크게 사열(査閱)하는 것이 왕래하는 폐단이 없지 않으며, 또 여러 도(道)의 군사를 일시에 도성(都城) 아래에 함께 모우는 것도 또한 경외(京外)의 만세(萬世)를 위한 장구한 염려가 못됩니다. 빌건대 금후로는 양계(兩界)는 전위(前衛)라고 칭(稱)하고, 경기(京畿)·강원도(江原道)·황해도(黃海道)는 중위(中衛)라고 칭하고, 경상도(慶尙道)는 좌위(左衛)라고 칭하고, 충청도(忠淸道)는 우위(右衛)라고 칭하고 전라도(全羅道)는 후위(後衛)라고 칭하되, 양계(兩界)와 경상 하도(慶尙下道) 이외에 가까운 도(道)인 경기(京畿)·강원도(江原道)·황해도(黃海道)는 번상(番上)을 제(除)하며, 매년 봄철에 와서 사열(査閱)하게 하고, 먼 도(道)인 충청도(忠淸道)·전라도(全羅道)·경상 상도(慶尙上道)는 각각 1년 가을철에 와서 사열하게 하며, 순행(巡幸)할 때에는 그 곳에서 친열(親閱)하게 하며, 또 외방(外方)의 습진(習陣)할 때 수만의 군사들이 옷과 갑옷을 갖추고서 가는 것은 실로 원대한 도모(圖謀)가 못되는 것이니, 갑주(甲胄)는 감사(監司)의 행부(行部)할 때에 친히 점열(點閱)하여 감봉(監封)하고, 다음 차례 순행(巡幸)할 때에 창고를 열어서 주도록 하소서. 이와 같이 하면 점열(點閱)을 빌리는 폐단이 없고, 다만 궁검(弓劍)과 마필(馬匹)을 매양 습진(習陣)할 때를 당하여 법식(法式)에 의하여 점고(點考)할 뿐이며, 수령(守令)과 장수(將帥)도 또한 모두 논벌(論罰)하기가 편(便)할 것입니다. 신(臣)이 요동(遼東)에 이르러 교열(敎閱)하는 것을 보니, 북소리가 둥둥 울리고 사람들이 크게 부르짖어 그 소리가 원야(原野)를 진동(振動)시켰습니다. 근래 습진(習陣)할 때에 북소리가 둥둥 울려서 매우 시끄러운데, 빌건대 이를 고쳐서 군성(軍聲)을 엄하게 하소서. 또 육전(陸戰)은 그만이지만 수전(水戰)의 일을 강구(講究)하지 않은 듯하니 심히 불가(不可)합니다. 빌건대 지금 수전(水戰)의 진법(陣法)을 만들어 제때에 반포(頒布)하고 매월에 두 차례씩 만호(萬戶)가 싸움을 연습시키되, 봄·가을철 두 중월(仲月)에 처치사(處置使)가 싸움을 연습시키고 10개월이 되거든 또한 사자(使者)를 보내어 싸움을 연습하게 하고 와서 사열(査閱)하는 법이 없으니, 순행(巡幸)을 할 때에 바다에 임하여 둘러보고 사열을 하소서."

하니, 임금이 이를 가납(嘉納)하였다.


  • 【태백산사고본】 12책 34권 1장 A면【국편영인본】 7책 640면
  • 【분류】

    정론-간쟁(諫諍) / 군사-군정(軍政) / 군사-휼병(恤兵) / 군사-병참(兵站) / 군사-군역(軍役) / 군사-지방군(地方軍) / 군사-군기(軍器) / 역사-전사(前史) / 역사-고사(故事)


  • [註 405]

     구성(九城) : 고려 16대 예종 2년(1107)에 윤관(尹瓘)이 17만의 대군으로 함흥 평야의 여진족을 정벌하고 쌓은 아홉 개의 성. 곧 함주(咸州:함흥(咸興))·영주(英州)·웅주(雄州)·복주(福州)·길주(吉州) 공험진(公嶮鎭)·숭녕진(崇寧鎭)·진양진(眞陽鎭)·통태진(通泰鎭).

  • [註 406]

     순치(馴致) : 순치의 형세. 즉 점차로 나쁜 결과가 오는 형세. 그 조짐이 생기면 자연적으로 나쁜 일이 생기는 것을 말함. 《주역(周易)》 곤괘(坤卦)에, "그 도에 익고 극진하면 굳은 얼음에 이른다.[馴致其道至堅氷也]"하였음.

  • [註 407]

     호수(戶首) : 각 호(戶)의 우두머리. 1호는 정호(正戶)와 봉족(奉足)으로 되어 있는데, 호수(戶首)는 정군(正軍)의 입역(立役)과 여정(餘丁)의 공부(貢賦)를 책임지고 독려하였음.

  • [註 408]

     윤탁(尹鐸) : 춘추 시대(春秋時代) 진(晉)나라 사람. 조간자(趙簡子)의 가신(家臣)으로, 진양(晉陽)의 수령(守令)이 되었는데, 부세(賦稅)를 경(輕)하게 하여 민심을 얻었음.

  • [註 409]

     원습(原隰) : 높고 마른 땅과 낮고 젖은 땅.

  • [註 410]

     장패(將牌) : 군관(軍官)·비장(裨將)들이 허리에 차던 나무로 만든 패.

  • [註 411]

     호타하(滹沱河) : 후한(後漢)의 광무제(光武帝)가 왕낭(王郞)에게 쫓기어 호타하를 건너려 했을 때 왕패(王霸)가 강을 살피고 돌아와 무리의 사기를 꺾지 않고자 거짓 강이 얼어서 쉽게 건너갈 수 있다고 했는데, 정작 강에 이르러 보니 정말 강물이 얼어 있었다는 고사(故事)에서 온 말.

  • [註 412]

     생취(生聚) : 백성들을 길러 군대를 부강하게 하는 것.

  • [註 413]

     도부외(都府外) : 고려 말 조선 초에 금란(禁亂)·포도(捕盜)·순작(巡綽) 등의 임무를 수행하던 중앙 관청. 순군부(巡軍府)에 속한 군대의 하나로, 경기(京畿)의 민호(民戶)로 충당하였음. 좌(左)·우(右) 2령(領)이었으나, 뒤에 의금부(義禁府)로 개편되었음.

  • [註 414]

     천보(天寶) : 당(唐)나라 현종(玄宗) 742∼755.

  • [註 415]

     백도(白徒) : 훈련이 못된 병졸(兵卒).

  • [註 416]

     묵자(墨刺) : 주대(周代) 이래에 사용한 죄인을 벌하던 형벌의 하나로서, 얼굴에 먹물을 넣던 것을 말함.

  • [註 417]

     경인년 : 1410 태종 10년.

  • [註 418]

     계축년 : 1433 세종 15년.

  • [註 419]

     미칩(糜縶) : 말고삐를 매고 머무는 것.

  • [註 420]

     기재지(騎載持) : 사람이 타거나 짐을 싣기 위하여 예비로 데리고 다니는 말.

  • [註 421]

     수수(戍守) : 변방에 수자리 살며 지키는 것.

  • [註 422]

     을해년 : 1455 세조 원년.

  • [註 423]

     경진년 : 1460 세조 6년.                         


0 XDK (+0)

  1. 유익한 글을 읽었다면 작성자에게 XDK를 선물하세요.


  • 첫번째 댓글의 주인공이 되어보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