Joyful World [153197] · MS 2006 · 쪽지

2009-04-13 20:57: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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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년간의 일기 (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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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년간의 일기 (3)











07 수능이 끝나고 정말 신나게 놀았던 것을 기억한다.

그동안 하루에 한 시간씩 눈치 보면서 간신히 해왔던 게임들, 받아놓고 보지도 못한 채 묵혀놓고 있던 드라마와 영화들, 노래방, 쇼핑. 수능 이후의 고3 생활이란 안 봐도 뻔한 것이지만 소소했던 소망들을 하나하나 내 것으로 만들어 나가면서 느낀 한 달간의 기쁨은 정말로 가치있는 것이었다. 정작 수능 끝나면 그렇게 하고 싶었던 게임도 별로 재미가 없더라고 누군가 말했었지만... 전혀 -_-;; 수능 끝난지 일 주일만에 우리 엄마 내게 잔소리를 시작하신다 ㅋㅋ 잠좀 자라고 ㅋㅋ

원점수 470을 받은 직후 “고법! 서울대!”를 외쳤던 것과 달리, 내 점수는 원점수에 비하여 그렇게 높은 수준은 못 됨을 시간이 지나면서 알게 되었다. 그 해 수능은 언수외가 고루 평이했고 사탐이 어려운 편이었는데 언수외에서 16점을 까였으니, 표점 내지 대학별 점수에서 불리해 질 수밖에 없었다.

어쨌든 나군에는 서울대를 지원하기로 마음을 굳혔다. 내신이 당시 100점 만점에 98점대 후반이었는데, 08 기준으로 환산하면 8점대 중반이었으니 지원자 평균보다 조금 낮은 정도였다. 수능 점수와 내신 점수를 합하면 서울대식으로 194.7 정도 되었는데, 서울대 지원이 불가능하거나 소위 빵꾸가 나는 학과의 1차 커트라인에 걸릴 정도였다. 그래도 원래 목표는 서울대였으므로 불합격하더라도 하향 지원할 생각은 없었다.

나군에 불안에 가까운 지원을 했으니 가군은 안정지원을 하는게 정석이지만, 가군에도 연고대를 지르기로 했다. 수능 직후 호기롭게 고법을 얕봤던 것과는 달리 현실은 법,경영에서 상경,사과로 또 인문으로 계속해서 낮아져만 갔다.

수능 공부에 몰두하는 동안 잠시 잊고 있었을 뿐, 고등학교 초반에 가졌던 진로에 대한 고민이 해결된 것은 전혀 아니었다. 아직도 난 내가 뭘 하고 싶은지 몰랐다. 경영대와 법대의 차이조차 제대로 알지 못했다. 주변에 슬쩍 이런 고민을 토로하면 점수에 맞춰서 지원하면 되지? 과는 대학 가서 바꿀수 있다잖아.. 하는 요지의 대답만 돌아오곤 했다. 내 자신도 예전만큼 진로 탐색에 집중하진 않았다. 모의고사에 목을 매는 습관 때문에 점수와 서열을 점점 중요하게 생각하게 되었던 것이다. 점수에 맞추면서 지원 대학을 쉽게 바꾸어 갔던 것도 이 때문이었을 것이다.

고려대는 내신 비중이 상대적으로 낮은 대신 언수외의 반영 비율이 높았고, 연대는 그 반대였다. 고려대 국제어문을 쓸 것인가, 연대 외국어문학부를 쓸 것인가 고민하다가 결국 연세대를 쓰기로 했다. 개인적으로는 고려대를 쓰고 싶었지만 대학별 점수가 유리하다고 여겨지는 곳에 지원한 것이다.

너무 마음을 놓아버렸는지, 내신 수능이 모자라면 논술 공부라도 열심히 해야 할 것을.. 나는 노는 데 너무 바빠 엄연히 입시의 일부인 논술 준비를 허투루 하였다. 그러던 와중에 서울대학교 1차 합격 발표가 났다.


그리고 보기 좋게 떨어져 버렸다...
내가 경험한 첫 번째 불합격. 기분이 나빴다.


