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년간의 일기 (6) + 후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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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년간의 일기 (6)
2008년 2월 11일.
한양대에서 전화가 걸려왔다.
안녕하세요 한양대학교 입학관리본부입니다. XXX씨 맞으신가요?
네? 네
다군 법학과에 추가합격하셨는데 등록하실건가요?
아니요
아 다른 학교에 등록하셨나요?
네
혹시 어느 학교인지 여쭤봐도 될까요?
고려대학교요
음.. 과는요?
경영학과입니다.
.
.
.
전화를 끊고 나니 뭔가 허탈하다. 입시가 정말 다 끝났다는 게 이상하다.
며칠 전에는 고려대 총장님께서 전화를 하셨었다. 우선선발 합격자들에게 등록을 권유하는 전화였다. 4년 장학금. 첫 해는 무조건 장학금을 받을 수 있었고, 그 이후부터는 전 학기의 학점에 따라 차등 지급한다고 했다. 학비와 상경 비용때문에 기쁘면서도 고민하고 있던 우리 가족에게는 희소식이었다.
2년을 전력투구하고, 이제 갈 길을 잃은 듯한 기분이다. 남극점을 향해 가는 모험가는 얼음과 바다를 헤쳐 가며 사력을 다해 단 하나의 점으로 움직여 가지만, 막상 남극점에 깃발을 꽂은 후 주변을 둘러 보면 막막한 얼음의 대륙과 망망대해만이 눈앞에 펼쳐져 있을 뿐인 것처럼.
재수를 거치면서 불어난 체중과 망가진 생활 습관을 바로잡기 위해 새터 전 일 주일 정도 단식을 하기로 했다. 누나와 함께 들어간 단식원에서 한양대에서 걸려온 전화를 받은 것이다. 오르비도, 입시 사이트들도, 안 간지 한참 됐네. 하루가 멀다 하고 들어갈 때가 엊그제 같은데. 이제 두번 다시 마주할 일이 없을 곳들.
새로운 삶이 내 앞에 펼쳐질 것이다. 난 지난 2년동안 써온 일기장을 펼쳐 본다. 표지에 커피 얼룩이 여전하고, 아래쪽이 약간 너덜거리지만 그래도 깨끗한 일기장이다. 2년을 썼는데도 반 넘어 남았으니 앞으로 계속 써도 될 것 같다.
일기장의 맨 뒤쪽에는 수능이 끝난 뒤 하고 싶었던 일들이 빼곡히 적혀 있다. 공부하면서 힘들 때마다 일기장 맨 뒤를 펴서 하나씩 적어갔던 것들이다. 그것들을 하나하나 지워나가다 보니 어느새 2월도 절반이 갔다.
리스트 중의 하나가 취할 때까지 술 마셔 보기. 다. 참 하고 싶은 것도 없었나 보다. ㅋㅋ 이딴 걸 다 적어 놓고 ㅋㅋ
단식원엔 컴퓨터가 없다. 문득 피시방에 가고 싶어 옷을 갈아입고 문을 나섰다. 2월인지라 바람이 아직도 차다. 안에 든 것이 없어 배고파 속이 쓰릴 지경인데 밖에서 찬바람까지 불어대니 눈앞이 혼미하다. 불과 백 미터 앞에 있는 피시방이 참 멀게 느껴질 수도 있구나.
컴퓨터를 켜고 즐겨 하던 게임을 실행했다. 그리곤 생각 없이 기계적으로 플레이를 한다. 버프를 넣고, 몬스터를 때리고, 아이템을 줍고.. 게임할 때는 팔에서 머리로 가는 신경이 사라지는 것 같다. 아무 생각 하지 않아도 패턴에 익숙해진 내 손은 알아서 캐릭터를 움직이고 있다.
그렇게 한참동안 게임을 하는 도중, 문득 핸드폰이 울린다. 문자가 도착해 있다. 어? 못 보던 번호인데... 핸드폰을 흘깃 쳐다본 다음, 나는 모니터로 시선을 옮겼다. 손이 다시 바쁘게 움직이기 시작했다.
그리고 2008년 11월 18일.
시험 기간임에도 참 열심히도 써 온 수기를 이제 끝맺으려 한다.
사실 수기를 쓴다는 건 좀 부끄러운 일이었다. 내 수기를 보는 친구들은 이게 내 글이란 걸 대충 짐작할 수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대학생이나 되어서 뭐 잘난 게 있어서 수기를 쓰고 있다는 게 부끄러울 만도 하다. 누군들 나만큼 공부하지 않았겠는가. 동기 중 어느 누구도 나보다 덜 열심히 한 사람은 없을 거라고 나는 생각한다.
자랑할 것도 없는 수기를 꼭 쓰고 싶었던 이유는 별다른 것이 아니었다. 일기장 맨 뒤에 적어 놓았던, 수능 후 꼭 하고 싶었던 일들 중 한 가지를 이제야 하게 된 것에 불과하다.
내가 오르비를 처음 안 것은 고등학교 3학년 때였다. 이후 공부를 하기 싫을 때, 모의고사를 친 직후에, 궁금한 것이 있을 때, 이 곳을 참 많이도 들락거렸었고 심지어는 수능 친 후에 수능자유게시판에서 잡담을 하다가 아이디를 잘리기도 했었다 ㅋ
하지만 오르비에서 가장 많이 들어갔던 게시판은 역시 수기 게시판이었다. 힘든 공부, 해도해도 끝이 없을 것 같은 참고서 더미 위에 무너져 있다가도 나보다 더 힘든 상황을 헤쳐나와 누구보다 큰 결실을 맺어낸 사람들의 이야기는 나에게 다시 한 번 책상 앞에 앉게 하는 힘이 되곤 했다. 앞서 걸어간 사람들의 발자취들. 크기도 다르고 깊이도 다른 그 발자국들은 수능이라는 작지만 큰 목표를 향해 다가가고 있었다.
