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소식

Nadir [115620] · 쪽지

2007-01-31 21:32: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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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쉬움을 남길지라도 후회는 남기지 말라 - 고교시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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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희대 근처에서 집 구하다 왔습니다;; 운이 좋아서 싼 값에 방 두칸짜리 집을 구했습니다;ㅂ;

밥은 어떻게 해먹어야 할지 고민입니다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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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후는 경어 생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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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등학교에 들어갈 즈음이 되자 내 위치가 어느정도 파악이 되었다. 300점 만점의 중학 내신에서, 내 주위에서 어느정도 공부를 잘하는 아이들은 대략 280여점 중반대를 맞았고, 290점 대는 꿈의 점수였다.

나의 점수는.... 274점. 실업계고등학교 커트라인인 250점대와는 그래도 차이가 있었지만, 정말 어중간한 점수였다. 이래서야 고등학교에 올라가선 정확히 중간이지 않은가.

그것은 참을 수 없다고 생각했다. 어중간한 인생, 물론 그것이 나로 인한 것이라면 받아들일수도 있다고 생각은 했지만, 나는 과거 단 한번 노력의 힘을 느껴본 일이 있다. 하면 된다고 생각했다. 겨울방학이 찾아오고, 다시 칼을 갈기 시작했다.

기숙사, 그것만이 나를 정착시킬 유일한 방법이었다. 그러나 학원선생으로부터 받은 작년 기숙사시험 기출문제를 보고, 나는 경악을 금할 수 없었다. 도대체 건드릴 구멍이 보이지 않는 수학문제, 끝이 없는 영문법문제, 게다가 읽어보지도 않은 국어지문에서 문제가 나온다니 상상도 못해본 일이었다.

그러나 이미 내게 방법은 없었다. 서점에서 수학의 정석 10-가 와 성문기초영문법을 사왔다. 시험 공고가 난 1월 초부터 시험이 있는 1월 말까지의 시간을 계산하고, 이 책을 다 풀려면.... 하루에 한단원씩은 떼야 한다는 계산이 나왔다. 입에서 욕이 절로 튀어나왔다.

수학은 학원에서 그나마 배운 터라 넘어갈 수 있었다. 하지만 영어는.... 앞서 말한대로 have_p.p도 모르던 내겐 막막할 뿐이었다. 차근차근, 어차피 나는 백지다. 처음부터 시작하는거다라는 심정으로... 나아갔다. 기본 취침시간은 2시. 조금 문제가 안풀리면 3시까지 밤을 새우는 것도 불사했다.

그렇게 시간이 흘렀고, 오히려 영어의 진도는 끝내고 수학을 끝내지 못했지만 자신이 노력했다는 사실에 대해 나는 자신감을 갖고 있었다.

그러나 결과는 우습게도... 수학이 60점. 국어와 영어는 80점. 집으로 돌아가 이불을 뒤집어 쓰고 울었다. 괜히 엄마에게 화도 내고.

그래도 어쨌든 기숙사는 붙었더란다. 먼 훗날에야 알게 된 거지만 수학은 내가 1등이었다고... 믿거나 말거나...

3월이 되어 새 교실에 들어선지 1주일이나 지났을까, 모의고사를 봤다. 긴장이고 뭐고 그닥 느끼지 않았다. 애초에 무엇이 나오는지를 모르니 겁도 없었던 거겠지.... 결과는 아마도 443점으로 기억한다. 전교에서 2등. 매우 만족스러운 결과였다.

1학년 동안은 대략 4등에서 1등사이를 넘나들었다. 중학교동안은 소홀히 하던 수행평가에도 열을 올려 기말고사 콤플렉스도 깨부수고. 명실공히 상위권에 안착하게 되었다.

2학년이 되어, 내 위에 있던 모든 학생이 문과로 옮겨가고, 바야흐로 나의 시대가 도래했다. 2학년 내내 1등을 놓친 건 단 한번의 모의고사. 그 때 내가 느낀 감정은 조급함이었다.

실로 사람이란 건 쉽게 변하는 법이다. 120등을 해도 태연하던 놈이 2등을 했다고 조급해하게 될줄이야... 나 자신조차 놀랐지만, 그 조급함이 그 다음의 모의고사에서 나를 더욱 크게 앞서도록 한 원동력이었을 것이다.

이쯤에서 방법론적인 부분을 이야기해보면, 이 충청도의 작은 도시에 내가 만족할 만한 학원이나 과외선생은 없었다. 과외 구한다고 써놓은 종이를 보면 정말 내가 바라는 학교와는 거리가 아득히 멀었다. 결국 나 자신에게 의지할 수 밖에 없었다. 혼자서 모든 계획을 짜고 혼자서 모든 것을 선택했다. 이 문제집은 어디가 어떠니 나랑 맞지 않고 이 문제집은 나랑 너무 잘맞고 등등 모든 것을 홀로 결정했다. 학교 수업은 그냥 잤다. 그것이 나의 방식, 하나의 모드가 된지 너무 오래였고 그걸 떼버리는건 좀처럼 이루어지지 않았다. 아니, 결국 수능을 보기 전까지도 그것은 고쳐지지 않았으니...