어쩌면 난 떨어질 것을 예상하고 있었는지도 모르겠다. 그렇게 우울하지도 않았던 걸로 기억한다. 당시 오르비 표본을 보면 인문 전체를 통틀어 가장 낮은 1차 컷의 표본이 국교에 있었는데, 그 조차도 내 점수보다 높았다. 쓸쓸한 느낌이 들었다. 한 번의 불합격이 지난 1년간의 내 노력을 상당 부분 깎아내 버린 듯한 기분이었다. 난 연세대 시험을 준비하면서 애써 연세대에 대한 내집단 의식을 만들어 갔다. 일부러 고대를 욕했다. 아직 붙지도 못한 주제에.. ㅋㅋ

다군은 애초에 쓰지 않았다. 부모님과 약속한 마지노선이 서강대 이상이었고 한의대를 쓸 성적은 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남은 건 연세대 하나 뿐이었고, 점공 카페를 봐도 수능 점수나 내신에서 상당히 밀리는 상태였기 때문에 논술에서 뒤집는 것밖에 방법이 없었다.

수능 공부는 인강 외에 따로 과외로 하는 것은 없었지만, 논술 공부는 혼자 하기엔 아무래도 벅찬 것 같았다. 고전을 읽어야 할지, 신문을 읽어야 할지.. 연세대 05, 06 논술 기출문제를 프린트해 놓고는 그냥 쳐다보고만 있었다. 이걸 어쩌란 말인가? 서울대 추천 도서를 도서관에서 손에 잡히는 대로 빌려다 놓고 또 그냥 쳐다보고만 있었다. 보바리 부인을 읽었다. 재미는 있었다. 근데 이게 정말 도움이 되는가?;;

감을 잡지 못하고 며칠이 어영부영 지난 다음 연대 논술이 얼마 안 남은 시점, 결국 난 학교 선생님이 추천해준 논술 학원으로 향했다.

찾아간 학원은 평범한 낡은 보습 학원 느낌이 드는 곳이었는데 원장은 내가 자리에 앉자 마자 자기의 경력이라던가 지도 실적을 잔뜩 늘어놓기 시작했다. 원장이 입을 열자마자 따분해지는 것을 느끼며 그냥 멍하니 앉아 듣기만 하는 나였다.

딱히 학원이 마음에 들지는 않았지만, 논술 수업 자체보다는 학원을 다님으로써 내가 꾸준히 글을 써볼 수 있는 계기가 된 다는 데에 더 의의를 두었다. 원장은 연대 논술까지의 학원비로 100만원을 요구했고, 가까운 친척들의 도움을 받아 겨우 학원에 등록할 수 있었다.

그러나 막상 그 논술 학원에서 진행하는 수업이란 정말 수준이 어이없을 정도로 낮았는데, 첫 수업에 들어갔더니 자료만 수십 부를 안겨 주고, 주제를 준 다음 알아서 읽고 다짜고짜 글을 써 오라는 것이다. 아 원래 이렇게 하는 건가 보다 하고 그 다음 시간에 글을 두 개 써 갔다. 그랬더니 시간이 없어서 둘 중 하나밖에 첨삭을 해 줄수 없다는 것이다. 그나마 해 준다는 첨삭도 대부분이 맞춤법 지적 -_-

그렇게 성의없이 수업을 하면서 부모님에게는 입 발린 칭찬만 해 댔다. 이전에 가르치던 애들보다 글을 잘 쓰니 연대는 합격할 수 있다고 립서비스를 장난아니게 뿌려 댄 것이다. 나중엔 부모님도 나도 그 말에 넘어가서 그런가보다 하고, 이 정도로 준비하면 합격할 수 있겠구나 하고 생각하게 되었다.

그렇개 6~7회 정도 학원에서 지도를 받고, 1월달이 되어 연대 논술을 보기 위해 아버지와 함께 서울로 향했다. 서울역에 내리자마자 지하철을 타고 신촌으로 향했다. 시내 한 복판에 있는 연세대학교. 왠지 낯설은 모습이었다. 이 학교가 내가 다닐 학교인가? 경사진 교문을 따라 펼쳐진 캠퍼스의 모습을 말없이 바라보다 숙소로 향했다. 숙소는 연대에서 조금 떨어진 모텔이었다.