합격. 합격. 합격. 글 속의 그 누군가가 어머니를 끌어안고 합격이라는 두 글자를 부르짖을 때, 나도 모니터를 끄고 눈물을 훔쳤던 기억이 선명하다. 타인의 노력과 타인의 성취가 왜 그리도 가슴에 와 닿았던 걸까. 때론 공부도 뒷전으로 하고 밤이 깊도록 컴퓨터 앞에 앉아서 수많은 수기들을 탐독하면서 나는 무엇을 느끼고 싶었던 걸까.
대학생의 된 이후 고작 1년의 짧은 시간이 흘렀지만, 대학에 입학한 이후의 삶이 수능을 준비하는 수험생의 그것보다 훨씬 굴곡질 것임을 안다. 또한 수능이라는 하나의 시험을 인생 최대의 목표로 삼는 듯한 수기들에 대해 곱지 않은 시선들이 있음을 안다. 하지만 20년 내외의 짧은 삶을 살아온 미성년의 인생에서, 몇 년동안 있는 힘을 다해 준비해온 수험생의 기억보다 강렬한 시간이 또 있을까. 어린 마음을 불태웠던 그 시간들이 또다른 시간에 떠밀려 기억의 뒤편으로 스러져 사라질 때, 그 안타까움을 나의 글로라도 남기고 하는 마음에 이 글을 쓰기 시작했다.
나의 글이 또 다른 사람을 이끌어주는 발자국이 될 수 있다면 나로선 내 경험으로 할 수 있는 모든 것을 다 한 셈이다. 내가 수많은 사람들에게서 받아왔던 셀 수 없는 감동의 일부분만이라도 다른 사람들에게 돌려줄 수 있다면 그보다 더 기쁜 일은 없을 것이다. 누군가 내 발자국을 보면서 길을 찾을 수 있길 바랬으므로, 나는 매 걸음을 더 힘주어 딛으려 애썼는지 모르겠다. 부족한 경험을 담아낸 부족한 글이었으나 참고 보아준 분들께 감사의 인사를 전한다. 또한 숱기가 없어 항상 말로 표현하지는 못하지만 사랑하는 부모님과 누나에게 감사하다고 말하고 싶다.
마지막으로 우리 학교를 소개하며 부족한 글을 정말 마치려 한다.
2008. 2. 11.
2008. 11. 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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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 이거 [파브르]님꺼 아닌가요??? 파브르님이신가요??
맞는듯요 56번글 앞부분에 밝히셨네요
다시 보지만 진짜 몸에 전율이
진짜 작품이네요;;
이게 왜 이쪽으로 넘어왔지?? 댓글도 다 지워졌네
이거 다시 보지만 진짜 마지막 반전은 ~~
아;;; 맨 앞에 다시 올린다고 밝히셨네요.
서울대.. 추가합격으로 갔다는건가요?
1명 추가모집하는데 합격하신거죠...
추가모집이아니라 추가합격입니다.
와와 온몸에 소름이 ㄷㄷㄷ
전율.....
아 대박이다...마지막거 이해하는데 잠깐(10초정도) 걸렸지만...
온몸에 소름이 돋네요...마지막 문자가..서울대 추합문자였던건가..멋있다
감동입니다
와........... 진짜 ...... 와...... 진짜 지금 계속 3초를 주기를 소름이..............
와... 정말 잘읽었습니다. 한권의 책을 읽는듯한 ... 아니 그보다 더큰 감동을 느꼈습니다. 정말 잘읽었습니다
근데... 한양대법대 이글에서 지금 무시당하는거 맞죠 ? ^^;
고경 우선선발인데 한법 추합이면 무시당하는 것이 아닌듯
대....박....
와..쩐다 ㄷㄷㄷㄷ
와..쩐다 ㄷㄷㄷㄷ
와..쩐다 ㄷㄷㄷㄷ
와..쩐다 ㄷㄷㄷㄷ
뭐지 이반전은 데이비드 게일 유주얼 서스펙트 식스센스 이후의 최고의 반전이야..
글쓰는 재주도 좋고...부럽다..
내 꿈을 한발 앞서 이룬 분
2010년 봄에 뵈요.
잘읽었습니다. 감사합니다 .이 글을 보며 풀어진 마음을 다시 다잡게되네요.
멋진수기 감사합니다
작품이네요.. 방학 끝나기 1주일 남았을때 자극좀 받으려고 수기 들어가서.
감동먹고 컴퓨터 끄려 합니다. 열심히 해서 꼭 꿈을 이루겠습니다.
와... 글 진짜 잘쓰신다..ㄷㄷ
작품 ㅜㅜb
헐...반전...; 이글을 이제야 읽은게 정말 아쉽네요.. 반전 대박이네요.. 고1때부터 자세한 수기 잘읽었습니당...^^
감사합니다. 저의 꿈을 먼저 이루신분. 모든 노력을 다하고 하늘의 명을 기다린다는 진인사대천명이란 구절이 떠오릅니다. 부끄럽지않게 저 또한 노력해 보이겠습니다.
아...
수기를읽으며 감동받은적은 있었지만 소름까지 끼친적은 처음이네요..^^08서울대경영 빠진 인원 1명이 제 친구라 더 재미있어요..저도 올해 서울대목표로 하는 장수생입니다. 이글 써주셔서 장말 감사드립ㄷ다.
시나간 시간 위에 선배들이 쌓아놓은 길을 걷는 후배들
나도 그 위에 올려지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