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라니 [760533] · MS 2017 · 쪽지

2017-09-14 00:12: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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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오르비 문학 - 불모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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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 노인 : (성적표를 가리키며) 기 인강이란것도 들었는디 도무지 1등급이 안 뜬단 말이야! 아까도 들여다보니까 ebs 완강 한 지는 벌써 오래인데 6등급이잖아! 이상하다 하고 생각을 해 봤더니 미국물 먹은 것이 사교육에 탁 들어 앉아서 상위권을 키웠으니 어디 내가 자라날 재간이 있어야지! 이러다간 ebs만으론 3등급도 안 나는 세상이 될 게다! 말세야 말세!

이때 경재, 서울대 과잠을 차려 입고 책을 들고 나와서 신을 신다가 아버지의 이야기를 듣고는 깔깔대고 웃는다.


경재 : 원 아버지두……


최 노인 : 이눔아 뭐가 우스워?


경재 : 복습은 하지도 않고 남의 인강만 넘어다보며 커리를 짜는 사람이 어디 있어요?


최 노인 : 옛날엔 복습 안해도 1등급 잘만 나왔어!


경재 : 옛날 일이 오늘에 와서 무슨 소용이 있어요? 오늘은 오늘이지. (웅변 연사의 흉을 내며) 역사는 강처럼 쉴 새 없이 흐르고 인생은 뜬구름처럼 변화무하다는 이 엄연한 사실을, 이 역사인 사실을 바로 볼  아는 사람만이 자신의 운명을 개척할 수 있다는 사실을 최소한도로 아셔야 할 것입니다! 에헴!


(중략)


경수 : 여보 감님! 여긴 인강시장 한복판입니다. 게다가 메가와 대성이 붙었는데 그래 겨우 20만원이라구요? 그런 당치도 않은 거짓말은 공동묘지에서나 하시오.


복덕방 : 뭐 뭐요? 공동묘지에서라고? 예끼 버릇없는 놈 같으니라구!


경수 : 아니 이 영감님이……


복덕방 : 그래 이눔아 너는 애비도 에미도 없는 놈이기에 나이 먹은 늙은이더러 공동묘지에 가라구? 이 천하에.


최 노인 : 여보 김 첨지. 젊은 애들이 말버릇이 나빠서 그런 걸 가지고 탓할 게 뭐요?


복덕방 : 그래 내가 ebs나 듣고 다니니까 뭐 노베이슨 줄 아느냐? 이눔아! 나도 서울 서울대 출신 아들에다 딸이 육 남매여!


경수 : 아니 그래서 그래서 님 점수는?……


어머니 :  잠자코 있어! 용서하시우. 요즘 은 놈들이란 아무 생각 없이 말을 하니까요…… 게다가 술을 마셨다우.


복덕방 : 음 이놈이 한낮부터 술 처먹고 어른에게 행패구나! 이눔아! 내가 그게 만만하니?


최 노인 : 김 첨지! 쎄 진정하시라니까…… 내가 대신 이렇게 사죄하겠소 원!


복덕방 : 그러고 20만원이 터무니없는 값이라고? 이눔아 누군 돈이 바람 맞은 대추알이라던? 응? 그것도 잘 생각해 서야! 음! 이런 분한 일이 있나!


최 노인 : 글쎄 참으시고 이리 앉으세요.


복덕방 : 난 그만 가 보겠소이다. 이런 일도 기분 문제니까요! 다른 사람 골라서 공동묘지로 보내구려! 에잇.


최 노인 : 아 김 첨지! 김 선생! (하며 뒤를 쫓아 나간다.)


경수 : 제길 무슨 놈의 영감이 저래?


어머니 : 네가 잘못이지 뭐니……


경수 : 인강 이 가격에 팔지 말라고 했는데....


이때 최 노인 쌔근거리면서 등장하자 이 말을 듣고는 성을 더 낸다.


최 노인 : 이눔아! 누가 인강 판다고 했어? 응?


경수 : 아니 그럼 이 인강을 시는 게 아니면 뭣 하러 중고딩나라는……


최 노인 : 이런 쓸개 빠진 녀석 봤나! 아니 내가 뭣 때문에 이 집을 팔아? 응? 옳아 네놈 대학 등록금을 대기 위해서? 응?


어머니 : 아니 그럼 이십만원이란 무슨 얘깁니까?


최 노인 : 네 따위 놈을 위해서 내 인강도 팔아야만 속이 시원하겠니? 나도 공부하게 새로 육 개월만 공유하겠다는 거야!


경수 : 예? 공유라구요? (어머니와 경운은 서로 얼굴을 바라본다.)


최 노인 : 왜 아주 내가 수능 안 그만두는게 눈에 안 차지? 이눔아! 이 애비가 서울대 과잠도 없는 노베가 되어서 죽는 꼴이 그게 그렇게도 보고프냐?


경수 :(당황하며) 아버지 아니에요! 저는……


최 노인 : 아니면?


어머니 : 여보 그럼 인강을 공유해 줘서 뭣 하시게요? 책도 한권밖에 못사는데..


최 노인 : 글쎄 아까 어떤 친구 얘기가 요즘 그 제본집에서 하는 그 뭐드라 ‘복돌이’라든가……


경운 : ‘불법복사’ 말이에요?


최 노인 : 그래 ‘불법복사’ 말이다! 그건 차리는 데 돈도 별로 안 들고 괜찮다고 하면서 종로 4가에 적당한 집이 있다기에 그걸 해 볼까 하고 이 중고나라를 보았지. 그래 얘기가 익어 가는 인데 글쎄 다 되어 간 음식에 코 빠치기로 저 녀석이……


어머니 : 아니 그럼 인강 공유로 이십만원이란 말인가요?  


최 노인 : 그지!  환급만 해도 다시 전부 받을 수 있어!


어머니 : 그런 걸 가지고 나는 괜히……


최 노인 : 뭐가 괜히야?


경운 : 아버지께서 인강을 팔으실 것만 알았어요.


최 노인 : 흥! 너희들은 모두 한속이 되어서 어쩌든지 내 일을 안 되게 하고 내 수험표를 날려 버릴 궁리들만 하고 있구나! 이 천하에 못된 것들! (하며 불쑥 일어선다.)


어머니 : 그럴 리가 있겠어요! 다만……


최 노인 : 듣기 싫어! ( 독서실로 나오며) 이 집안에서는 되는 거라곤 하나도 없어! 흔한 오르비도 렉걸리는 집이 뭣이 된단 말이야! 뭣이 돼! (하며 화밭을 함부로 작신작신 짓밟고 뽑아 헤친다.)


어머니 : (맨발로 뛰어내리며) 여보! 이게 무슨 짓이오! 그게 정성을 들여서 가꾼 것들을…… 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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