연세대 논술 시험 당일. 눈이 내려 연대 캠퍼스는 눈꽃이 만개한 한 폭의 그림처럼 보였다. 외국어문학부의 시험장은 정문에서 길을 따라 한참 올라가야 했는데, 눈이 내린데다 비탈이 많아서 몇 번이나 미끌어지며 힘겹게 올라갔다. 이래서 학교 다니겠나 하는 생각이 그 때마다 떠오르곤 했다 ㅎ

05, 06에서 고전을 위주로 어려운 논술 문제가 출제되었던 이전의 경향과 달리 07 연세대 논술은 생각보다 평이한 수준이었다. 그렇지만 나는 화장실을 다녀오는 등 여유를 부리다가 시간 분배에 실패하여 결론을 어영부영 마무리짓고 간신히 제출할 수 있었다.

http://orbi7.com/bbs/zboard.php?id=pp_06_yk_portal&page=989&sn1=&divpage=10&sn=off&ss=on&sc=on&select_arrange=headnum&desc=asc&no=32346
< 당시 연세대 논술을 치르고 나서 쓴 후기 >

시험을 치른 후 눈이 녹기 시작하는 연대 캠퍼스를 걸어 나오는데 이제 입시가 끝났다는 것이 실감이 나지 않았다. 발표까지는 한 달 가까운 시간이 남아 있는데 남은 시간들을 어떻게 보내야 할 지, 무엇을 해야 할지 뚜렷한 계획이 존재하지 않았음도 그에 한 몫 했다. 아무튼 남은 것은 기다림 뿐, 나는 경기도의 친척집에서 하룻밤을 보낸 뒤 집으로 돌아왔다.

그리고 시간이 흘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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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7년 2월 22일 목요일

나는 한 번의 기회를 더 얻었다.

연세대와 서울대를 썼고, 떨어졌다. 그래서 다시 도전한다.
수많은 밀린 이야기들을 일기에 다 적을 순 없을 것 같다.
사실 막막하다.
내가 선택한 길이 옳은 길인가에 대한 확신이 부족하다.
단지 멋있게 살고 싶다는 내 소망에는 변함이 없다.
주위 말대로 나는 야망이 부족한 것일까?
하지만 내게는 내 나름대로의 야망이 있는데.

오늘부터 다시 시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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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국어문학부. 대기 73번. 불합격.
일 년의 숨가빴던 입시는 그 한줄의 문장으로 끝나 버렸다.


내심 만족하지 못했었고, 떨어질 지 모른다는 생각에 재수 생각도 몇 번 했었던 나다. 하지만 전화로 아버지에게 불합격 소식을 알리는데, 아버지의 실망 섞인 차가운 대답은 내 가슴마저 차갑게 만들었다.

며칠 뒤 난 아버지와 큰 다툼을 했다. 재수하는 주제에 책상 앞이 아니라 컴퓨터에 매달려 있다는 게 아버지의 요지였다. 3월달부터 공부를 시작할 생각이었던 나는 아직도 나를 믿지 못하는 아버지에게 나대로 기가 막혔다. 고3 시절 내내 아버지의 참견을 참아 가며 공부했고, 때때로 도움이 되기도 했지만 그것이 지나쳐 공부에 오히려 방해가 되는 일도 부지기수였다.

일 년만에 점수를 백 점 넘게 올렸는데, 한 번 더 내 계획대로 꾸준히 하면 더 좋은 성과를 낼 수 있을 거란 내 말에 아버지는 점수 암만 올려봤자 대학 떨어진 놈한테 무슨 의미가 있냐고 말씀하였다. 그 이야기를 들으면서 이건 아니다 싶었다. 대학에 떨어진 이유만으로 내게는 치열했던 지난 일 년이 아무것도 아닌 시간 낭비로 취급받아야 했는가? 받아들일 수 없는 이야기였다.

난 다른 사람보다 경쟁심이 강하지 않은 대신, 다른 사람보다 더 강한 명예욕과 성취욕이 있을 지 모른다고 그 때 생각했다. 나의 노력에 대해 정당한 댓가를 받지 못하는 것은 참을 수 없었다. 그래서 난 의미가 옅은 모의고사에서 그토록 점수에 목을 매었었고, 원하지 않는 학과의 합격 또한 그토록 바랬었던가. 아버지의 이야기는 듣기 좋은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대학에 떨어진 이상 내 노력을 보상 받을 길이 요원하다는 것이 사실이긴 했다. 그렇다면 방법은 하나, 노력을 일 년 연장시키더라도 더 높은 목표를 성취해 내는 것 뿐이었다.