그렇다고 모든 것과 벽을 쌓고 공부만 했느냐고 물어오면, 그것은 아니었다. 기숙사를 나오면서 3년동안 산 만화책만 두박스가 나왔고 소설책도 그정도가 나왔다. 주말에 집에 돌아가면 애초에 학원은 안다니는 나는 그저 놀 뿐이었다. 여기저기 블로그를 뒤돌아다니며 세상이 어떻게 돌아가는지 보는게 그나마 낙이었다. 3학년 후반이 되어선 그것이 더욱 심해져, 보충수업 2시간은 그냥 넘기고 집에가서 컴퓨터를 하는게 일상이 되었다.

환경도 받쳐주지 않았고 완전히 공부에만 전념한 것도 아니지만, 나를 그나마 지탱해준 것은 흔히들 말하는 신념이라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노력하면 된다는 사실을 몇 번이고 실현시켜내며 그러한 사실은 나의 신념, 믿고 따라 의지할 만한 것이 되었다. 불확실한 미래에 대해 이 길이 옳은 것인가, 이 길이 과연 최선인가를 판가름하는 기준은 결국 신념인 것이다. 족집게과외도 없다. 남들 다니는 변변한 단과학원도 없다. 그런 상황하에서 이렇게 무작정 노력이라는 것을 하는게 옳은가. 이를 판단을 하는 것이 바로 신념의 역할이었던 것이다.

대체로 남들이 말하는 공부방식의 상궤와는 전혀 맞물리지 않는 나의 공부법은 분명 오히려 남들이 말하는 공부방식에 반항감을 가졌기 때문에 있을 수 있었던게 아닌가 싶다. 정석만 10번 돌리라고 하면 이것저것 시중에 있는 기본서는 모조리 사서 한번씩 돌리고 n제 문제집은 질이 안좋네 뭐네 하면 n제문제집과 8절모의고사를 1m정도 쌓아놓고 풀었다. 학교수업에 집중하라는 소리는 골백번도 더 들었지만 말경에는 아예 무시하고 내 문제만 풀기 일쑤였다.

모의고사는 대체로 470점이 평균, 못보면 440점대, 제일 잘 본게 489점이었다. 수능을 앞두고 자신에게 당부한 바, 470점대면 딱 내 실력이다. 480점대면 정말 잘 본거고 490점대면 정말 신에게 감사해야할 것이다. 460점대면 조금 못본거고 450점대면 죽을 각오를 하자. 그런 마음가짐.

수능 당일은 정말 꿈만 같았다. 낯선 교실과 낯선 이들 사이에서 내 인생을 결정짓는다는건 정말로 현실감이 없었다. 기억이 나는게 있다면 마지막 화학2시험을 보기 직전에 코가 완전히 막혀버려서 호흡이 거의 불가능했고, 그 때 다급히 손을 들어 화장실에서 코에 약을 넣었던 것 정도. 뇌에 산소가 안들어가 시험을 망치면 어쩌나 하는 마음이 매우 크게 작용했다.

결과는, 원점수 477점. 딱 내 실력이다. 라고 생각은 했지만 왠지 눈물이 나왔다. 집에서 한동안 울었다. 왠지는 모르겠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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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따라 내게 공부법을 물어오는 사람이 많다. 수학은 어떻게, 비문학은 어떻게, 등등... 대체로 나는 그네들이 아니기 때문에 그네들이 느끼는 심정을 정확히 이해할 수 없다. 개개인이 다르고 그 삶이 다르다. 누군가에게 맞는 방법이 다른이에겐 극약일 수 있다. 나 자신조차 위와 같은 식으로 살아온 결과로서 이렇게나 주위로부터 좋은 평판을 듣고 찬사를 듣게 되었다는 사실에 대해선 그닥 바람직하다고 생각지는 않는다. 결과만을 두고 보면 분명 대단해보일지라도, 그 과정이 이토록 상궤와는 다른 것이었다. 어떻게 내가 이렇게 해라 저렇게 해라 말을 할 수 있겠는가?

때때로 내 노력의 근원이 무엇이었을까를 생각해본다. 그 답은 유치하게도. 지고 싶지 않았을 뿐이었다. 나를 제약하는 수많은 주위의 환경에 대해 내가 가진 유일한 무기가 노력이었고, 나는 그것으로 싸워나갔다. 그리하여 만일 내게 공부를 어떻게 했느냐고 물어본다면, 그 떳떳치 못한 공부법을 가르쳐주기 보다는, 단 한마디만 해주고 싶다.

“노력하라.” 라고.

누구의 명언인지는 모르겠지만, ‘아쉬움을 남길지라도 후회는 남기지 말라’라는 말을 나는 굉장히 좋아한다. 후회는 과거지향적이고 아쉬움은 미래지향적이다. 나는 과거를 파묻는 후회를 하기보다는 미래를 밝히는 아쉬움을 갖고 살아가고 싶다. 그리하여 나는 노력할 것이다. 앞으로도 나를 제약하기 위해 별의별 수단을 내세우는 이 세계에 한점의 후회를 남기지 않도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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