지난 일 년의 점수 향상에 도취되어 있던 나는, 혼자 인강과 독서실을 오가며 독학으로 목표를 성취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난 재수 종합반에 등록하지 않고, 다시 한 번 계획을 짜기 시작했다. 아버지를 따라 며칠정도 흔히 말하는 노가다를 한 적이 있다. 초보 일꾼이었던 나는 도로 가운데 서서 형광봉으로 진입 신호를 보내는 일을 맡았는데, 10시간 이상 한 자리에 서 있어야 하는 단순 작업이었다. 그 일을 하면서 머릿속으로, 앞으로의 재수 계획과 목표에 대해 조금씩 틀을 잡아 나갔다.

이 때, 동기 부여를 위해 반기문과 홍정욱, 한비야 등의 다양한 자서전들을 읽기 시작했다. 특히 홍정욱의 7막 7장은 최근 허위 기재된 내용들이 밝혀져 논란이 되고 있지만, 불과 23살의 청년이 유려하다 못해 현학적인 필치로 쓴(것이라고 알려졌었던) 삶에 대한 불타는 의지, 높은 청운의 꿈은 당시 나에게 큰 영향을 주었다. 그 시기 심지어는 일부러 어려운 말을 섞어서 일기를 쓰기도 했었다 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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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7년 3월 3일 토요일

재수를 결정한 후, 처음으로 마음을 잡고 책상 앞에 앉았다.

어젯밤 일찍 잔 탓인지 일어나는 건 어렵지 않았지만
근 100일만에 공부를 다시 시작하는 건 어려웠다.
매체중독에 빠진 내 몸은 자꾸 자극을 요구하고
내 몸을 다시 산사로 밀어넣는 것이 나의 몫이다.
개임 따위 소모적이고 백해무익한 것에 내가 왜 빠졌던가

벌써 3월이고, 이제 시간이 넉넉치 않다. 전혀 늦진 않았다.
확실히 작년의 경험은 내게 안정감은 줄 수 없어도
좌절하지는 않게 만들어준다. 기억이 나든 안 나든 다 공부했던 내용들이다 ㅋㅋ

08 고려대학교 경영학부
08 서울대학교 경영학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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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수하면서 일기장 맨 아래에 목표하는 대학 이름을 매일 적기 시작했다. 이 또한 동기 부여를 위해서였고, 사소한 행동이지만 의외로 적지 않은 도움을 받은 것 같다.

연대 논술이 1월 6일이었고, 공부를 시작한 게 3월 초였으니 실상 100일이 아니라 두 달만에 펜을 잡은 것이었다. 머리가 엔간히 굳었나 보다 ㅋㅋ 그 동안 던파 만렙을 두 개 찍고, 영화와 드라마 등에 빠져 살았던 터라 일기를 쓰는 동안 손에 고통이 느껴질 정도로 손으로 하는 공부와 멀어져 있었다. 현역 때 언어와 외국어를 기초부터 제대로 공부하지 못했던 것, 수학 개념과 문제풀이가 충분하지 못했던 것이 마음에 걸렸다. 사탐은 이미 많은 부분 잊어버린 후였고, 제2 외국어도 새롭게 시작해야 했다.

일 주일 정도 공부를 하고 나니 초반의 의지는 벌써 사라지고 슬슬 몸이 근질거리기 시작했다. 집부터 독서실까지 가는 중간에는 pc방도 많았고, 오락실도 많았다. -_-; 애초에 목석처럼 공부만 하는 스타일과는 거리가 멀었던 나였기에, 이런 유횩을 뿌리치기는 점점 힘들어졌다. 친구들과 고등학교 때 즐기던 게임들을 한 판씩 하고 독서실로 가곤 했고, 그 시간이 점점 길어져 한 시간, 두 시간이 되어 갔다.

공부를 두 달 만에 시작한 데다, 그나마 시작한 지 일 주일만에 막장 짓을 하기 시작했으니 예전 점수에서 오르기는 커녕 까먹는 게 인지상정이었다. 3월달에 실력 테스트차 치렀던 사설 모의고사 점수는 이런 배경에서 탄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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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어 86 수리 56 외국어 91 / 윤리 50 국사 42 근현 48 사문 40 / 총점 4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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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리 56 -_-;; 사탐이 범위가 적어서 점수가 잘 나왔다는 것을 고려하면 고3 초반으로 돌아간 거나 다름없는 성적이었다. 그런데도 아직 이유없이 여유가 있었다. 영어 듣기를 한답시고 Friends를 한글 자막까지 달아서 하루에 두세 개 씩 보곤 했고, 오락실 노래방에 들러서 한 시간씩 시간을 보내는건 예사일이었다. 일기장에 하루의 반성을 하는 것이 점점 부끄러워졌고, 일기를 안 쓰기 시작했다. 때때로 이런 내가 부끄러워 꾸짖기도 했지만 그때 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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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7년 3월 14일

나는 일기를 쓰는 것이 두려운 것인가?

일기는 매일매일의 자기반성이며 흘러간 하루를 되돌아보는 기록이다.
그 과정에서 나 자신의 나약하고 부끄러운 모습을 발견하면 나도 모르게 얼굴을 붉히게 된다.

일기를 쓰고 싶지 않다는 건 흘려보낸 오늘 하루를 되돌려보기 싫다는 것이고, 그렇다면 오늘 하루는 결코
훌륭하게 보낸 것이 아니다. 부끄러운 용두사미, 나 자신을 몰아붙이고 싶지는 않지만 사실 나는 어리석다.

아침에 눈을 뜨면 졸린 눈으로 시간을 보내거나 다시 자리에 누워 버리고, 아침 식사에 한 시간, 점심 식사에 두 시간,
먹고 살자고 하는 것인가 먹으려 살고자 하는 것인가? 컴퓨터를 켜면 어느새 시선은 삼천포에 있고, 냉정하게 말하면
고3때보다도 나약한 나의 모습. 실패에 내성을 만들고자 하는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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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월이 되자 이런 나약함은 더 심해져만 갔다. 벚꽂이 피는 봄날에 불 꺼진 독서실의 습한 냄새를 맡기가 죽기보다 싫었고, 그러면서도 피시방의 담배 냄새는 잘만 맡으며 돌아다녔다. 이 때 한창 떠돌기 시작한 '리니지 프리서버' 도 나의 학력 저하에 한 몫을 했다. 중학교부터 고등학교때까지 리니지 폐인 생활을 했던 적이 있는 나로선 리니지 프리서버는 말로만 듣던 신세계였다 ㅡㅡ;; 재수하면서 집에서 하루에 얼마씩 용돈을 받아 썼던 나는 초딩처럼 마지막 100원까지 계산해서 게임을 즐기고는 아쉬움에 피시방 문을 나서곤 했다. 아... ㅠㅠㅠ 지금 생각해도 안습이다 ㅠㅠ

한 달 가까운 시간을 집과 피시방을 오가니, 독서실의 내 자리엔 먼지가 쌓일 지경이었다. 이쯤 되자 집에서도 슬슬 눈치를 채는 듯 했다. 같이 식사를 하려고 부모님이 독서실에 오셨을 때 내가 자리에 없는 날이 지나치게 많았던 것이다. 재수를 시작하면서 열심히 해서 이번에는 꼭 서울대를 가겠다고 호언장담했던 나를 결국 믿어 주신 부모님. 낌새를 알아채시고도 며칠간을 지켜보고 계셨는데, 아마 아들인 내가 당신들의 기대를 저버리고 있다는 점을 믿고 싶지 않아서였는지도 모르겠다..

며칠 후, 내가 피시방에서 여전히 게임을 하고 있을 때 어머니께서 독서실에 전화를 하셨다. 물론 내가 자리에 있을 리가 없었고 어머니는 즉시 내게 수십 통의 전화를 걸어 내가 집으로 날아오게 하셨다 -_-;; 공부를 하지 않는 내 자신에 대한 막연한 부끄러움이 외부에 대한 이유 없는 공격성으로 나타나고 있던 그 때, 어머니의 꾸지람은 왜 그리도 듣기 싫었는지. 난 고등학교 친구와 함께 독서실이 아니라 시립 도서관에 있었다고 우기면서 무슨 말인지 모르겠다는 이야기만 되풀이했다.

그 날, 결국 부모님은 나를 학원에 보내기로 하셨고, 나도 게임에 빠지고 공부가 밀리고, 밀린 공부를 해낼 자신이 없어 게임에 더 빠지는 악순환을 내심 벗어나고 싶었기에 독학의 고집을 버리고 학원에 등록하기로 했다. 그 때가 5월 말이었다. 한 달 정도만 있으면 반수반이 개강하는 시기라, 학원에선 그 때까지 독학을 하길 추천했지만 난 더 이상 혼자 해 낼 자신이 없는 느낌이었다. 한 달에 50만원에 육박하는 학원비가 부담이 안 될리 없었지만 더 이상 시간을 지체하면 돌이킬 수 없을 것 같았다.

내가 등록한 학원은 번화가에 있는 시에서 가장 큰 학원이었다. 작년 수능 성적으로 서울대 특반에 편입할 수 있었는데, 실제 두 반으로 편성된 특반 중 내가 편성된 반은 실질적으론 진짜 특반이 아니었다. 진짜 특반은 다른 한 반 뿐이었다. 놀라웠던 건 고3때 전교 1등이었던 친구가 다른 특반에 다니고 있었다는 사실이었다. 서울대 법대를 지원했던 그 친구는 아쉽게도 지균 2차에서 불합격했고, 수능도 서울대 인문 합격선이었지만 법대로 소신 지원을 한 다음 한 해 더 도전하고 있는 것이었다.

나도 올해는 서울대를 꼭 가야겠다는 생각에 학원 첫 날부터 맨 앞에 앉아서 공부를 시작했다. 까만 추리닝에 더벅머리를 깎지 않고 감기만 한 채였다. 학교에서도 수업을 잘 듣지 않았던 나는 학원에서도 수업을 열심히 들을 생각이 없었다. 중고로 구입한 pmp에 인강을 인코딩해서 들고 다녔으며, 학원은 생활 습관을 바로잡는 한 방법으로 여겼다. 그런데 별 생각 없이 수학의 정석 책을 펴고 읽고 있는데, 영어 선생님이 갑자기 나에게로 와서 마구 꾸지람을 하더니 밖으로 나가라고 하는 것이었다. 영문을 모르고 .. 선생님 말을 무시한 채 계속 책을 보았다 -_-;;

알고 보니 여기선 자습실이 따로 있고, 그나마 자기 마음대로 사용할 수는 없는 모양이었다. 듣고 싶지 않은 수업을 강제로 들어야 하는 것이 내겐 정말 맞지 않았다. 게다가 반의 아이들도 특반이라는 알량한 특권의식 때문인지 새로 들어온 나에게 견제를 장난 아니게 해 댔고 그 때문에 적지 않은 스트레스를 받았다. 아이들은 재수생이라는 신분이 무색하게 끼리끼리 모여다니며 그룹 안에서 이성친구를 만들고 당구를 치러 다녔으며, 자습시간에는 떠드는 소리 때문에 공부가 불가능할 정도였다.

그렇게 한 달동안 즐겁지만은 않은 재수학원의 생활을 보낸 뒤, 6월 모의평가를 치르게 되었다.


재수 6월 평가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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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어 77 수리 96 외국어 98 / 윤리 43 국사 36 근현 40 사문 42 / 총점 4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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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어 -_-;;

수리 점수에 충격을 받고 수리에 집중을 한 결과 좋은 결과가 나온 것은 바람직했다. 외국어도 꾸준히 듣기를 하고 단어를 외운 덕분에 점수가 약간 오른 것 같았다. 하지만 책 몇 권 읽은 것을 믿고 따로 공부를 안 한 언어에서 갑작스레 엄청난 점수의 하락이 있었다.

언어 공부는 제대로 해본 적이 별로 없던 나는 당황할 수밖에 없었다. 사탐도 아직 정리가 덜 된 데다, 제2외국어는 한문을 선택했지만 지지부진했다. 한문 암기가 너무 힘들었던 것이다. 430점 대의 총점, 시간은 6월 중순을 넘어가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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